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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하고 복잡한 사랑 끝에 남는 건 죽음

한줄평

다양한 사람들의 복잡한 관계, 우울한 사회상이 어울어져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서평

실제로 이 책은 나에게 꽤나 재미있었다. 매우 속도감있게 전개가 이루어져 읽는데 집중하기도 용이했다. 하지만 이해는 되지 않는 책이다. 다른 멤버들은 인생의 책으로 꼽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누군가에게는 영감을 주고 뜻깊은 책이겠지만 나에게는 ‘아 무언가 있긴 한데 나는 모르겠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서평도 길지 않게 쓰려한다. 내가 이해하고 공감했던 부분까지만 써보려 한다.

수면 위의 행동은 수면 아래 감정을 나타내지 못한다.

토마시, 테라자, 사비나, 프란츠, 시몽, 카레닌 등 주인공들은 모두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소련의 공산화가 진행중인 동유럽을 배경으로 각 인물들은 매우 인상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들의 관계는 혼란이다.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글을 전개하며 작가는 각 인물 한명한명의 심리를 세밀히 묘사해준다. 특히 불륜이라 할 수 있는 관계에서 토마시가 가지는 태도, 사비나의 예술관을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묘사하는 기자에 대한 항의, 죽음 직전 법적 아내를 보는 눈빛에 대한 프란츠의 심정 등 다양한 장면에서 수면 아래 숨어있는 인물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사람의 행동은 그 감정을 오롯이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이 책은 정말 인상깊게 활용한다.

토마시

토마시는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다. 그는 분명 배우자를 사랑한다. 그 스스로도 헷갈려하고 다른 여자를 습관적으로 만나기는 하지만 결국 그녀가 테레자에 가지는 감정은 사랑이다. 사랑에는 육체적인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테레자와 그 사이와 같은 사랑의 형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 뿐이다.

성공한 외과의사에서 정치세력에 찍혀 유리닦이, 트럭운전수로 지속적으로 그의 사회적 지위는 하강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갈수록 더욱 안정되어간다. 그의 혼란은 사실 테레자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는데서 시작했다. 사랑을 의심하던 그는 지속적으로 다른 여자를 만나며 그 의심을 이어나갔지만 사회적 지위가 하강하면서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달라지면서 줄어들었으나 의심이 사라지진 않았다. 결국 시골에 가서 테레자와 카레닌을 묻으며 서로 간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면서 그는 안정을 찾게 된다.

토마시 이야기 중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매우 와닿았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통해 그는 공산화의 모순을 꼬집었고 당시 사회 상류층의 위선을 까발렸다. 그런 소신을 그는 끝까지 꺾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다소 오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정말 생각지도 않게 나에게 이 책을 각인시켰다. 아마 10년 뒤 이 책을 떠올릴 때 나는 다른 이야기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는 아마 내가 소설 속에서 현실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현대 대한민국에도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지만 스스로는 정의감에 불타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디 그들이 더이상 부끄럽기 전에 오이디푸스의 과오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응당한 대가를 치르길 바란다.

테레자

테레자는 시골소녀다. 사랑에 빠져 도시의 혼란에 몸을 던졌고 도시의 혼란이 점점 심해지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혼란을 지속적으로 겪었다. 프라하에서 취리히에 가서도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시골소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진을 통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자 했었으나 결국 그것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처음 도시에 나온 사랑하는 토마시마저 버리고 프라하로 돌아간다. 프라하에서도 그녀는 원하는 일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돌아온 토마시와 함께 할 시간마저 없는 뒤바뀐 생활을 하게 된다.

토마시의 여성편력은 지속적으로 테레자를 괴롭혔고 그러한 토마시에 대해 그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다른 여자의 냄새를 배고 온 토마시에 대해서도 그녀는 말 한번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결국 정말 시골 소녀였던 것이다. 시골소녀가 자신의 소중한 것 하나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품는 것과 같이 자신의 사랑인 토마시가 정말로 떠날까 두려워 혼란에 빠진 것이다. 결국 테레자는 시골에 돌아가서 진정한 평화를 되찾는다. 카레닌과 함께 소를 치면서 좋아하던 책을 마음껏 읽으며 그녀는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카레닌의 죽음을 통해 토마시와의 관계를 재발견하고 춤을 추러 가는 장면은 그를 무엇보다 확실히 보여준다.

사비나

소설 중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작가의 작품관을 표현하는 듯한 사비나의 예술관이었다.

사비나는 배신이 목표인 여자였다. 프란츠에게 사비나의 배신은 그녀를 동경의 대상으로 만들었을 정도이다. 그녀의 그러한 배신은 처음에는 모든 것에 대하여였다. 조국을 도망나온 뒤 조국을 침략한 세력에 관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끝에 가서 사비나는 그녀의 배신은 키치에 대한 배신이라 했다. 사실 아직 키치가 어떤 것인가 정확히 이해는 못하지만 나름 짐작으로는 모두가 옳다고 하는 것, 좋다고만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녀의 인생은 불행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보통의 관념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런 삶은 극적이게도 그가 바란 키치에 둘러싸여 끝나게 된다. 미국으로 건너가 상류층으로 그녀의 예술적 능력을 인정받으며 가식적인 문화에 스며들어가는 것으로 그녀는 살아가게 된다. 이런 그녀의 삶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부정하려하지만 이미 그것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프란츠

프란츠는 엄친아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없는 것을 동경했고 그를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진흙탕으로 뛰어들어갔다. 예쁜 부인, 안정적인 직업, 소득, 사회적 지위를 다 버리고 사비나라는 자신과 전혀다른 존재를 추구하며 새로운 자신을 찾으려 했다. 결론적으로 그의 그러한 시도는 절반만 성공했다.

그가 믿었던 대장정은 결국 허구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된다. 대장정은 허울뿐이었고 어떠한 사람도 대장정에 진심인 사람은 없었다. 단지 구호만을 외치고 사람을 감동시키기 위한 운동일 뿐 실제로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러한 모순을 죽음으로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공산주의를 비롯한 현대에도 여전히 진행중이 대장정의 모순과 위선을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가 프란츠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후 그의 의사와는 상반되게 그는 결국 자신이 처음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곳은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사비나가 배신했던 곳이다.

시몽

토마시의 아들이라는 시몽은 매우 신기한 캐릭터다. 마지막에 가서는 겉으로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 안정을 찾은 것 같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 같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동경을 평생 품고 살아왔다. 아버지에 대해 멋대로 상상하고 아버지를 신성시하며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기자를 도우며 사회운동을 했고 아버지의 사회운동에 대한 미참여를 보고 사회운동에 대한 혼란을 느끼며 결국 사회운동을 벗어나 현실에 적응하며 살게된다.

시골에 가서 살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상상에 기반하여 지속적으로 연락하여 접점을 만들고자 했다. 어찌보면 시몽은 너무나 이해가 되는 캐릭터이다. 어린 사람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마음대로 상상하고 부풀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시몽은 인물 중 사비나와 함께 살아남는다. 이를 그가 젊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는 시몽은 진정한 안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시골로 돌아간 토마시-테레자와 달리 시골에서도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하고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찾으려 했기에 그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였다. 사비나 또한 모순된 일상 속에서 혼란을 여전히 겪고 있었다.

카레닌

개인적으로 카레닌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동물보다 못하다. 동물보다 복잡하지만 결국은 동물과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멀리 돌아오는 존재이다. 개의 삶은 인간보다 훨씬 짧다. 짧은 카레닌의 삶은 단순히 반려견이라기 보다는 모든 주인공의 삶의 무상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외계인이 본다면 우리의 삶 또한 매우 짧을 것인데 왜 우리가 개와 다른가. 창세기 구절로 시작한 챕터에서 인간의 특별함을 지우며 인간과 개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결국 모든 주인공들이 매우 혼란스러운 일생을 살아왔지만 카레닌과 같이 안정을 추구한다. 카레닌은 극 중 초반부터 안정된 상태로 그 상황에 적응하여 살아왔지만 극 중 인물들은 매우 복잡한 삶을 살다가 결국 카레닌과 같은 안정을 찾고 곧 죽음을 맞이한다. 이처럼 개와 사람은 다르지 않고 오히려 동일한 목적을 지닌 존재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이다.

주인공들은 정말 말도안되게 커다란 혼란을 고민한다. 키치에 대한 배신이 그러하고 대장정에 대한 회의가 그러하다.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본질, 사회의 본질과 같은 것을 고민하는 것 모두 거대한 혼란에 대한 고민이다. 이런 고민의 끝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조그만 카레닌과 같다. 삶의 모습이 어떤 방식이든 그 사람이 추구한 이상이 무엇이든 결론은 사과 나무 아래 네모난 흙더미가 그의 마지막이 된다. 그래서 사람은 정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는 것 같다. 결국 어떤 사람이든 같은 모습으로 끝이 나기에, 끝에 가서야 이를 깨닫는 존재이기에 그러한 거 같다.

그럼에도 사람은 위대하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쌓아도 이는 말일 뿐 끝을 바꿔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나누며 전해왔다. 그 결과가 이 세상이다. 21세기의 발전한 문명이 그 증명이다. 물론 여전히 혼란스럽고 갈등하며 결론을 못 내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진 않는다. 한 개인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혼란은 전해지고 발전한다. 그것은 위대한 것이다. 유한한 삶에서 영원한 혼란을 낳은 것이다. 자신의 존재는 잊혀질지 몰라도 어떠한 과거의 가벼운 존재가 떠올린 생각, 혼란은 남아 세상에 전해진다. 그렇기에 인간은 개와 다르고 가벼운 존재지만 동시에 위대한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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