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icon STEW

결국은 각자도생이다

미래를 주제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명견만리>. 독서모임에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종종 읽고 있다. 넓고 다양한 주제를 다뤄 흥미를 끌기에는 적절한 책이다. 다만 지면의 한계인지 얕은 깊이로 다소 불편한 결론을 마주하는 맥락을 보자면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나 싶다.

하지만 이 불편함이 이 시리즈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6장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이를 풀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랐고, 나는 이 부분을 국가에 전혀 기대하지 않는 점도 놀랍더라. 국가 단위로 확장돼야 하는 주제라면 언제쯤 우리나라에서 만나볼 수 있을까 싶었다.

9장과 10장은 꽤 흥미로웠다. 나는 IT인으로 오프라인과 다소 멀다 보니 평소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9장과 10장을 보는 시야를 다른 장에서도 느낀 독자라면 이 책이 꽤 재밌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특히 이 책을 여는 1부 불평등은 내게 불편할 따름이었다. 내가 불편했던 1부와 흥미로웠던 2부, 4부를 나눠본다.

불평등

내가 불편하게 느꼈던 1부 ‘불평등’이다. 공존을 위해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건 알겠다만 기득권이 아닌 내 입장에서 불편했다면 이 책을 결코 잘 풀어냈다고 할 수 없겠다.

“국회의장이 본회의장에서 두드리는 망치와 목수가 못을 박으면서 두드리는 망치의 가치가 동등하게 인정받아야, 아이들도 꿈을 다양하게 가질 수 있다.”

이해가 되는가? 국회의장의 망치와 목수의 망치가 어떻게 같은 가치가 될 수 있을까? 이 책 1장에 나온 이야기다.

국회의장의 망치가 결정할 수 있는 일과 책임져야 하는 일. 그리고 목수가 결정할 수 있는 일과 책임져야 하는 일. 이 둘의 가치를 같다고 말하는 피디의 근거는 뭘까? 20년 넘게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했다는 피디가 편집 시 누르는 엔터키의 가치와 20년 넘게 편의점 알바를 한 알바생이 누르는 엔터키의 가치가 같을까?

장 사이사이 담당 피디 의견이 들어있는데 불편했던 ‘교육’ 이야기도 1장과 같은 피다가 썼더라.

“한편 서울대학교는 2005년에, 출신 고등학교 교장의 추천을 받은 학생을 대상으로 수능 점수가 다소 낮더라도 발전 가능성을 보고 선발하는 지역균형선발 제도를 도입한 바 있다. 2005년 당시 특수목적고 학생 중심의 특기자 전형, 지역균형선발 전형 그리고 일반 전형으로 입학한 서울대 학생들의 4년간 학점을 추적 조사했는데, 입학했을 때는 지역균형선발 전형 학생들이 특기자 전형 학생들보다 학점이 낮았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시점부터 역전하기 시작해 졸업할 무렵에는 지역균형선발 전형 학생들이 가장 높은 학점을 유지했다. 이 자료가 의미하는 바는 수능 시험에서 서울대에 입학할 수 있는 성적을 냈다고 해서 그 학생들만이 진짜 인재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잠시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이 서울대 출신이라고 한다. 그 사람을 두고 ‘그래요? 몇 학점 받았어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가? 수석이나 차석 등 의미있는 결과를 낸 사람에게는 그럴 수 있겠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학점을 묻지는 않는다.

서울대는 서울대다. 그 자체만으로 의미를 갖는 학벌이다. 수능이라는 전쟁에서 서울대라는 타이틀은 ‘승리’를 뜻하며, 그 이후는 또 다른 전쟁이다. 즉, 서울대생은 이미 한 번 승리한 병사다.

서울대 학사를 졸업하고 석사, 박사를 밟는다면 학점은 중요하겠다. 하지만 학사 이후 취업을 하거나 창업을 한다면 학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학점이 높다는 것 따위가 모든 분야에 잣대가 되지 않는다. 피디는 이걸 몰랐을까?

수능 점수가 인재를 결정짓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2년 뒤 학점이 역전되는 현상으로 인재를 논한다. 애초에 문단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입학 점수로 인재를 논할 수 없는데, 이후 학점으로 인재를 논하는 근거는 또 무엇인가? 수능 점수는 안 되고, 학점은 되나?

학점이 높으면 승리자인가? 학점이 높은 사람이 승리자라는 근거는 어디있나? 그 뒤의 자료를 제시하지 못하는데 인재를 논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교육’을 짚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풀어내는 방식 자체에 공감하지 않는다. 수능 점수가 다소 낮더라도 발전 가능성을 보고 선발했다면 그 이유가 고작 ‘높은 학점’인가? 학점을 더 잘 받을 수 있으니 수능 점수가 낮아도 뽑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졸업 후 두 그룹의 행보는 어떻게 됐는가? 학점이 낮아서 성공 가도를 달리지 못했나? 학점이 높아서 성공 가도를 달렸나? 인생에 수능 점수는 중요한 건 아닌데, 학점은 중요했던 것인가? 피디가 말하고 싶은 게 학점을 잘 받자인가?

그런데 더 충격적인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은 무려 3장의 제목이다. 바로 “같은 시간 같은 일을 하면 같은 돈을 받자”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심지어 3장을 쓴 피디는 다른 피디다. 명견만리 팀 자체가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듯싶다. 3장을 쓴 피디는 김밥천국과 신라호텔 레스토랑에서 같은 값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같은 시간을 할애해 만든 음식에 관해 말이다.

3장을 쓴 피디가 만든 다큐멘터리는 같은 시간을 할애해 편집한 초등학생이 만든 영상과 같은 가치를 지니는가? 아니, 조금 더 할애해 편집한 초등학생이 만든 영상보다 가치가 떨어지나?

같은 시간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결과를 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며 감성적인 글로 3장을 마무리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가장 낮은 수준의 출산율을 매년 경신하는 대한민국에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보통 사람들의 희망이라는 것을.

과연 보통 사람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들은 훌륭한 성과를 낸 사람과 비교해 어떤 결과를 낸 것인가?

세금으로 풀자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세금은 어디서 회수하는가? 재벌 따위를 옹호하는 말이 아니다.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이다.

굉장히 불편함을 감수하며 읽었다. 심지어 나도 혜택을 받아야 하는 약자 입장인데 말이다. 과연 이런 논리가 스스로 강자가 됐을 때도 유지될지 싶다. 감성에 호소하는 글은 주관적인 감성일 뿐이다.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숫자에 기반한 주장을 했으면 한다.

병리

빈약한 근거로 나열된 글을 읽으며 불편한 마음을 누르기 쉽지 않았다. 어쩌면 앞선 1부를 통해 ‘화병’이 도졌는지 싶다.

보고서에 따르면, 17 ~ 25세 영국인의 43퍼센트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며, 75세 이상의 영국인 중 30퍼센트는 외로운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고 답했다. 외로움이 우울증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로움을 주변과 공유하고는 있을까? 열 명 중 한 명 이상이 외로움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았다. 보고서는 이런 외로움이라는 사회적 전염병이 영국 경제에 매년 360억 파운드(약 46조 원)가 넘는 피해를 주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3부 ‘병리’는 보다 이해할 수 있는 글로 쓰였다. 다행히 앞서 비판했던 피디와는 다른 이름이었다.

나도 올해 참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고, 나는 이해받고 싶었다. 진지하게 정신과 상담도 고려했다. 앞서 상담을 받았던 친구에게 물어 병원을 찾아보기도 했다.

놀랍게도 그 정도만으로 나는 위로가 됐다. 내 질문에 친절히 답해줬던 친구도 고마웠지만 정작 내가 치유된 건 내 행동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진심을 보였던 스스로에게 치유가 된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저 스스로를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외로움과 우울증이 영국 경제에 매년 46조 원 피해를 준다는 건 어떤 계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국자 차원에서 접근해 국민의 우울증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간단히 해결될 수 없는 남과 북, 좌와 우, 남과 여로 나뉘어 싸우는 동양의 한 나라와 비교하면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노력을 보인다는 건 꽤 부러웠다.

세대별로 느끼는 외로움을 조사한 결과, 예상외로 20~30대 청년들이 다른 세대에 비해 외로움을 가장 많이 느낀다고 답했다. 은퇴를 하고 사회적으로 고립에 빠지기 쉬운 50~60대보다도 훨씬 높은 수치가 나왔다.

청년은 외롭다. 젊으니까 괜찮아라는 말에 많은 것을 참게 되고, 젊으니까 나중에 보상받는다는 말에 미래를 기다려야 하나 싶다. 젊으니까 지금이 제일 좋을 때라는 말에 도대체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하나 싶다.

이 글에 어떤 말을 쓴다 한들 변화할까 싶다. 그저 내 주위에 더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 좀 더 힘을 주고, 나 역시 한 번 더 힘을 내는 것으로 말도 안 되는 수치를 낮춰보련다. 미래는 그저 보통 사람이 아닌 ‘청년’에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청년은 마음이 늙지 않은 모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지역

30대에 들어 두 차례 이사를 하며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오프라인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전부 바뀌어야 함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이 각박한 세상에 내 한몸 뉘일 곳이 있는 게 감사하다. 한편으로는 이마저도 힘든 사람들을 떠올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사회를 만든 기득권에 강한 불만을 토로한다.

사람은 이익을 좇는 동물이다. 나는 이를 부정하며 온갖 사탕발림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위정자와 기득권층을 혐오한다. 그들 스스로도 이익을 좇기 위해 행동하면서 왜 대중은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가. 스스로 더 큰 이익을 보기 위함 외 다른 이유가 있는가?

아파트에는 아궁이 대신 입식 부엌, 재래식 화장실 대신 수세식 화장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의 동네에는 없던 공원과 놀이터, 주차장, 경비실, 복지관, 쓰레기장도 함께 들어섰다. 아파트 단지는 그 자체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새 동네’였다. 결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집만이 아니라 깨끗하고 안락한 동네까지 ‘구매’하게 했던 것이다. ‘새 동네’ 만드는 일을 맡은 대형 건설사들은 공사뿐 아니라 설계와 분양까지, 노다지를 떠안게 되는 셈이니 정부의 정책을 두 손 들어 반겼다. 많은 학자가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를 ‘건설사와 정부의 이해가 만든 합작품’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국가가 공공예산으로 마련해야 할 분을, 시민이 직접 구매하도록 떠넘겼다는 것이다.

꽤 명쾌한 이 문단에 현 국가 문제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단지를 지나가지 못하게 출입을 막고, 단지 사이사이 벽을 치는 등 사유지를 활용해 도시를 개선한 후폭풍은 오로지 서민의 몫이다. 건설사를 배불리며 성공한 정책으로 경력을 포장한 이들은 여전히 행복한 오프라인 삶을 살고 있을 테다.

아파트 단지의 역사가 수십 년에 이른 지금 그곳에서 태어나 성인이 된 세대가 등장하면서 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이 우리의 심성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기적인 사람이 아파트에 입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에 사는 동안 이기적 심성이 길러지는 것이다.

결국 이 구조는 각자도생 DNA를 만드는 것으로 우리를 진화시켰다. 결국 이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인의 이득을 더욱 더 찾아먹는 것 뿐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선 어떤 할리우드 영화처럼 지구를 초기화하는 것뿐인지 싶다.

마무리

현실을 보고 싶은대로 본 1부 ‘불평등’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꼈고, 그래도 함께하고자 노력하는 3부 ‘병리’를 읽으며 조금은 따뜻했다. 하지만 4부 ‘지역’을 읽으며 이미 썩은 시스템을 봤고 결국은 각자도생뿐인가 싶다.

이 책이 대중에게 불편함을 주고 어떤 시야를 만드는 것이라면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1부 ‘불평등’은 정말이지 잘못 됐다. 어떤 사상 따위를 공영방송에서 전파하는 게 올바른 일인지 검토가 필요하겠다.

정말이지 믿을 게 하나 없는 세상이다.

한줄평

결국 결론은 각자도생이다.

인상 깊은 문구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