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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월급의 수용소에서.

아마 초등학생 또는 중학생 때였던 것 같다. 빅터 플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처음 읽었던 것은. <죽음의 수용서에서>는 독서토론대회 선정 도서였고, 난 학교 대표였다.

사실 역사적인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로 읽은 책이었고, 나는 어렸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만이 가득 찼다. 하지만 대회에 참가해야 했으므로 참고 읽었다. 끔찍한 장면들이 등장했고,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보자고 하더라도, 나는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진 못하고, 여전히 끔찍한 이야기는 불편하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에 주목하며 다시 책을 읽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 인원 중 90%는 죽는다. 가스실에 보내지고, 강제 노역을 해야 한다. 일할 능력이 없어보이는 사람은 가스실행이다. 거의 죽은 사람들이지만 매일 살아남기 위해서 애쓴다. 조금이라도 일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하고, 뺨을 때려 혈색을 돌게 한다. 인생의 전부라고 여긴 것들을 박탈 당하고도 살고자 아등바등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상실감을 느끼고 무너지기도 한다. 모두 각자의 선택이다.

환경보다 중요한 개인의 의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수용소의 끔찍한 상황에서라도 무언가 삶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고통을 벗어나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저자는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개발한 ‘로고테라피’이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 하나이다.

목적과 의미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삶. 그런 삶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긴장이 없이 그저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

그 말에 따르자면 나의 지금 일상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의 생태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목표보단 전년의 목표를 그대로 복사/붙여넣기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목표치를 정한다. 지금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달성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그리고 매일 사건이 터지지 않는다면 역시나 작년과 같은 일을 반복한다.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일까. 지금 회사를 얼른 벗어나지 않는다면 끝까지 지금 이대로 살아질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쉽사리 회사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수용소에서 그저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인가.

대신하여 혼자서 목표를 정하고 해낼 수 있는 내용은 없을지 고민한다. 회사가 그 목표 도달에 도움이 되는 범위에 있는가. 함께 고민하는 내용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월급 나오는 창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월급에 구속될 뿐. 월급의 수용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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