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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책 좀 읽는 사람 중 니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신은 죽었다’는 문장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이 책은 도서 <생각의 싸움> 이후 내가 두 번째로 읽은 철학서다. 그 주인공은 니체.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로 자신의 철학을 소개하는 책을 저자 이진우 교수가 강의했다. 그리고 그 강의 현장을 책으로 풀었다.

[서평] 생각의 싸움 ★★★★☆

굳이 해설서를 읽어야 하나 했는데, 다 읽고 난 지금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또 한 명의 철학자가 내게 들어왔다.

모든 이를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모순 그 자체. 이미 책 부제부터 모순이다. ‘모든 이를 위한,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이게 무슨 말인가.

다 그런 식이다.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되, 차라투스트라를 버려라.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 ▲모든 열정은 덕이고, 모든 악마는 천사다 ▲자신을 경멸하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삶이 모두 정해져 있다고 믿진 않지만, 어떤 운명은 있다고 믿는다. 내가 만난 고마운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이들이 단순히 ‘어쩌다’ 내 곁에 왔다는 게 더 슬플 것 같다. 언제라도 함께이고 싶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를 지금 만난 것도 어떤 ‘운명’이라 생각한다. 최근 내가 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기에 이런 ‘우연’이 간절했고, 덕분에 이 책을 상당 부분 소화할 수 있는 경험이 쌓인 시기다. 아쉬운 것은 충분히 생각하고, 즐기며 읽을 물리적 여유는 없었다는 거다.

묵직한 펀치가 많아 어느 하나를 꼽기 망설여진다만, 몇몇 펀치를 골라보겠다.

자신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남이 가는 평탄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 훨씬 더 쉽죠. 그런데 니체는 이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젊은이들을 유혹해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라고 권유합니다.

꽤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자신만의 길이라. 이를 유혹하고 권유한다는 차라투스트라에게서 조금은 내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 역시 주변 친구들이 스스로의 길을 걷도록 유혹하는 편이니까.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멸할 만한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절대 극복하지 못합니다.

이 ‘경멸’이란 게 처음엔 꽤 거부감이 있었다. 최근 많이 쓰이는 ‘혐오’라는 단어 같달까? 스스로를 경멸하라니, 그게 자신을 극복하며 ‘초인’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니.

다시 생각해보면 꽤 그럴싸한 단어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얼마나 경멸했는지, 경멸했던 나는 얼마나 사라졌는지. 기회가 된다면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주제다.

‘나를 넘어서는 무언가’라는 구절이 중요해요. 나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동경하고, 사랑하고, 창조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나를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극복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많은 철학자를 알진 못하지만, ‘초인’이 되라는 것에서, 결국 스스로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에서, 신은 죽었다는 것에서 니체가 꽤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상을 품은 현실주의자다. 이상으로 가기 위해서 현실을 알아야 한다. 내 현실이 이상이 됐으면 하거든. 만날 수 없는 이상만을 좇는 캐릭터는 정말이지 나와 맞지 않더라.

그런 면에서 니체는 스스로를 경멸하고, 넘어서라는 점에서 내 마음을 꽤 편하게 만들어 준다. 어쩌면 나를 위한 책일까 싶을 정도로.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최근 많은 일이 있었다. 조직 생활은 물론, 내 커리어, 내 인생, 친구, 자본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변화가 생겼다. 나는 이 과정에서 나아가기 위한 경멸이 아닌, 자존감을 잃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철학자들처럼 어떤 끝에 다다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몇 세기가 지난 지금도 적절한 문제의 실마리를 적어 둔 것은 놀랍다. 역시, 이 시기에 이 책을 만난 건 ‘운명’이라 하겠다.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물리법칙에 의하면 위로 던진 돌은 반드시 떨어지기 마련이죠. 아주 당연한 이야기인데요. 모든 던져진 돌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바로 너의 정수리 위로. 이 말은 이상과 가치를 높이 추구할수록 감당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종종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다. 사방에 뿌려둔 것이 한 번에 몰려올 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감추기 어렵다. 성숙하지 못한 시절엔 실제로 도망치기도 했다. 어쩌면 감당하지도 못할 높이로 돌을 던졌나 보다.

뭐, 나 혼자 던진 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니체는 ‘불행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은 경험할 수 없고, 병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불행 없는 행복이란 없고, 병 없는 건강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병을 제거하면 건강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으며, 병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걱정이 많은 편인데, 문제를 만들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문제는 예방할 수 있을 것 같아서랄까. 사실 별문제가 아닐 수도 있고, 문제가 된 다음 푸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나도 이를 최근에서야 배우고 있다.

그런데 니체는 더 나아갔다. 문제(병)와 더불어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단다. 완전무결한 게 어디 있겠는가. 결국 내가 문제를 마주하는 게 두렵기 때문에, 결국 그게 무섭기 때문에 미리 겁먹고 발버둥 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은 혹시 십 년 후를 위해서 사십니까? 십 년 뒤에는 죽을 수도 있는데요. 은퇴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있나요? 열심히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은퇴하는 것이지 은퇴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없을거예요. 뭔가 새로운 게 열릴 거라는 망상과 착각을 하고 저는 열심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매 순간이 삶의 시작이고 종착지라는 이야기예요. 과거, 현재, 미래를 직선적으로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머리 위로 던진 수많은 돌을 보면서, 나는 언제를 위해 사는지 물어본다. 모든 게 한 번에 바뀔 수는 없겠지만. 지금만큼은 나를, 경멸한다.

춤을 춰라

가벼움을 추구하는 철학자라니, 생각도 못 해봤다. 역시 니체는 모순덩어리다. 그런데 이 모순에 유혹되는 날 보고 있자니, 이 책의 제목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그래, 한번이란 단어 말이다.

자신을 진정한 의미에서 경멸할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면을 견뎌내고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를 가질 때 우리는 그것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거죠. 따라서 사랑하는 자만이 경멸할 수 있어요. 약점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낙타와 사자 그리고 아이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사자에 가깝지 않을까?

그다음은 사자의 단계입니다. 사자는 자유 정신을 의미하죠. 최고의 권력자,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야수, 원하면 약탈해서라도 갖고자 하는 정신이 사자입니다. 사자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어요. 내가 중심이에요. 사자의 단계에 오면 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이들도 성장하다 보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서 방문을 걸어 잠그잖아요. 그걸 절대 나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사자의 단계로 진입하는 거예요. 이를 거부하고 문을 열라고 요구하면, 아이를 영원히 낙타로 만들겠다는 거예요. 이 단계를 거치고 나야 나중에 스스로 문을 열어놓습니다.

여러 묵직한 펀치에 얼마나 니체를 소화했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마지막 펀치인 ‘가벼움’은 전혀 소화하지 못한 것 같다. 춤을 추라니, 춤추는 철학자라니.

진지함을 무기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가벼움을 좇으라니. 아이가 되라니. 다시 아이가 되라니. 잠시 차라투스트라를 경멸해본다.

니체의 관점에서 진지함은 죄악입니다. 우리에게서 웃음을 금지하는 것은 삶의 아름다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 삶을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을 파괴하는 것이에요. 웃을 일이 없습니까? 삶의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춤추게 만드는 일이 없습니까? 우리의 의지와 열정이 소진되었다는 것을 의미해요. 어린아이들은 웃지만, 삶의 고통에 찌든 어른들은 웃지 않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진지해서 뭐 하나 싶다.

마무리

차라투스트라를 만나지 않았지만, 나만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 점에서 충분히 고독을 즐긴 내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고 싶다. 차라투스트라의 고독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꽤 고독했거든.

꽤 여러 부분에서 위안을 받은 걸 보면, 내가 외로운 길을 가고 있기도 하고, 여전히 함께 창조할 자들이 많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꾸준히 스스로를 경멸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니체는 투쟁하지 않으면 창조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이야기해요. 우리가 사회생활에서는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넘어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영혼의 투쟁에서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궁극적 가치를 위해서는 실존적 투쟁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초인은 투쟁하는 자,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 자신의 덕성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자입니다.

스스로가 피곤해 스스로를 놓을까 싶었던 적도 많다. 그래도 나를 지키며, 나를 바꾸며 지금까지 온 나와 앞으로도 함께 하고 싶다.

니체가 설정한 삶의 모토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즉 ‘아모르파티’입니다.

그래, 아모르파티다.

읽게 된 동기

스튜 독서소모임 지정도서

한줄평

그래, 인생에 한번은 차라투스트라

인상 깊은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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