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W

바람을 읽어야 한다

올해는 참 많은 정보 앞에 놓이고 있다.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여러 데이터를 읽고,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있다. 흐름을 이해하면 참 많은 게 보인다. 여태 왜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나 싶은 후회도 밀려온다. 어쨌거나 ‘여전히 기회는 있다’로 일단락 되니 다행이라 생각될 뿐이다.

최근 더 깊어지는 남녀갈등이나 자산 격차. 직종 갈등이나 학벌 등 세상엔 여러 갈등이 있다. 나 역시 몇몇 갈등을 지켜봤고 여전히 갈등 속에 살고 있다. 아마 이 작은 나라에서 갈등이 없는 곳에서 살기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도서는 내가 감히 접근하지 않았던 무거운 갈등이다. 세대 담론. 어느새 사회생활 10년 차에 접어들고 조직내 역할이 바뀌며 나 역시 어떤 지점에 서 있다. 최근 받아보는 이력서에는 나와 10살이 넘게 차이나는 지원자도 보인다. 저자는 10년을 소세대로 나누는데, 조직 내 나와 다른 세대가 생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참 이상하다.

혹자는 80년대생을 두고 낀 세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낀 세대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년도가 있지만, 조직 내 막내를 벗어나 리더와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다 보니 낀 세대인가 싶다. 여하튼 가운데는 참 어려운 법이다.

저자는 도서 <불평등의 세대>를 통해 386세대를 논한다. 이들이 얼마나 권력을 쥐고 있고, 어떻게 쥐었고 그래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사실 이런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우리는 어떤 문화에 있는지를 어떤 데이터를 적절히 제시하며 풀어간다.

도입부는 꽤 지루했던 편이다. 하지만 장을 넘길수록 꽤 적절한 주장이다 싶다. 어째서 이런 맥락을 짚는 책이 올해 내 앞으로 오는가 싶지만, 이 역시 어떤 바람이라 생각하련다.

386세대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90년대에 30대였던 이들. 나로서는 내 부모님 세대를 말하는 것이다.

학창시절 현대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정치 따위는 관심 없던 터라 이들이 얼마나 현 시대에 권력을 쥐고 있는지 몰랐다. 해를 거듭하며 권력이란 게 어떤 힘을 갖는지 조금씩 이해했고, 성인으로서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세대가 이정도로 한국을 장악한줄은 몰랐다.

2016년 총선에서 50대와 60대 당선자 구성비는 무려 83퍼센트다. 산업화 세대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96년의 73퍼센트를 10퍼센트나 추월했다. 산업화 세대의 세대 독점 이후 20년 만에 ‘세대 독점’ 현상이 더 노골적인 모습으로 재귀한 것이다. 2016년 총선에서 30대 당선자는 단 두 명이다. 부로가 20년 만에 30대 정치인이 한국 정치에서 사실상 거세된 것이다. 40대의 당선자 점유율 또한 17퍼센트로 역대 최하위다. 문제는 이러한 한세대의 가대 대표가 정치권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상층 노동시장을 구성하는 조직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데 있다.

386세대가 속한 50대와 60대 정치인은 2016년 총선에서 무려 83퍼센트를 가져갔다. 이들의 사고가 온전히 정책에 반영되는 것이다. 블루오션과 레드오션을 모두 경험한 나로서는 시장이 갖는 흐름이 어떤 힘을 보이는지 경험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정책은 흐름을 만들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힘은 정치 뿐만이 아니었다.

그 이전 세대들이 50대 초·중반에 최대 점유율을 찍고 50대 후반부터 급속히 뒤로 물러나는 데 비해 1960~1964년 출생 세대는 2010년대 초·중반 최초로 40퍼센트를 돌파하더니, 2010년대 후반에도 수위(37퍼센트)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그사이 이사진에 진입하기 시작한 386 후기 세대(1965~1969년 출생) 또한 35퍼센트를 기록하며, 386세대의 이사진 점유율은 70퍼센트를 넘어선다. 50대와 60대의 이사진 비율은 정치권에서 동일 세대들이 국회를 장악한 비율(83퍼센트)와 비슷하면서 더 높은 86퍼센트에 이른다.

거대 기업 이사진은 정치권보다 더 높은 86퍼센트를 장악했다. 사실상 국가 방향성은 물론 기업 방향성도 이들 세대가 정하고 있는 것이다.

몇 살 차이 안 나는 주위 선후배와 이야기를 나눠도 우스갯 소리로 ‘세대 차이 난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 나와 세대가 다르다. 어떤 문화도 다르거니와 사고 자체가 다르니 어떤 선택도 다르겠다. 현 시대를 살아가며 무려 80퍼센트 넘게 장악한 이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않고 무언가 이루기란 정말 쉽지 않겠다.

그런데 다소 억울한 것은 이들이 노력만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란 것이다.

1997~1998년 금융 위기는 기업 내에서 이들의 권력을 극적으로 강화했다. 먼저, 1997년 금융 위기의 폭탄은 산업화 세대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당시 이들(1930년대 후반~1940년대 후반 출생 세대)은 추풍낙엽처럼 노동자시장에서 퇴출됐다. 대기업들은 금융 위기를 적체된 인력을 구조 조정하는 기회로 삼았고, 이 세대는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 없이 ‘구조 조정’의 칼날에 몸을 맡겨야 했다. 반면, 30대로 기업 조직의 밑바닥부터 중간 허리를 구성하고 있던 386세대는 이 칼날을 무사히 비켜나가며 대부분 생존했다. 그런데 이들이 의도하지 않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그다음 세대의 ‘전멸’로부터 비롯됐다. 1997년 금융 위기에 닥쳐 기업들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정규직’ 사원을 채용하지 않는다. 채용하더라도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장기 호황에 입사한 386세대에 비해 훨씬 작은 규모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화된 채 입사한다. 386세대는 졸지에 아래위가 모두 잘려나가면서 기업 조직에 사실상 홀로 남겨진 ‘거대한 세대의 네트워크 블록’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사건들로 우연히 얻게 된 힘을 이들은 놓지 않고 있다. 도대체 이들은 왜 권력을 놓지 않는가. 한껏 이들을 속으로 째려보다 보니 문득 이들이 내 부모님 세대라는 걸 잊고 있었다. 아니, 이들이 우리 부모님 세대라면 자녀들은 이들 덕분에 잘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정말 문제는 이 세대가 아닌, 이 세대 엘리트들에게 있다.

엘리트 이야기

다소 오해를 했다. 저자는 분명 앞서 언급했는데 말이다.

나는 일단 두 세대를 소환할 것이다. 산업화 세대인 1930년대 출생 세대와 민주화 세대인(386이라 불리는) 1960년대 출생 세대가 그들이다. 두 세대의 ‘세대 엘리트’들이 만들어져 부상하는 과정과 한국형 위계 구조가 서로 맞물리는 과정이 드러나면, 이 책의 말미에서 세번재 세대인 1990년대 출생 세대가 자연스럽게 소환된다. 물론, 오늘의 청년 세대인 이들은 이 한국형 위계 구조의 주연이 아닌, ‘희생자’로 등장한다.

386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90년대에 30대였던 이들이되 이들 중 ‘엘리트’를 뜻한다. 즉, 60년대생 모두를 뜻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시절 대학 진학률은 매우 낮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 세대가 그렇게 자녀 입시에 집중했나보다. 이들 엘리트에게 모든 걸 빼앗긴 게 억울해서 말이다.

어쩌면 이는 이들 엘리트가 유도했을지 모른다.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드는 건 어떤 성공을 위한 강력한 준비다. 이들이 만든 판 위에서 노는 건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일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그다지 열심히 싸우지도 않았다. 이길 생각조차 없었고, 이겨도 뭔가 얻고 싶은 것도 없었다.

이들 386세대 엘리트가 무서운 건 이런 것이다. 자신의 자녀들이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두고, 심지어 싸울 의지 조차 빼앗았다. 학군이나 사교육 등이 이에 해당하겠다.

민주주의를 논하며 세대를 바꾼 자들이 결국은 그 앞 세대인 1930년대생보다 더 강한 연대를 구축했다. 심지어 기존 유교 사상을 더 강력히 이용했다.

화이트칼라의 세계에서 경쟁을 통해 기업 조직의 정점에 오른 386세대와, 블루칼라 생산직의 세계에서 연대를 통해 ‘전투적 조합주의’ 노조를 건설한 386세대는 ‘나이만 같을 뿐’ 이념적으로는 다른, 세대 내의 상호 이질적인 집단들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두 집단 모두 ‘동아시아 위계 구조’를 철저히 이용하여 현재의 권력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우리나라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헬조선은 너무도 흔한 말이 됐고, 흙수저는 더 이상 누구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저 당연한 말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아차 싶다. 싸울 의지 조차 가져가는 것. 여전히 이들의 계획은 그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결국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건 자신들이 가졌던 무기 아닐까? 젊음 말이다. 앞으로도 이들은 청년 세대를 압박할 것이다. 뒤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대물림을 준비하면서 말이다.

빈약한 마무리

저자가 풀어낸 세대 문제는 꽤 인상 깊었다. 현재 우리나라가 갖는 갈등과 엮여 꽤 많은 부분에 고개가 끄덕였다. 아쉬운 것은 무엇을 의식한 것인지 마무리가 너무도 빈약했다. 이 부분이 저자 스스로가 문제 제기 역할에 머무르고 싶어서인지, 출판사 의지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자라면 꽤 실망스럽겠다.

또 다른 이유는 위계 구조 아래에서 ‘묵묵히’ 이 생산 시스템을 떠받치며 자신의 아이디어와 노동력을 조직에 바쳤던, 한국형 위계 구조의 코어 세대가 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된 세번째 이유는, 세계화와 함께 ‘개인주의’의 문화에 익숙한 청년 세대들이 산업화 및 386세대의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계 구조 코어 세대가 노화하는 것, 새로운 청년 세대가 계약서에 사인을 거부하는 것 따위가 386세대에게 무슨 문제가 될까? 정말 이정도가 386세대에게 위협이 될거라 생각하는가?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386세대는 자녀 세대에게 대물림만 성공하면 되는데 말이다.

국민연금을 개편하고, 부동산 상속을 투명하게 하는 것 따위로 과연 이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싶다. 애초에 이런 정책 결정 자체에 이들이 83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다. 그게 정말 가능할거라 보는가?

시민사회와 젊은 유권자 집단은 386세대를 통한 ‘대리정치’를 끝내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386세대가 장악한 정당과 국가 조직에 자신들 세대의 대표자를 더 확보하라고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정치를 시도해야 한다.

내 제안은 간명하다. 연금의 틀을 뜯어고쳐야 한다. 첫번째 방안은, 자신들이 낸 연금보다 더 과도한 수혜를 누리는 1950년대생 은퇴 노인들과 앞으로 은퇴할 386세대의 소득대체율을 줄이거나 최소한 동결하는 것이다.

가능한 대안은 386세대의 자산 증식 및 증여·상속 활동에서 발생하는 보유세, 양도소득세, 증여세, 상속세를 엄격히 집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일부를 청년 세대 주거권 보장을 위해 사용하도록 법제화하는 것이다.

내가 마무리가 빈약하다 하는 더 큰 이유는 청년들에게 던지는 해결책에 있다. 이들에게 한다는 말이 고작 투표권을 잘 행사하라인가? 그게 이 시대 청년들에게 할 최고의 해결책인가?

이 책을 다 읽은 내 답은 이렇다. 이 책에 담긴 메시지를 이해한 청년이 과연 ‘아, 투표를 잘 해야겠다’고 생각할 것 같은가? 주위 친구들에게 투표를 잘 해야 한다 말하며 정치권에 조금씩 발을 들여 83퍼센트를 70퍼센트로, 60퍼센트로 낮춰 청년을 더 잘 살게 할 것 같은가?

결국 저자는 앞서 내가 던진 가설 중 전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결국은 이렇게까지 던지는 게 스스로의 역할이며 이후는 너희가 잘 해보라며 몸사리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세대 엘리트가 아니지만, 386세대 엘리트와 같은 위치라면 이렇게 하겠다. 그냥 한국을 뜨겠다. 내가 도대체 왜 이들과 싸우며 한국을 바꿔야 하는가? 왜 그 역할을 내게 맡기는가? 세대 엘리트라면, 충분히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데 굳이 왜 희생해야 하는가?

그게 386세대와 다른 것이다. 개인주의가 싹텄다. 아니, 개인주의가 아닌 합리주의다. 자신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보이는데, 어떤 대의를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가. 그게 도대체 동아시아 위계 구조와 다를게 뭔가.

결국 이 책도 위계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구나 싶다.

마무리

아쉽다. 앞서 말한 내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겠단 논리는 결코 현재 내 스텐스가 아니다. 청년 세대 엘리트들이 나서서 한국을 바꿀 명분 따위가 없다는 거다. 386세대가 가진 힘과 그 과정을 소개한 것은 충분히 잘 이해했다. 그런데 그래서 청년 세대 엘리트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뭔가. 왜 그 말은 하지 않았을까.

결국 끝까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386세대의 마지막 선택이라 본다.

공무원에 목숨 걸고, 소확행에 몰리는 세대다. 충분히 계산적이고 어쩌면 그들과 다르게 너무도 똑똑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떤 꿈을 꾸지 못하고 단순히 계산만 하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청년 세대를 묶을 리더십은 없다. 세대에 속한 나로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선이지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에 나를 바치기엔 후폭풍이 너무도 그려진다. 결국 이렇게 선진국처럼 점차 각박한 세상이 되는게 아닐지 싶다.

불평등의 세대가 아닌, 각자도생의 세대가 오는 것 아닐까.

읽게 된 동기

스튜 독서소모임 지정도서

한줄평

바람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상 깊은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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