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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이상론자의 욕심

오랜만에 인문서다. 지난 1년 동안 비즈니스나 경제, 실용서 등을 주로 읽었는데 오랜만에 인문서를 펼치니 몸이 쑤셨다. 사실 책을 펴고 자리에 앉기까지도 일주일 넘게 걸렸다. 딱딱한 표지가 심리적 무게감을 더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이 책이 유쾌하지 않았다. 불편함을 주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적절히 달성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인체를 만들어가는 입장에서 가능하다면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그 이야기를 적어볼까 한다.

소유는 바람직하지 않은가.

저자는 당당히 이런 문구로 책을 시작한다.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다. 아마도 현대 “잉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소유형태일 것이다.

소유를 소비로 바꾸면 책 제목은 <소비냐 존재냐>가 된다. 이 책은 1976년에 쓰여졌다고 하니 거의 50년이 된 책이다. 지금 시기로 따지면 소비라는 단어가 더 빠르게 이해될 것 같다.

1장에서는 정확히 뭘 말하려는지 이해를 못했다만, 빠르게 읽고 나니 결국은 소비보다는 존재라는 맥락인 것 같다. 1장에서 나오는 많은 사례도 대부분 존재에 집중하고 있다. 단순히 소비보다 존재를 좇아야 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소유적 실존양식에 길든 학생들은 강의를 들을 때, 놓치지 않고 어휘들을 경청한 뒤 그 논리적 연관과 의미를 파악하여 가능한 한 모조리 노트에 기록한다. 그래서 필기한 것을 나중에 암기하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들 고유의 사고체계를 풍요롭고 폭넓게 하는 구성요소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소비가 무조건 나쁜 걸까? 저자는 경제에 관해 전혀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인으로 살았던 저자가 자본주의를 부정하다니. 자본주의를 다 누리고선 이런류 주장을 하는 게 공감이 되지 않는다.

학교란 학생들에게 인간정신이 쌓아온 최고의 업적들을 전달해주는 기관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이런 지식의 꾸러미들을 생산하는 공장에 불과한 것이다.

경제며, 교육이며, 종교며. 사회 전반에 관해 저자는 소비가 아닌 존재를 추구해야 한다 말한다. 아쉽지만 나는 이런 저자의 행동이 굉장히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자신은 무엇을 했는가. 사회와 싸우는 방식이 연구하고 이론을 발표한 것인가.

사회 여기저기에 불만을 토로하더니만 3장에서는 ‘새로운 사회’를 논한다. 인문서라더니, 철학서라더니. 이런 이념서인지 몰랐다.

누가 책임지는가

이런류 인물이 주장하는 바에 공감했던 때가 있다. 따라가면 뭐든지 해결될 것만 같은. 말 그대로 ‘새로운 사회’가 될 것 같은 기대감 말이다. 적어도 내가 성인이 되고 지난 10여년 간 정치 세계를 봤을 땐 기대감이 이뤄진 적은 없다.

모든 경제계획은 이제는 거의 허구가 되어버린 “자유시장 경제”를 포기하고, 고도의 분산화와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분산이라니. 듣자마자 블록체인이 떠오른다. 지난 2018년, 2019년 폭발했던 블록체인에 관한 관심은 차갑게 식었다. 그 사이 블록체인 업계가 선택한 방향성은 현실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블록체인 ETF가 출시되고 코인 거래소가 상장했다. 정부에서는 블록체인을 활용한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다. 완전한 탈중앙화는 결국 중앙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이게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본다. 결국 기술은 쓰여야 의미가 있다. 결국 인류에게 도움이 돼야 한다. 그저 이상으로 남는다면 망상과 다름없다. 적어도 나는 블록체인 업계가 현실에서 쓰일 수 있는 기술로 포지셔닝 하는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파국의 위험을 피하려면, 무제한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머리고 선택적 성장으로 대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뭔가. ‘자유시장 경제’를 포기하란다. 경제학자도 아닌 자가 경제 방향성을 논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해결책은 뭔가?

개개인에게 생존근거를 보장해주되, 관료주의 체제에 의존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개개인의 생존을 보장하되 관료주의여서는 안 된단다. 이게 뭔소린가? 큰 정부는 아니되 책임을 져달란다. 그걸 어떻게 하는가? 누가 하는가. 그러더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선동을 한다.

시민들이 소비자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효율적 방법의 하나는 전투적 소비자연맹을 조직하여 “불매동맹”을 무기로 사용하는 일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가령 미국의 자동차 고객 가운데 20퍼센트가 능률적인 대중교통 수단에 비해서 자가용은 비경제적인 데다가 환경 오염을 일으키고 심리적으로도 유해하다는 이유로 앞으로는 자동차 구입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소비자 스트라이크가 자동차 산업에 얼마나 위협이 될는지는 단지 경제전문가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자동차 산업에 기초한 국민경제가 심각하게 흔들리라는 사실만은 명약관하다. 물론 미국 경제가 심각한 난관에 빠지는 것을 원하는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위협적 조처가 일단 확실하게 실행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전체 생산체계의 변혁을 쟁취해낼 수 있는 강력한 지렛대를 소비자의 손에 쥐어줄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 불매운동의 커다란 이점은 그 어떤 정부의 개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국가적 법 절차의 경우처럼 선거권자의 과반수의 찬성 따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 등이다.

‘불매운동’을 하란다. 정부의 개입도 필요 없지만 전체 생산체계의 변혁을 쟁취할 수 있는 힘을 소비자의 손에 쥐어줘야 한단다. 정말 경제를 아무 것도 모르는, 나아가 위험한 발언이다.

그래서 소비자가 힘을 쥐면 어떻게 되는가? 소비자는 무조건 옳은가? 그때 가서 저자가 보기에 올바르지 않다면, 그땐 다시 생산자에게 힘을 주는가? 무슨 권리로 그럴 수 있을까? 가장 무서운 건 저자가 책임지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거다. 그래. 결국 망상이다.

결국 각자 도생

저자도 말하긴 했다. ‘생존’에 관한 중요성이다. 결국 인간은 살아있어야 뭔가 할 수 있다. 생존을 위해 아침마다 무거운 몸으로 출퇴근하는 사회인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존재를 좇기 싫어서 소비를 좇는가? 당연히 뭘해도 생존할 수 있다면 이들은 출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생존에 관한 해답은 없고, 그저 이 길이 옳으니 이 길로 가야 한단다.

결국 각자 도생이다. 이런 공허한 외침은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는다.

저자는 1장에서 책을 마무리 했어야 했다. 철저히 이론으로써 보다 깊었던 스스로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멈췄어야 한다. 그 생각을 현실화 하고 싶었던 욕망. 그래서 ‘새로운 사회’라는 억지를 적어내려갔던 욕심. 그것이야 말로 ‘소유’가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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