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icon STEW

그래서 나는 일한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2013년 여름이다. 일도 재미 없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참 재미없던 시기였다. 당시 한 고객사에 파견을 가서 모바일 앱을 개발했는데, 매일매일이 지치고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 내가 선택했던 게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중고서점을 자주 방문했는데 그때 <왜 일하는가>라는 책 제목이 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곤 별점 5점을 줬던 책이다.

2013년 서평 -> [서평] 왜 일하는가 ★★★★★

그로부터 무려 8년 반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개발자로 일하지만 그때 했던 고민은 하지 않는다. 물론 고민의 가짓수와 갯수는 훨씬 더 늘어났지만, 요즘은 일이 재밌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재미있는 시기다.

그동안 이나모리 가즈오의 책을 다시 보진 않았지만, 가슴 한켠엔 늘 이나모리 가즈오가 있었다. 내가 200개가 넘는 서평을 썼다고 하면 종종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이 책 <왜 일하는가>가 떠오르곤 했다. 그만큼 내 주니어 시절에 큰 충격으로 남았던 책이다.

사회생활 만 10년을 넘기고 이 책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그래서 나는 왜 일했는지, 어떻게 일했고, 어떻게 일하고 싶은지 적어본다.

한심한 놈!

나는 첫 회사를 4년 다녔다. 입사 초기에는 다소 운이 없었는데, 부서가 많은 일을 예상하고 사람을 뽑았지만 일이 부족했다. 주로 외부 프로젝트를 하는 부서였는데 갑자기 내부 프로젝트를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 외부 프로젝트가 생기자마자 바로 투입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은 늘지 않았고 덕분에 막내인 내게 일이 오지 않는 상황이 지속됐다. 우울한 시기에 친척 형을 만나 불만을 토로하며 퇴사하고 싶다 했더니 그때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선택이 ‘퇴사’다. 왜 가장 쉬운 선택을 가장 먼저 하려고 하느냐. 다른 노력은 뭘 해봤느냐.

당시 나는 그 말을 듣고 퇴사하지 않았다. 내가 조직에서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 쳤다. 놀랍게도 그 뒤부터 일이 쏟아졌고 일을 무척 많이 하다가 퇴사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나모리 가즈오도 비슷한 상황에 친형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어렵게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교수님 소개 덕분에 가까스로 교토에 있는 회사에 들어갔는데, 고작 1년도 참고 견디지 못하다니 한심한 놈이군!

비슷한 이야기지만 사실 대부분 신입사원이 겪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회가 어디 내 마음 같이 되던가. 다 마음에 안 들고, 다 이해가 안 되는 게 그 시절이다. 그 시기가 지나면 가질 수 없는 마음. 그래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어쨌든 그로부터 10년이 흐르니 그때 내 몸부림이 참 대견할 따름이다. 그때의 저돌적인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는 걸 보면 참 다행이다 싶다. 그래서 한 번쯤은 한심한 놈이 돼도 괜찮다 싶다.

자만하지 않아야 한다

‘대리 같은 이사와 이사 같은 대리’라는 말이 있다. 누가 더 바보 같냐는 질문에 쉽게 한 쪽을 선택할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난 부끄럽게도 ‘이사 같은 대리’로 살았다.

일을 좀 할 수 있게 된 뒤 자만하는 시기가 있다. 나는 그 시기에 마음껏 자만하며 큰 소리 치며 살았다. 당시 내가 다뤘던 모바일 기술은 출시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니어 선배가 없었고, 그나마 경력이 있는 개발자들은 다른 경험을 하고 새로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즉, 나보다 도메인과 기술 경력이 있는 사람이 필드에 적었다. 때문에 몇 년의 경력이 있는 내게 연차에 맞지 않는 기회가 생겼다.

덕분에 나는 큰소리를 치며 일했고 결과를 냈기에 뭐든 내 방식대로 했다. 그러다 보니 지루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 없는 자만이었지만 그 시절에만 할 수 있던 짓을 해봤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지금 그러고 있다면 정말 끔찍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나모리 가즈오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했다. 그저 무조건 열심히 하고 열정적으로 하면 모두에게 잘 인정 받아야 한다는 걸로 이해했나보다.

나는 자칫 악한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또 그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한 가지 자계 의식을 치른다. 교만과 자만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쳐들 때마다 그 즉시 반성하고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나모리 가즈오는 스스로를 경계하라고 했다. 지금 조직에 와서는 스스로를 꽤 자주 경계하고 있지만 이는 내가 스스로 깨달았다기 보다는 지난 경험 덕분에 학습한 것이다. 조직을 나와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또 다른 조직에 다시 새롭게 합류해보니 그때의 자만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행동을 복기한 시간도 쌓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는 편이다. 덕분에 그저 열정만 넘치던 시절보다는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웠다. 특히, 올해 한층 더 성장한 듯 하다.

기다림. 그리고 사이클

올 한해를 되돌아보며 키워드를 말하라면 ‘기다림’이라 하겠다. 깊이 고민하며 더 좋은 선택을 위해 노력했건만 예상치 못한 이유들로 내 그림이 무너지는 것을 지속해서 경험했다. 어느 시점에는 너무 지쳐 다 놓아버릴까도 생각했다. 아마 내가 조금만 덜 성숙했더라면 그 시점에 다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경험한 고통과 좌절은 마치 오셀로 게임에서 검은색 돌이 단번에 흰색으로 뒤집히듯이 나중에는 전부 성공의 토대가 되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괴롭고 어렵다고 생각한 일에 도전하고 적극적으로 맞선 것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불러왔다. 내가 맞닥뜨린 고난과 좌절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고, 최대의 행운인 셈이었다.

하지만 버텼다. 그때는 열정적으로 나아가는 것 보다 꿋꿋하게 버텨내는 것이 더 올바른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힘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막혔던 것이 뻥 뚫렸다. 어느새 내가 원했던 그림이 많이 그려졌고, 생각지 못한 일들도 한 번에 쏟아졌다. 되려 이렇게 풀려도 괜찮은 건가 싶은 지점도 있었다.

한순간, 한순간이 모여 우리의 인생이 된다. 지금 이 순간의 1초가 모여 하루가 되고, 그 하루가 거듭 쌓여 일주일, 한 달, 1년, 그리고 일생이 된다. 제아무리 위대한 일도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이 축적된 결과다.

사람들이 놀랄 만한 큰 성과나, 어떤 천재가 해낸 일인지 궁금해지는 위대한 업적도 알고 보면 아주 평범한 사람이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내디딘 결과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 그림을 그리기까지 내 노력도 어딘가에는 조금씩 묻어있다. 이는 앞서 내가 했던 자만과는 다르다. 내 노력 덕분이라고 하기엔 낯간지럽지만 내 노력도 담겨있다고 하는데는 이견이 없다.

결국 자만하지 않고 하루하루 지속하며 버텨낸 것이 현재를 만들었다. 이는 주니어 시절 뜨겁던 열정과는 또 다른 방향성이다. 우리네 인생에는 어떤 흐름이 있고 막혔던 시기엔 나아갈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 생각한다. 즉, 어떤 사이클 속에서 나아갈 시점이 돼 그동안 쌓은 에너지로 나아간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뒤 이제는 신께 빌며 천명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자신할 만큼, 당신은 당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냈는가? 몸이 부서질만큼 제품 하나하나에 영혼이 스며들게 했는가? 그렇게까지 강렬하게 염원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냈을 때, 비로소 신이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다네.”

그래서 이나모리 가즈오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되 신에게 맡기라 했나보다. 여기서 최선의 노력과 신에게 맡기는 것 중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건 없다. 모든 게 알맞게 필요한 법이다.

이렇게 나는 일에서 삶을 배워간다.

마무리

그동안 사회에서 후배들을 만나면 이 책을 선물하곤 했다. <왜 일하는가>는 물음을 던지는 책 같지만, 때론 ‘계속 그렇게 하면 돼’라는 위안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 후배에게 언제나 이 책이 위로가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이쁘게 포장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커리어 첫 팀원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팀원들도 이 책에서 열정과 위안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8년 만에 만난 이나모리 가즈오를 보며 8년 전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엔 열정을 그리고 이번엔 위안을 준 이나모리 가즈오가 이 다음엔 내게 어떤 걸 줄지. 그때도 내가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길 바란다.

한줄평

훗날 내가 경영자로서 은퇴한다면, 한국의 이나모리 가즈오 같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인상 깊은 문구

Exit mobile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