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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속에 감춘 개인 사상…좁은 시야가 신념을 가지면

아쉽다는 말로 서평을 시작한다. 좋은 주제, 좋은 접근이 좁은 시야와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어떤 문제도 단순히 감정을 내세워 해결될 수는 없다.

여기에 사상을 더했다. 다양한 해법이 있을 터인데, 어째서 한 방향으로 결론 짓는지 모르겠다. 정해진 답을 향해 문제를 만들고, 풀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훌륭한 문제 제기

책은 훌륭한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나는 매일 아침 30분씩 이 책을 읽었고, 5시간 만에 책을 다 읽었다. 보름 정도 걸린 셈이다.

5시간 만에 현 가족공동체의 단점과 아쉬운 정부 정책, 선진국 사례와 소외된 계층에 관해 빠르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저자 기본 커리어인 ‘기자’가 어떤 능력치를 갖는지 알 수 있었다.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받음.” ‘체벌’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이다.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이 2001년에 아이들이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정리한 기록이다.

난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체벌을 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손을 든 적이 없으며, 내 실수에 몇 차례 나무란 것을 제외하곤 큰소리를 친 적도 손에 꼽는다. 때문에 나는 체벌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 논리라면 나는 어머니에게 체벌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몇 차례 회초리를 맞은 기억이 있다. 전혀 괴로운 기억이 아닌 내게 저자 주장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그런데 저자는 체벌도 ‘학대’라고 한다. 때문에 일단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가 조사한 다양한 자료를 통해 ‘체벌’이라는 게 굉장히 넓은 범위를 말한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나는 더 나은 방법으로 육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곳곳에서 내 배경지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도 있었다. 혼외출산을 장려해야 한다느니, 해외 입양 자체를 부정하는 등 좀 더 정보가 있어야 고개를 끄덕일 만한 큰 덩어리도 나왔다.

그럼에도 저자가 제기한 ▲가정폭력 ▲친권 ▲미혼모 등 문제를 인식하는 데는 탁월한 글이었다. 한 번쯤 이 문제에 관해 생각하고, 더 나은 방안은 없을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문제 제기를 왜 이렇게 풀었을까?

길을 잃은 문제…방향은 사상으로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은 학교에서나 찾을 수 있다. 어떤 정답에 관한 문제를 찾고, 그 문제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 대안에 관한 문제를 찾으며 인류는 발전해왔다.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 따위는 없다. 정답이 있었다면 인류사에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인류는 늘 선택을 했고, 승자는 선택을 정답을 만들기 위한 승자독식 사회를 만들어왔다.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은 없다.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저자는 정답을 강요한다. 그동안 문제 제기가 마치 개인의 정답을 논하기 위함으로 보일 정도다.

사회학자 김혜영은 이를 가족을 통한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발전과정에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을 골자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 것이다.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저자는 모든 문제를 정치와 엮는다. 저자가 주장하는 정답은 ‘큰 정부’다. 대부분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줘야 한다는 논리다.

저자가 말한 ▲가정폭력 ▲친권 ▲미혼모 등 문제를 꼭 큰 정부로 풀어야만 할까?

이런 저자의 주장이 무섭기까지 한 점은 큰 정부라는 선택을 논하기까지 현재가 갖는 장점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점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진행돼야 하는 것은 ‘문제 파악’이다. 이 문제 파악에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만 논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프로그래밍 세계에서 상용 소프트웨어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문제 해결도 아니오, 정확한 문제 해결도 아니다. 기존 정상 기능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문제 A를 해결하겠다고, 문제없던 B, C, D를 문제로 만드는 게 주니어 개발자가 흔히 하는 실수다.

저자는 ▲가정폭력 ▲친권 ▲미혼모 등 문제 해결을 위해 기존 정상 기능을 부숴버리려 한다. 과연 현재 구조가 무조건 나쁜 것만 있을까? 현재 구조를 없앴을 경우 또다시 누군가는 소외될 가능성은 없을까? 왜 그런 언급은 없을까?

2017년 12월 국회가 이듬해 9월부터 소득 하위 90%의 만 0~5세를 대상으로 월 10만 원 아동수당을 선별 지급하기로 합의한 내용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동수당을 선별 지급하면 수당을 받지 못하는 소득 상위 10%를 걸러내는 데 들어갈 행정 비용과 사회적 갈등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제도의 근본 취지도 심각하게 훼손된다.

아동수당을 모든 아이들에게 지급하고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걷으면 될 일을 정치적 흥정에 붙여 선별 지급하겠다는 것은 양육을 가족 책임에서 사회 책임으로 가져오자는 아동수당의 근본 취지를 저버리는 것이다.

고소득자 기준은 어떻게 정하는가? 100억 원 자산가의 소득이 0원이라면, 이는 상위 10%로 들어가지 않는가? 소득 상위 10%에게 세금을 더 걷을 경우엔 사회적 갈등이 생기지 않는가? 이번 통신비 지원 2만 원을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 수 있다.

큰 정부에 관한 이중잣대는 본문에서도 슬쩍 드러난다. 결국 정부가 많은 것을 보장하면, 행정 비용과 이를 행하기 위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은 어디서 갑자기 떨어지는 게 아니다. 현 정부 정책처럼 기존 민간 인력을 활용하게 된다.

창업 정책 중 팁스(TIPS)가 있다. 팁스는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정책으로 민간 투자기관이 1억을 투자하면 이를 신뢰하고 정부가 총 10억에 달하는 추가 투자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즉, 민간 투자기관이 좋은 기업을 찾아야 한다. 이 정책에서 핵심은 민간 투자기관의 역량이다.

큰 정부를 논하며, 기존 기관에 관한 불신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세 미혼모가 생계를 꾸리며 검정고시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아이를 24시간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는데, 보육료가 벅차 부담이 덜한 고아원에 딸을 맡겼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죽었다.

은비 엄마는 17세에 미혼모가 되어 홀로 생계를 꾸리며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 딸을 24시간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다. 보육료가 벅차 전전긍긍하던 그는 하는 수 없이 보육료 부담이 없는 고아원에 딸을 맡겼다. 은비 엄마도 본인도 외할머니에게 자랐기 때문에 딸이 시설에서 자라는 걸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입양을 보내면 아이가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랄 수 있다고 해서 은비 엄마는 입양을 결심한다. 그러나 결국 딸은 싸늘한 주검으로 엄마에게 돌아왔다.

아이가 왜 죽었는지는 본문에 없다. 소름 돋게도 저자는 아이가 죽은 이유를 사회적 지원으로 꼽는다. 고아원이 아이를 죽이는 곳인가?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다.

사회적 지원이 있었다면 미혼모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이 대신 검정고시를 준비한 것은 미혼모의 선택이었다. 미혼모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고아원에 아이를 맡긴 것이지, 검정고시를 위해 아이를 죽인 게 아니다. 여기서 잘못은 고아원에서 아이가 죽은 것이지, 고아원에 맡길 수밖에 없도록 사회적 지원이 부족한 게 아니다.

이쯤 되니 저자 논리 핵심이 보였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저자 논리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저자 논리에는 ‘감정’이 들어있다. 17세 미혼모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국가 지원이 적어 고아원에 딸을 맡기는 이야기에 미혼모 본인이 외할머니에게 자라는 이야기가 왜 들어가는가?

그저 ‘이렇게 슬픈 이야기니, 너는 여기서 마음을 아파해야 해’라고 들린다.

보육료 부담이 적어 고아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보육료를 더 주고 24시간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게 하는 게 큰 정부인가? 24시간 어린이집에서는 아이가 죽지 않는가? 24시간 어린이집에서도 아이가 죽으면, 아이는 어디로 보내야 할까?

만약 24시간 어린이집을 ‘아이가 죽지 않는 곳’이라 정의한다면, 보육료 부담이 없는 고아원에서도 아이가 죽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게 더 근본적인 해결책 아닌가? 사회적 지원을 더 주면, 아무도 고아원에 가지 않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것 ▲정해진 답을 향해 논리를 푸는 것 ▲큰 정부를 세금으로 충당하려는 것 등에서 나는 저자가 ‘기자 출신이 맞구나’ 싶었다.

저자는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18년간 동아일보 기자, 6년간 국제구호 개발단체, 문화체육관광부 차관보, 여성가족부 차관 등 커리어를 보냈다. 나는 저자 커리어 중 ‘비즈니스 경험이 없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기자는 비즈니스를 모른다. 한국에 기자 출신 손꼽히는 창업가는 없다. 현시대는 자본주의다. 자본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글을 쓰고, 구호단체에서 일하고, 정책을 만들며 저자는 얼마나 비즈니스를 이해했을지 의문이 든다.

저자는 이 책을 마치 기사처럼 썼다. 기사는 한 가지 큰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저자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결국 사상이라는 것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촛불집회에서 또 하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장면은 대거 참여한 청소년들이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촛불을 든다”라는 어른들에게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한 촛불을 드는 광장에선 ‘아이’가 존중받는 시민으로 설 틈이 없다.’

많은 시민이 참여해 비폭력 시위를 지킨 것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몇몇 학생이 집회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건 억지다.

집회에 참여하는 시점에도 미혼모는 검정고시와 고아원 사이 고통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다. 정부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 고민 자체를 없애주는 것 아닐까?

여러 선택지가 있음에도 마치 기사처럼 자신이 정한 주제를 위한 자료를 나열하고, 명사의 이야기를 끌어오고, 심지어 주제를 위해서라면 근거 없는 트위터 글까지 나열하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자신의 주장을 위한 자료만 나열한 저자에게 저자가 적어둔 글로 서평을 마치려 한다.

사람들은 외집단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으며 내집단보다 덜 도덕적이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아니, 인류 역사가 지속하는 한 문제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열린 마음을 가져주길 바란다. 특히, 권력을 쥔 많은 정치인이 그래 주길 바란다.

한줄평 ★★☆☆☆

대의 속에 감춘 개인 사상…좁은 시야가 신념을 가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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