STEW

[서평] 판을 바꾸는 질문들 ★★★★☆

읽게 된 동기


STEW 독서소모임 지정 도서. 내가 발제자로 이 도서를 지정했다. 기자 시절 인터뷰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질문의 힘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친구들과 나누고 싶었다.

한줄평


요즘 삶에 질문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왜 질문이 없어졌을까? 질문을 시작해본다.

서평


질문이 그 사람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잘 벼려진 질문은 칼보다 무섭고, 적시에 파고드는 적절한 질문은 분위기를 바꾼다.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기도 하고, 꼼짝 못 하게 만들기도 한다. 보이는 만큼 던질 수 있고, 단 하나의 질문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도 있다.

사회에 나오기 전 여러 교육 기관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사회에 나와서도 배움을 놓지 않았다. 새로움 앞에 설 때면 가끔 눈앞의 누군가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할 때가 있다. 말 그대로 ‘명함도 못 내민’ 적도 많다. 차마 얕은 질문을 던지기 부끄러워 입을 닫을 수밖에 없던 적도 많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던져야 한다. 성장의 시작은 현재 바닥을 인지하면서 시작된다. 그다음은 인정 그 후 비로소 어떤 행동이든 취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껄끄럽더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STEW 독서소모임 친구들과 질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이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은 지난해 IT 기자로 일하던 때 집었던 책이다. 당시 나는 ‘개발하는 기자, 개기자의 개발자 인터뷰’ 일명 <개터뷰>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었다. 온갖 핑계 속에서 책을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고 사색을 했더라면 이후 개터뷰는 좀 더 농익었을 거라 생각한다.

<ASK MORE, 판을 바꾸는 질문들> 잃어버린 내 질문력을 ‘인지’하고, ‘인정’하게 해준 이 책,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 그래서 왜? 왜? 왜?

책을 읽으며 과거 치열했던 내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은 그저 귀여운 질문이지만, 당시엔 꽤 진지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해야 하는지, 뭘 해도 되는지, 뭘 하면 좋을지. 딱히 근거 없는 질문만 던졌다.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해야만 무슨 수든 쓸 수 있다.”

당시 내 질문에 깊이를 더한 것은 책이었다. 방향을 잃을 땐 책이 최고였다. 책은 늘 옳은 방향을 가리키진 않지만, 어떤 방향이든 가리킨다. 방향을 잃어 어디도 가지 못할 땐, 어디든 가는 게 도움이 됐다. 그러려면 어디든 가리키는 책이 꽤 안정감을 줬다.

책을 고르는 것도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다. 딱히 노하우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즐기던 방법은 있다. 중고서점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중고서점에 꽂힌 책은 누군가 돈을 내고 산 책이다. 누군가 돈을 주고 살 만큼 눈에 띄었다는 것이고, 나는 누군가의 선구안에 기대어 숟가락을 얹으면 된다. 내게 ‘누군가 샀다가 판 책이잖아?’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내가 운이 좋다는 것이다. 중고서점에서 제목만 보고 고른 책들이 꽤 성공률이 높았다. 여기서 성공률이란, 내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때때로 적절한 인물이 나타나 내게 동기부여를 했다.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다. 에너지가 떨어질 때면 적절한 인물이 나타났다. 평소 만날 수 없는 거대한 인물이 나타나기도 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이 나타나기도 했다. 나와 무척 비슷해 내 말이면 함께하는 인물을 만나기도 했고, 내게 큰 힘을 주는 인물도 만났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생각나던 인물은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던 친구다. 그래서 내가 운이 좋다는 것이다.

나와 한방을 썼던 룸메이트를 나는 ‘집사람’이라 불렀다. 법대를 나온 집사람은 내 첫 회사 동기였다. 나는 개발자, 그는 법무 담당으로 입사했다. 공감대가 없을 것 같았던 집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꽤 잘 맞았다. 2년 정도 한 집에서 생활했는데, 치킨을 먹으며 주고받던 질문이 떠오른다.

나 : “저 사람 멋진 것 같아.”

집사람 : “왜?”

나 :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생각을 발표하잖아? 인사이트도 좋다고.”

집사람 :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생각 발표하는 게 멋있어?”

나 : “멋있지. 안 멋있어?”

집사람 : “세용이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생각 발표하는 게 멋있구나.”

나 : “? 그게 안 멋있어?”

집사람 : “응. 난 별로.”

나 : “왜?”

집사람 : “? 세용이는 그게 왜 멋있는데?”

나 : “?? 어… 책도 많이 읽은 것 같고, 저거 준비도 많이 했을 거야. 아마, 글도 잘 쓸 거야. 이야기가 잘 정제돼 있거든.”

집사람 : “응. 세용이는 책 많이 읽고, 글 잘 쓰는 사람이 멋있나 보네. 너도 그렇게 하면 되겠네.”

나 : “그러네”

적고 보니 참 재미없는 대화 같다. 우리는 이런 대화를 수도 없이 나눴다. 서로 놀라는 식이었다. 우리는 한 가지 장면으로 서로 다른 생각을 했고, 존중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음이 때로는 당연했다.

“헬런은 내게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그 사람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집사람과 대화를 통해 ‘나’를 배웠다. 내가 멋있어하는 사람은 꽤 일관됐다. 그들이 보이는 모습, 행동, 말투 등을 나는 선망했다. 그리고 집사람은 그들의 캐릭터를 잘 파악했다.

집사람은 내게 자주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꼭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그 이유가 뭐냐?” 마치 소크라테스인 양 묻고, 또 묻는 집사람 덕분에 내가 어떤 방향을 향하는지 깨닫게 됐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크라테스를 대화에 좀 더 초대해볼 만 하다.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쟁점이나 껄끄러운 결정을 논할 때 말이다.”

집사람이 이직하고, 나는 기숙사를 혼자 쓰게 됐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홀로 묻고 답하는 것을 시작한 것 말이다. 책에서 묻고, 내 질문의 꼬리를 무는 시간은 홀로 쓰는 기숙사 방 안에서 계속됐다.

어쩌면 나는 책이 아닌 ‘나’를 따라왔는지도 모른다.

◆ 내가 개발자를 그만둔 이유 그리고 다시 개발자가 된 이유.

2015년 12월. 4년 2개월간 개발자 생활을 마치고, 퇴사했다.

스타트업이 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대표가 되고 싶었다. 그동안 틈틈이 연습한 아이템을 살려 <도밍고컴퍼니>라는 스타트업을 만들었다. 아이템도 있고, 기술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잘 안됐다.

밥은 먹어야 했다. 정신을 차리니 프리랜서 개발자로 밥을 먹고 있었다. 몇몇 팀원을 구하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는 생존할 수 없었다. 스타트업 대표라곤 하지만, 실상은 그저 프리랜서 개발자였는지도 모른다.

기회가 왔다. 내 경험을 지켜보던 사람이 IT 기자로 일할 기회를 줬다. 고민이 됐다. 커리어를 바꾸는 압박감은 가볍지 않았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감수할 용의가 있는지 묻자.”

나는 내게 물었다. 왜 망설이는지, 내 선택으로 잃는 것은 뭔지, 얻는 것은 뭔지. 1시간, 2시간. 나는 가만히 앉아서 질문을 던지고, 적었다. 몇 가지 이유, 몇 가지 이유에 관한 시나리오를 적었다. IT 기자에 도전하기로 했다. 도전의 근거는 내 질문과 답변에 다 적혀있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IT 기자가 된 지 1년이 흘렀다. 나는 다시 내게 물었다. 내가 생각한 시나리오에 어디쯤 와 있는지 확인했다.

내가 얻을 거라 생각했던 것을 얻지 못했다. 내가 잃을 거라 생각했던 것을 잃지 않았다. 바둑판 위 바둑알을 봤다. 막연했던 상황이 정리됐다. 내가 다음에 놓아야 할 바둑알 위치가 눈에 보였다.

나는 다시 개발자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과 너무도 다른 모습이 됐다. 내가 물었던 질문에 관한 답을 찾기도, 찾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때로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답이 되기도 한다.

나는 개발자로 돌아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 사색 노트

내 현재를 만든 수훈 갑은 단연 <사색 노트>다. 2011년 에버노트가 핫했는데, 딱히 적을 게 없던 나는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감성을 넣고 싶어 일기장 대신 <사색 노트>라 정했다.

내게 사색 노트는 내 삶의 많은 굴곡을 기록한 역사서다. 내 분노, 슬픔, 기쁨 등을 모두 적으려 노력했다. 내 성장기가 온전히 담겨있고, 누구도 보여줘선 안되는 비밀 노트다. 누군가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한 권’ 따위의 시시콜콜한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사색 노트를 가져간다고 말하겠다. 그러면 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사색 노트>가 뜸했다. 방금 펼쳐보니 무려 한 달간 작성하지 않았다.

사색 노트를 붙잡고 씨름한 수많은 밤이 떠오른다. 사색 노트가 나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사색 노트를 쓰지 않은 나는 내가 아닐까? 사색 노트를 쓰지 않고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쩌면 내가 더 이상 사색 노트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라면, 어쩌면 더 이상 사색 노트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면.

더 이상 가지고 놀 수 없게 된 장난감이 생각난다. 마치 영화 <토이 스토리>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장난감 없는 놀이를 알게 돼 실컷 즐기다, 문득 장난감의 존재를 떠올린 소년 같은 기분이랄까?

그런데, 갑자기 즐겁지 않은 기분이랄까?

◆ 다시 소년으로, 그래서 왜?

올해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직을 했고, 이사를 했다. 전에 없던 많은 소비로 인해 통장이 비워졌고, 새로운 도전이 눈앞에 쌓여있다. 함께하던 많은 친구가 주변을 비웠고, 그보다 더 많은 친구가 주변을 채웠다. 많은 것을 얻었고, 잃었다. 잃은 만큼 얻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하다. 잃어버린 장난감은 어쩌면, 내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던 많은 것을 가졌지만,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해야만 무슨 수든 쓸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면, 내가 가지게 된 많은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그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따라가던 것은 ‘나’ 였기 때문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껄끄럽더라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다시 나로 돌아간다. 나로 돌아가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기다리고 있을까? 잃어버린 내가 돌아올 수 있게 기다리면 될까? 잃어버린 내게 북극성은 뭘까? 나는 내 북극성이 될 수 있을까?

“절대 실패할 리 없다는 것을 안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질문을 다시 시작한다. 어쩌면 너무 멀리 와버린 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왜 ‘나’를 찾아야 할까? 내가 아닌 ‘나’는 뭘까? 놓았던 내가 몸부림치는 모습을 발견한 것 같다.

어디서 잃어버린 지 모를 나를 찾기 위해, 수 없이 읽은 책들을 뒤로 한 채, 수 없이 쓴 사색 노트를 뒤로 한 채 그저 내게 묻고 싶다.

어디로 갈까?

인상 깊은 문구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