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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금 의심이 필요하다

언젠가부터 책을 읽으며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이 됐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도 했지만, 책을 만들어보기도 했고 저자로 출판도 해보니 저자든 출판사든 완벽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을 이해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책에서 꽤 불편한 지점이 많이 보인다.

이 책은 내게 무척 불편했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적어보려 한다.

지식의 저주에 빠진 지식인

지식의 저주(The Curse of knowledge)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반응을 예상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도 알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매몰되어 나타나는 인식의 왜곡(cognitive bias)을 의미한다.

– 네이버 지식백과

저자 앵거스 플레처는 미시간 대학교에서 신경과학 학사 학위를, 예일 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스탠퍼드 대학에서 셰익스피어를 가르친 엘리트 교수다. 그리고 도서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는 이 엘리트 교수가 25가지 문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은 시작부터 난해했다. ‘엔헤두안나(Enheduanna)’라는 문학을 창조한 사람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곤 힌두교 <베다> 경전, 그리스 <신통기> 등을 언급하더니 갑자기 문학이 마음을 치유하며 영혼을 고양시킨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치료 주술사는 물약과 연고가 떨어질 수 있다. 신들은 홀연히 사라지거나 냉담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문학은 여전히 마음을 치유하고 영혼을 고양시킬 수 있다.

책은 서문을 지나 서론에 들어가는데, 서문과 서론이 함께 존재하는 책은 또 처음이다. 책의 내용은 물론 구성 자체도 내게는 무척 난해했다.

다행히 서론은 다소 흥미로웠다.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소개하는데, 평소 생각지 못한 연구 결과였다. 최근 스트레스가 늘어나 해소가 필요했던 내게 트라우마 극복 방법은 꽤 재미난 내용이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수천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정신의학 연구에서 뜻밖의 사실이 두 가지 밝혀졌다.

첫째,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 치료에 효과가 있다. 일반적으론, 안전한 환경에서 트라우마 경험을 떠올리면, 기억의 ‘섬광’ 강도가 점차 약해진다.

둘째, 트라우마를 검토하는 동안 눈을 좌우로 움직이면 도움이 된다. 이런 기이한 사실은 캘리포니아의 심리학자인 프랜신 샤피로가 1980년대 말에 우연히 발견했다. 당시엔 너무 엉뚱하고 신기해서 사이비 과학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하지만 쥐를 대상으로 한 최근 연구에서, 눈을 좌우로 움직이면 두려움 감소와 관련된 회로인 상구-중앙 내측 시상핵이 활성화된다고 밝혀졌다. 이러한 안구 운동은 임상 시험에서 안구 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이라는 트라우마 치료법으로 그 효과가 입증되었으며, 미국 정신의학협회와 세계보건기구, 재향군인회 등에서 공식적으로 추천되고 있다.

정신의학을 가져온 것은 썩 흥미로웠으나 저자는 이를 문학에 연결한다. 이 시도가 문학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문학과 정신의학의 연결이 꽤 어색해보였다.

그리스 비극의 경우, 춤을 추는 공간이 굉장히 넓었다. 직격이 20미터 넘는 반원형의 야외극장 바닥이 그들의 무대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160제곱미터에 달하는 오케스트라는 이리저리 안무를 펼치는 장소였다.

따라서 <아가멤논>은 25세기 전 초연되던 당시, 관객에게 외상후 두려움에 대한 두 가지 치료법을 경험해볼 기회를 제공했다. 현대적 정신 치료법의 고대 문학 버전이었던 것이다. 자전적 검토와 마찬가지로, <아가멤논>도 물리적으로 안전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관객에게 외상 후 기억을 검토하도록 자극했다. 그리고 EMDR과 마찬가지로, 연극의 코러스는 역동적 공연으로 관객의 시선을 좌우로 움직이게 했다. 이 오랜 치료법의 효과를 측정하려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지만, 21세기 트라우마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그 치유 작용을 관찰할 수는 있다.

안무를 펼치는 과정에서 눈을 좌우로 움직여 두려움 감소와 관련된 회로인 상구-중앙 내측 시상핵을 활성화 했다는 것일까? 그런데 그 치료법 효과를 측정하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그럼 어떤 근거로 현대적 정신 치료법의 고대 문학 버전이라 하는 것일까?

여기까지도 무척 불편했는데 내가 지식의 저주라 부르는 건 아가멤논, 베다, 신통기 따위 때문이다. 난 아가멤논이 뭔지 모르겠다. 베다는 물론 신통기에 무슨 내용이 적힌지 모른다. 일리아드는 물론 오만과 편견도 중국인 ‘사포’도 모른다.

저자는 문학이 필요하다며 문학의 필요성을 소개하면서 그 필요성이 적힌 글을 읽는데 문학이 필요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자신의 글을 읽기 위해 문학이 필요하다는 말일까?

책 부제를 문학 작품에 숨겨진 25가지 발명품이라 써놓고 그게 발명품인 이유는 문학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게 서문과 서론을 썼다. 세계적인 작가들이 추천한 책이라 하는데,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지식의 저주다.

번역가와 출판사는 무얼 했나

이 책의 정가는 26,800원이다. 나는 이 책을 온라인 서점에서 24,120원에 구매했다. 책을 사며 금액을 보지 않는 편이다. 대체로 책은 2만 원 내외로 구매할 수 있으며 책을 만들고 써본 입장에서 2만 원 내외면 책이 출판되기까지 노력 대비 정말 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책 값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주석이 하나도 없다. World Population Review 2022에 따르면 전 세계 힌두교 신자는 11억 6천만 명으로 전 세계 3위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힌두교 신자가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힌두교 경전인 베다 내용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정도면 베다가 무엇인지에 관한 대략적인 주석이 들어가는 게 맞다. 이뿐만이 아니다 책에 수많은 문학을 소개하며 어떻게 주석이 하나도 없을 수 있나? 저자가 지식의 저주에 빠졌다면 번역가라도 저주에서 빠져 나와야 할 게 아닌가? 번역가가 나오지 못했다면, 출판사라도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책은 지금 의심이 필요하다

문학에 관해 소개하며 문학을 알아야 읽을 수 있다니, 이 무슨 딜레마인가 싶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트라우마 경험을 떠올리라고 하는데, 이 책에 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이 책을 다시 떠올려야만 하는 걸까.

예스24 리뷰에 ‘왜 이 책이 베스트셀러인지?’라는 글이 있다. 여기서 ‘일반인들이 이런 학술적 이론서를 왜 읽어야 하나?’라는 문장이 있는데, 공감한다. ‘억지로 만드는 베스트셀러’라는 문장도 있다. 공감한다.

다시 책 표지를 보니 <아웃라이어> 저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무 환상적이다. 이 책은 끝내주는 책이다!’ 세상에. 이게 리뷰인가? 이게 세계적인 작가의 리뷰인가? 뭐가 환상적이고, 뭐가 끝내주는 건가. 이렇게 부끄러운 문장을 책 표지에 넣다니 이 책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의심한다.

정말 이 책이 문학을 소개할 자격이 있는지, 이 책은 지금 의심이 필요하다.

인상 깊은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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