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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역사 다큐멘터리

연말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일이 쌓였다. 독서소모임에 벌금제도를 시행하고 처음으로 책을 제시간이 읽지 못했다. 주제도 전혀 내 삶과 닿지 않아 월말이 다가오는 게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이 책을 독서소모임 전날에 펼쳤다.

제목은 <역사의 쓸모> 역사가 쓸모 있다는 걸 말하겠다는 저자의 들어가기 글을 보며 그저 빨리 다 읽어 헤치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역사가 쓸모 있어 봤자 역사 아니겠는가.

그렇게 내 주말 오후를 순삭한 어떤 역사를 만났다.

역사

난 이과생 출신에 공대를 나와 개발자가 되며 전형적인 공돌이 테크를 탔다. 컴퓨터를 좋아하니 컴퓨터학과를 가보라는 부모님의 말에 컴퓨터학과에 입학했고, 전공을 살리고 싶어 개발자가 됐다. 그런데 첫 선택인 이과는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았다.

나는 화학과 지구과학을 좋아했다. 그리고 사회 등 과목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특이하게 내가 좋은 점수를 받은 건 사탐과 과탐. 즉, 한국 교과과정에서는 함께 선택될 수 없는 그것이었다.

굳이 나누자면 사탐보다는 과탐이 좋다는 이유로 나는 이과로 향했다. 흔히 수학이 좋으면 이과, 싫으면 문과로 가는데 나는 사탐과 과탐 중 더 좋은 것을 택했다. 여러모로 나는 한국 교과과정과 어울리지 않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나는 역사와 멀어졌고 공대에 가고 나서부터는 정말이지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역사를 좋아했다. 정확히는 어떤 이야기를 좋아했다. 소설책도 좋아했고, 어떤 숨겨진 이야기나 판타지 세계 등도 좋아했다. 이 탐구심이 내게 사탐과 과탐을 좋아하게 만들었나 보다.

그렇게 멀어져서인지 나는 저자가 말하는 대부분의 역사 이야기를 몰랐다. 탐구 영역을 좋아했다면 개인적으로라도 찾아보지 그랬냐고 묻는다면 이래저래 다른 것을 보느라 바빴다고 답하겠다. 저자가 책에서도 말하지만 우리네 청년들은 꽤 바쁘다. 나 역시 이래저래 바빴을 뿐이다.

책은 정말 술술 읽혔다. 한줄평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역사 다큐멘터리 나레이션’이라 썼는데, 저자가 마치 나레이션처럼 편안한 문체로 적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체를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저자가 좋은 선생님이어서인지 때로는 TV 교양 프로그램을 보는 느낌도 들었다. 문자에서 이런 느낌을 받을 줄이야.

특히 시치미 이야기나 장보고 이야기, 이순신 이야기, 장수왕 이야기, 정도전 이야기 등은 내가 즐겨 읽었던 중국의 삼국지에 전혀 꿀리지 않는 재미 요소가 있었다. 우리가 좀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저자 말처럼 삼국유사가 좀 더 각색돼 알려졌더라면, 문과를 택하지 않아도 역사와 가깝지 않았을까 싶더라.

그리고 앞으로 이 영역에서 우리나라가 두각을 보일 거라는 말에 동의한다. 이제 K-히스토리가 유명해지는 걸까?

자존심

책을 읽으며 메모를 한 부분이 있다. 장수왕 이야기다. 나는 장수왕이 오래 살았다는 것만 알았지 다른 역사는 몰랐다. 이토록 외교에 높은 레벨을 가진 왕이었을 줄이야.

사회에 나오고 매해 힘겨운 시기를 보냈지만 만 10년을 맞이한 올해는 유독 힘들었다. 정말 많은 일이 한 번에 몰려왔고 나를 구성하는 톱니바퀴 중 단 하나라도 조금만 어긋났더라면 모든 걸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다. 심적으로 정말 궁지에 몰렸던 여름이었다.

나는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얻어낸 모든 것 중 단 하나라도 놓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뭔가를 놓는다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느니 내가 먼저 다 놓아버릴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중 나는 내가 버려도 될 것을 하나 더 찾아냈다. 자존심이었다.

장수왕은 풍홍을 받아들임으로써 많은 자원을 얻었고, 북위에 몸을 숙임으로써 전쟁도 피했습니다. 이득을 취하고 손실은 피했어요. 체면을 잠시 내려놓은 대신 실속을 챙긴 겁니다. 이게 장수왕의 선택이었어요.

자존심을 버리자 놀랍게도 모든 게 술술 풀렸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자존심을 세웠나 싶었다. 책 뒷부분에 조선 현종 때 궁중의례의 적용문제인 예송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치 올해 여름이 이 이야기와 비슷했다. 지나고 나면 정말 별것 아닌데 그때는 왜 그렇게 시야가 좁았나 싶다.

저자의 말대로 역사 속에서 이런 인사이트를 얻어낼 수 있다면 역사는 쓸모가 있겠다.

철학

책을 읽고 나면 보통 별점을 준다. 이를 위해 책을 읽으며 별점을 가늠하곤 하는데 어떤 지점에서 별점이 생기기도, 사라지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별점이 생긴 지점을 말할까 한다.

여유가 없어 책을 읽지 못했고 벌금이 확정된 상황에 문득 생각이 났다. ‘아, 내가 어느 순간부터 왜 책을 매번 급하게 읽는 거지?’ 생각해보니 작년에는 매일 아침 30분씩 책을 읽었다. 아, 다시 생각해보니 올해는 ‘비효율의 해’라며 일부러 비효율적으로 살아보기 위해 계획을 다 없앴더라.

작년 나는 매일 아침 영어 문장을 외우고 책을 읽는 등 루틴을 만들어 수행했다. 올해는 이 루틴을 다 없애는 테스트를 해봤다. 그렇게 없어진 것은 루틴만이 아니었더라.

평생을 다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으면 대부분 쉽게 답하지 못합니다. 사랑도, 돈도, 다른 목표도 다 중요하지만, 정말 내 삶을 던질 만큼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려우니까요. 아마 그런 생각을 해본 사람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이걸 이룰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을 바쳐도 좋다!’ 이렇게 말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입니다.

요즘은 정말 하루하루가 빠듯했다. 늘 회사에서 시급한 업무가 들어오는데 팀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내 일이 아닌 팀 전체 일을 커버해야 하니 업무 볼륨이 급격히 늘었다. 여기에 스튜 운영이며, 개인 집필 업무. 여기에 내 커리어도 신경 써야 하는데 내 취미며, 친구들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꿈을 놓았나보다.

물론 현재 커리어에서 이루고 싶은 것과 앞으로 할 일이 그래도 있는 편이다. 장학재단을 만들고 싶고, 축구 구단주가 되고 싶다. 여러 가능성을 매번 생각하고는 있지만 작년 여러 루틴을 수행할 때처럼 매일같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저자는 역사에서 철학을 발견했더라. 과연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면 가로로 확장하는 건 참 빠르게 되는 것 같다. 이미 저자는 한 분야 전문가이며 여러 분야로 확장하는 듯했고, 어떤 철학을 만들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더라.

마무리

최근 딱딱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책이 가볍다고 해서 울림이 없는 건 아니더라. 이를 <역사의 쓸모>를 읽으며 다시 느꼈다.

역사 속에서도 배울 게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배움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역사는 쓸모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을 덮은 지금 저자가 들어가며 글에서 ‘역사’를 찬양하던 게 떠오른다. 역사는 삶의 해설서라는 말. 조용한 주말 오후 소소한 울림을 주기에 적절했던 가볍고도 참 쓸모있는 책이라 하겠다.

한줄평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역사 다큐멘터리 나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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