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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가 되어 내게 쓸 차례다. 21가지 제언을.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로 전한 메시지를 잊지 못한다. 그가 자료 속 진실을 찾아, 과거를 머릿속에 그리는 능력은 놀라울 정도다. 더욱이 그 그림을 전 세계 독자들 머릿속에도 그렸다는 것은 정말 마법과도 같다. 그렇게 그가 던진 메시지를 떠올리자면, 숙연해질 정도다.

그런 그가 사피엔스, 호모데우스에 이어 쓴 이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은 2020년 12월을 마감하기에 적절한 책이었다. 최근 내 고민과 올해 아쉬움으로 마친 내 도전을 보면, 유발 하라리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마저 보는 것 같다.

종교, 어리석은 인간을 다룰 정도로만 덜 어리석은 그것

난 종교를 믿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종교를 등에 업은 ‘종교인’을 믿지 않는다.

천주교 모태 신앙이며, 유아세례를 받고, 복사단과 학생회장을 지나 교리교사까지 했던 내가 등을 돌린 건, 어쩌면 현시대 천주교를 말하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기도를 하는 부모님에게 나는 차라리 그 시간에 TV를 보는 게 낫겠다고 말한다. 가만히 앉아 바라는 걸 되뇌는 행위가 과연 무엇을 바꾸겠는가? 때로는 스스로 화도 났다. 성당에서 보냈던 내 시간을 모아 다른 걸 했더라면, 적어도 조금은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신앙생활을 했을 땐 꽤 깊이 그들과 함께했다. 때문에 가까운 종교인들도 있었고,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봤다. 때문에 나는 그들을 종교와 동일시 할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바꾸려 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 어디쯤 자리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귀를 막았고, 지친 나는 스스로 떠났다. 결코 그들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종교라는 것 자체가 싫어지기도 했고, 그렇게 시야가 좁아져 귀를 막은 그들이 미웠다.

이런 내게 유발 하라리는 종교의 무서움을 말한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이유.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이유.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그들의 이야기.

어쩌면 기계와 알고리즘 세상에서 방향을 잃은 더 많은 사람이 찾아갈 곳은 종교가 아닐지. 그렇게 그들을 조종할 종교란 무엇인지. 마치 펜으로 맨 등판을 벅벅 긁는 듯한 아픔이 있는 글자들이었다.

21세기의 종교는 비를 내리게도 못하고, 병 치료도 못 하고, 폭탄도 못 만들지만, ‘우리’가 누구이며 ‘그들’은 누구인지, 누구를 치료해야 하고 누구에게 폭탄을 투척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그렇게 종교가 알고리즘에 침투하고, 기계 속에 자리 잡을 때면 그들은 인간들을 사로잡기 위해 건드린 ‘인간적인 면모’처럼. 기계를 사로잡기 위해 ‘기계적인 면모’를 건들지 않을까.

기술, 인간 역사의 모든 것

어떤 사건이 생기고, 그 사건에 휘말려 모든 것을 망쳤을 때. 홀로 어둠에 남아 집히는 걸 모조리 던지며 눈물을 뿌릴 때. 그러다 지쳐 헛웃음만 나올 때. 문득 생각한다. 그냥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인류를 발전시킨 ‘기술’이 결국 모든 악의 근원인가 싶다. 그래도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이란 기술로 밥 먹는 내게 이는 꽤 큰 딜레마다. 어쩌면 ‘기술’이란 종교에 몸 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렇다.

최근 관심 두는 투자자 중 캐서린 우드가 있다. 우드는 ARK라는 성공적인 액티브 ETF 운용사를 이끈다. ARK는 올해 가장 성공적인 ETF 운용사 중 하나다. ARK는 ‘파괴적 혁신, 4차 산업혁명’ 등 키워드로 ETF를 운용한다. 바이오, 핀테크, 인터넷, 로보틱스 등 향후 인류 미래를 바꿀 산업에 투자한다.

캐서린 우드는 지금까지 인류를 뒤흔든 기술로 증기기관, 철도, 전기, 전화, 자동차, 컴퓨터, 인터넷 등을 꼽는다. 그리고 앞으로 인류를 뒤흔들 거라 예측하는 기술과 산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어쩌면 당신도 ‘기술’이란 종교에 빠졌는지 모른다.

개발자로 꽤 오랜 시간 살아온 덕에 종종 듣는 말이 있다. 개발자여서 좋겠다는 말이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도 만들고, 웹 애플리케이션도 만들지 않느냐고. 만들고 싶은 거 만들 수 있어서 부럽겠다고 한다. 글쎄, 마냥 그럴까.

처음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울 때보다 경험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나아지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고민이 있는데, 나보다 더 나은 기술자들에 관한 부러움. 그들과 좁혀지지 않은 간극, 그래서 나는 뭘 만들고 싶은 것인가 하는 고민. 그래서 나는 어떤 기여를 하는가 하는 부끄러움. 앞으로 뭘 해야 하나 하는 막막함.

결국 똑같다. 기술은 무한하고, 발전 속도를 따라가는 것마저 벅차다. 마냥 기술만 좇아서 될 일이 아니다. 늘 사람과 함께해야 하고, 때론 기술보다 중요한 게 많이 있다. 기술자로 살아가는데도 말이다. 하물며 인류 전체를 본다면, 정말 ‘기술’이 언제나 정답일까.

기술 자체는 나쁘지 않다. 내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때에는 기술이 그것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앞으로는 기술이 나를 대신해 나의 목표를 결정하고 나의 삶을 통제하기가 너무나 쉬워질 것이다.

알고리즘이 인류를 지배하고, 인류는 인조인간으로 살며 서서히 멸종한다는 이제는 흔하디흔한 이야기. 언젠가 올 수 있는 미래지만, 현실은 어긋난 텍스트를 정리하고, 인간이 만든 버그에 갇혀 머리를 뜯는 기술자들이 대부분이다.

기술을 모르는 학자들이 떠드는 미래에 관한 수혜자는 결국 그 학자들이 아닐까. 마케팅 용어를 만들어내고,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고 떠드는 중 결국 그 떠드는 일자리만 생겨난 게 현실 아닌가.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너무도 식상해져버린 비관적인 예측 뒤에 나오는 건, 더 비관적인 예측뿐이다. 모두가 우울함에 빠져서 기술 발전을 막는 게 결국 그들의 해답인가 싶다.

태양이 뜬 낮에도, 네온사인이 켜진 밤에도 왠지 모르게 어두운 거리가 있다. 마치 우리 시대가 그런 거리와 같이 보인다. 그런 거리에서도 누군가는 밝은 얼굴로 힘차게 걷는다. 그들이야말로 기술을 모르는 이들이 말하는 그 ‘기술’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두드리는 종교와 기술이라는 또 다른 종교를 두고, 스스로의 길을 걷는 사람들 말이다. 결국 인류에 관한 해답을 찾는 건, 그들이 아닐까.

그래도 결국, 인간 세상

마치 당장 인류가 멸망하리라 말한다. 마치 당장 내년이 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 말한다. 아니, 마치 당장 내일, 아니 오늘. 새로운 오늘이 될 거라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지구가 멸망할 거라 말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유발 하라리의 이야기 속 논리는 꽤 단단해서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도 인상을 쓰게 하고, 아무런 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렇게 한 장, 두 장 읽다 보면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들어간다.

사피엔스로 과거를 쑤시더니, 21세기 제언으로 미래를 논했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호모데우스를 아직 읽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다.

나는 올해 ‘루틴’에 빠져, 나를 발전시키기 위한 많은 장치를 만들었다. 운동을 하고, 부족한 공부를 하기 위해 삶을 빼곡히 채웠다. 부족함 투성이인 내가 부족함을 채우려면 부족함을 수치화할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발가벗겨진 상태로 추운 겨울 집 밖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사상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늘 환자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몸 어딘가에는 늘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무언가 개선될 것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늘 부족함을 봤고, 그래서 늘 불안했다. 사자가 밀림의 왕인 이유는 밀림 한가운데서 낮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라더라. 사지 멀쩡한 내가 늘 불안에 떨며 뜬눈으로 밤 지새우는 이유는 결국 내가 약해서겠다.

조급해졌다. 어느새 주니어를 벗어나 시니어를 향해 다가가는 커리어. 누구도 내게 무거운 짐을 주지 않았지만, 기술을 모르는 학자가 기술을 우려하듯, 미래를 모르는 내가 미래를 우려했다. 마치 그들의 말처럼,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식이었다.

어떤 주제를 깊이 파고들고 싶다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특히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특권이 필요하다. 비생산적인 경로도 실험해보고, 막다른 길도 탐색해보고, 의심과 심심풀이의 여지도 둬야 하고, 작은 통찰의 씨앗이 서서히 자라서 꽃을 피우게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면 결코 진실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뭐라도 했지만, 뭐든 생각처럼 되지 않더라. 최소 2년. 내가 계획하고 성과를 바랐던 시기의 2년 뒤쯤. 정말 작은 것이 돌아왔다. 누군가는 나를 두고 많은 것을 가졌다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일까. 지금 내가 원하는 건 2년 뒤에나 가질 수 있을 텐데.

그렇게 2년이 흐른 뒤에야 손에 쥔 작은 것을 보며, 이제는 또 다른 것을 원하며 달리는 내 다리를 보며, 그보다 더 멀리 또 다른 것을 고민하는 내 머리를 보며. 그런데 쟤는 왜 나보다 더 가졌나 쳐다보는 내 눈을 보며. 내 영혼이 온전히 머무는 곳이 있기나 한지 스스로 고민하는 내 영혼을 보며.

각자의 세상도 온전히 다루지 못하면서, 더 큰 우주를 바라보는 이들과 나는 도대체 뭐가 다른지 혼란스러울 뿐이다.

마무리

어둠 속에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이 적응해 조금 흐릿하게 보이곤 한다. 그 찰나의 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견뎌보지도 않고 어둠을 논하는 건 꽤 어리석지 않을까.

그저 텍스트로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휘젓고, 내 머릿속을 마저 마구 휘저은 유발 하라리의 논리에 다시 한번 놀라움을 표한다. 할 수만 있다면, 유발 하라리에게 나에 관한 21가지 제언을 올려보라고 하고 싶다. 그는 과연 내 21가지 문제를 어떻게 고를까.

21가지 제언을 위해서 하라리는 인류의 수많은 정보를 수집해 읽고, 엮고, 그 정보 속에 살았을 것이다. 나에 관한 21가지 제언을 쓴다 해도 하라리는 똑같이 하지 않을까?

하라리에게 부탁할 수 없으니, 나 스스로 내게 21가지 제언을 해야 할 테다. 나 역시 그처럼 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읽고, 엮고, 그 정보 속에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이라면, 내가 바랐지만 아직 얻지 못한 것들, 여전히 그것을 위해 움직이는 내 이야기 역시 무의미하진 않겠다.

내가 어디에 취했었든, 내가 어디에 취해있든. 어쨌든 나란 사람은 내 세상에 살 테니 말이다.

읽게 된 동기

스튜 독서소모임 지정도서

한줄평

유발 하라리가 되어 내게 쓸 차례다. 21가지 제언을.

인상 깊은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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