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icon STEW

어떤 결과는 행복을 보장하는가

먼저 한동안 읽었던 책 중 가장 읽기 어려웠던 책임을 밝힌다. 정말이지 이렇게 읽기 힘든 책은 오랜만이었다. 독서소모임을 하며 딱 한 번 책을 읽지 않았던 적이 있는데, 몇년 전 ‘군주론’이었다. 도서 월든은 ‘군주론’ 급으로 읽기 어려운 책이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읽었는데, 메시지를 알 수 없는 숲 속에서의 일상은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전 페이지가 기억나지 않는 것은 물론, 한 시간 동안 읽은 내용이 전혀 기억 나지 않기도 했다. 새삼 내 문해력이 이렇게 형편없었나 싶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 배움을 찾아냈고, 하단 인상 깊은 문구를 보면 알겠지만 꽤나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래서 더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해보면, 내가 출판사 대표라면 몇몇 수정을 하고 싶다.

먼저, 이 책의 목적을 명확히 전달하고 시작할 것 같다. 분명히 초반 200페이지는 정독했는데, 저자가 이 책의 독자와 비독자를 설명한 부분을 이 책을 선택한 발제자의 발제문을 통해 알았다. 책의 목적을 좀 더 명확히 전달하는 머릿말이 있어야 하겠다.

둘째, 디자인 요소다. 이 책은 그저 텍스트를 나열했을 뿐 디자인 요소가 전혀 없다. 챕터 도비라를 좀 더 명확히 한다던지, 사이사이 박스를 넣고 설명을 넣는다던지. 원문을 살리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무려 1800년대 텍스트를 그대로 싣는게 마냥 의미가 있을까 싶다.

셋째, 설명 요소다. 1800년대 당시 달러와 센트는 지금과 전혀 가치가 다르다. 이 부분은 현재 가치로 얼마정도 되는지가 담겨야 할 것이다. 1년에 6주만 일하고도 모든 생활비용을 벌 수 있었다는데, 이 부분이 꽤 중요함에도 센트 따위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5년 이상을 이와 같이 오직 육신의 노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그 결과, 1년 중 약 6주일간만 일하고도 필요한 모든 생활 비용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름의 대부분과 겨울 전부를 나는 순전히 공부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었다.

아무튼 저자의 필체를 비롯해 출판사의 편집 방향까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이다. 그래서 1점을 부여한다. 그럼에도 힘겹게 책을 읽었으니 느낀바를 적어본다.

어떤 결과는 행복을 보장하는가.

최근 무거운 번아웃이 왔다. 작년엔 이정도로 무겁게 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집중할 수 있는 세세한 일정을 잡지 않아서인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이번 번아웃은 ‘어떤 결과’가 ‘행복’을 보장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를 얻었음에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노력 뒤에 이정도로 행복이 함께 오지 않은 적이 없기에 나는 꽤 당황했고, 어찌할 바를 모른채 한달 여를 우울하게 보냈던 것 같다.

자기 침대를 어깨에 메고 걷기란 젊고 건강한 사람도 힘에 겨운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픈 사람에게 침대를 버리고 달려가라고 충고하고 싶다.

생각해보면 나는 참 많은 걸 가졌다. 그럼에도 늘 더 뭔가를 가져야 할 것 같고, 그래서 노력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어쩌면 이번 번아웃으로 나는 또 하나를 배운 것이다. 어떤 결과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언제쯤 ‘과정’을 즐길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 과정을 즐겨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된 것도 큰 진전이라 하겠다.

그런데, 아직은 노력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건 꽤 우울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결과가 행복을 주지 않는다면, 과정을 즐겨야 하겠다. 그런데 과정도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원시시대의 소박하고 적나라한 인간 생활은 인간을 언제나 자연 속에 살도록 하는 이점이 있었다. 먹을 거소가 잠으로 원기를 회복하고 나면 그는 새로운 여정을 생각했다. 그는 이 세상을 천막 삼아 기거했으며, 골짜기를 누비거나 평원을 건너거나 때로는 산마루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보라! 인간은 이제 자기가 쓰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배가 고프면 마음대로 과일을 따먹던 인간이 이제는 농부가 되었고, 나무 밑에 들어가 몸을 가렸던 인간이 주택의 소유자가 되었다.

행복했던 시기를 떠올리면, 한달 여 스페인에 머물던 대학교 4학년 시절이 생각난다. 너무 더워서 늘 목이 말랐던 그곳. 그때마다 보이는 자판기와 콜라 한 캔을 뽑아 마시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던 그때.

어쩌면 나는 ‘콜라’가 행복이라 느꼈고 언제, 어디서든 ‘콜라’를 사먹을 수 있도록 노력한 것 아닐까. 그런데 그 ‘콜라’가 행복을 보장하지 않자 좌절한 것 아닐까. 그리고 이제 스페인에서 ‘콜라’를 마셔도 ‘행복하지 않을까’ 두려워진 것 아닐까.

그런데, 스페인에서 콜라를 마시고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될까?

도대체 나는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걱정이 많은 편이다. 뭐든 균형이 중요한데, 나는 능력보다 시야가 조금 더 넓어서 오는 문제 같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그래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거나 대안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빤히 문제가 보인다. 그리고 그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된다.

그래서 나는 늘 불안하고, 이 불안을 함께 해결하지 않는 모든 이에게 불만이다. 그런데 불안이 불만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이 불안은 어디에 쓸 수 있을까?

나는 병아리를 기르지 않으므로 솔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 전부도 아니거니와 보인다고 모두 해결하는 건 아니다. 보인다고 모두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무거운 번아웃이 왔다고 한 이유는 이번 번아웃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번 번아웃도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주변 상황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로지 변한 건 내 마음가짐이다.

문득, 한달 여 고통 받던 내가 지금의 내 마음 상태를 미리 알았다면 어땠을까 싶다. 극복하리란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는 과연 불안했을까? 같은 맥락에서 내가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더 행복해진다면. 그 가설을 내가 믿는다면. 조금은 나를 믿는다면.

대체로 우리는 방 안에 홀로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더 고독하다. 사색하는 사람이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항상 혼자이다. 고독은 한 사람과 그의 동료들 사이에 놓인 거리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보이고, 이 문제를 내가 해결할 거라 믿는다면. 나는 더이상 내가 불안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다. 스페인에서 마시는 콜라가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프랑스에서 마시면 되지 않겠나.

마무리

발제문을 통해서야 알게된 저자의 말 중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다음으로 제외하고 싶은 사람들은 자기의 현재 상황 속에서 자극과 감흥을 발견하며 연인들 사이에나 있을 법한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인데, 나 자신도 어느 정도는 이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부끄럽지만 나는 내 인생에 자부심이 있고, 꽤 열정적이고 싶은 편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만들며, 언제나 나로서 살고 싶다. 때문에 언제든 내 의지를 표현하는데 망설이고 싶지 않다.

어쩌면 저자가 쓴 대부분의 텍스트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 역시 부끄럽지만, 나는 내 신세를 한탄하며 주저앉아 울고만 있고 싶지는 않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쓴 대부분의 텍스트가 내겐 의미 없이 읽혔던게 아닐까 싶다.

비판적 사고를 지향하지만, 조금은 날카로움을 무디게 해도 되겠다 싶은 시간이었다. 어쨌거나 이 책은 지금으로선 내게 맞지 않았다.

한줄평

충분한 각색이 필요한 책.

인상 깊은 문구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