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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기차는 종잡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자동차보다 정확해서 기차를 좋아하고, 비행기보다는 느려 풍경을 즐길 수 있어 기차를 좋아한다. 무엇보다 기차의 그 애매함이 맘에 든다. 자동차처럼 내가 원하는 모든 곳을 데려다 주진 않지만 근처까지는 가주고, 비행기처럼 먼 곳을 한번에 움직여주지는 않지만 꾸준히 달려가준다는 점이 매력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은 내게 철학의 기차에는 아무나 올라타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아침 점심 저녁이 아닌 새벽 정오 황혼으로 나눈 책 구성하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몬베유, 간디, 세이 쇼나곤, 에픽테토스, 보부아르, 몽테뉴와 같이 이름도 들어본 적 없거나 이름만 들어 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을 꽉꽉 채우고 있다. 거기다가 매 장 앞을 차지하는 기차에 비유한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무슨 의도를 말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철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이왕이면 간결한 것 생각하지 않아도 체감할 수 있는 것들을 좋아하여 그런 것들을 바라면서 살아온 사람이기에 이렇게 이름도 모르는 철학자들의 생각이 나에게 와닿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호함의 끝판왕이자 질문의 질문의 꼬리르 잇는 철학과 정확히 사람들이 바라는 곳에 바라는 시각에 데려다 주는 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비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드는 책이었다.

그래도 뭐… 나름 구절 구절은 내가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기에 그를 중심으로 아래에서 이 책의 감상을 논하고자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한 말이라고 한다. 아우렐리우스라고 하면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 로마의 늙은 왕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가 이런 말을 남겼다는 것은 사실 매칭이 되지 않는다. 영화 속 그는 출연이 짧긴 했으나 자신의 삶을 중시한 나머지 그 다음 왕위를 제대로 넘겨주지 못해 러셀 크로우가 말그래도 개고생을 해가며 공화정을 세우게 됐던 것만 기억 나는데, 이렇게 나 자신의 삶을 후벼파는 팩트폭격을 해뒀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는 정도다.

요즘 내가 말그대로 원숭이 같은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어디서든 막내에 치이면서 어디서든 긴장하고 어디서든 조금은 모자란 듯 느껴지는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가 더 나아지고자 마음을 먹고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운동을 더 해보자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너무나 피곤한 나의 일상에 찌들어 내일로 미루는 일이 잦아지고 있는 요즘인데. 벌써 몇천년 전 로마의 늙은 왕이 나의 삶을 감시라도 한듯 너무 나의 폐부를 찌는 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참 질문이 많았다고 한다. 델포이 신전의 일화는 그가 왜 가장 현명한 아테네인인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가 아무런 것도 답을 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틀리든 맞든 질문에 답을 하고자 했던 정치인 시인 철학자들이 잘못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질문은 참 좋은 철학자의 도구이지만, 결국 철학의 목적이라는게 인간의 생각을 탐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하고자 한게 아니었을까?

소크라테스 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빗대여 우리에게 성공은 어떤 모습인가를 묻는 작가의 말은 조금 뒤에서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로 답을 맺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사람의 삶이란 되돌아 보았을 때 추억으로 남고, 추억 마저 기억하는 이가 없어지는 순간에는 그 사람의 취향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가끔 그런 것 많이 이야기 들었을 것이다. 옛날 위인이 즐겼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말이다. 예를 들면 세종대왕은 고기를 좋아하셨고 정조는 술을, 고종은 커피를, DJ는아이스크림 빵빠레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의 이야기를 할 때, 진실은 항상 큰 대립을 낳는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좋은 점을 평하기도 하고 나쁜 점을 평하기도 하며 싸우기 딱 좋은 주제가 죽은 누군가에 대하여 기억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취향은 그런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제사상을 차리면서 어른들이 좋아했던 무언가를 한번더 생각하게 되는 것 그거야 말로 정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자신을 말해주는 것은 취미고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소한 것에도 즐거워질 수 있는가야 말로 자신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것을 찾아 평생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수단이 곧 목적이었다, “불순한 수단은 불순한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뿌린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다.”

조상님들은 예전에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고 하였다. 사회가 이리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에는 어느정도 통용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는 확실히 알 것 같다.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뿌진대로 거두게 된다.

최근에 버닝썬에 관한 BBC 다큐가 나오면서 그에 관한 기사들을 다시 쭉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관련자들이 지금은 모두 사회에 복귀하여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니 아예 잡혀가지 않은 인사들도 많았다. 물론 대한국민 법률이 어떻고 사법부가 어떻고 하면서 불평을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저 사람들이 앞으로 얼마나 불행할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불교를 믿는 부모님 밑에 자라 불교 철학의 일부분은 이해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연기설인데, 요약하면 어떤 식으로는 사람은 연결되어 있고 잘못한게 있으면 잘못한만큼 고통받게 된다는 것이다. 버닝썬의 그분들도 현재는 매우 자유로이 풀려나서 잘 살고 있는 듯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들이 잘못한 것만큼의 고통이 언제가 찾아올 것인게 그걸 저사람들은 받아 들일 수 있을까가 걱정되었다. 물론 어떤 한분의 말처럼 뿅뿅 같은 사랑스러운 대한민국 법이 그들을 다시 처벌하진 않겠지만 그만큼 자신이나 자신의 가까운 사람들이 고통받게 된다면 어떻게 느낄지 궁금하긴 하였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뿌리기를 신중히 하고자 한다. 자신이 지나간 길이 자신을 말해주는 것이니 한발 한발 신중히 내딛고 후회하지 않을 말을 하고 행동을 하기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끝맺음

이상의 나의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가 바란 감상은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게 이 책을 끝까지 읽는 것도 힘들었고 이해도 전혀 하지 못했다. 다만 중간 중간 나에게 울림을 주는 말들을 모아 나 스스로 이해하고 말았다. 그게 철학 아닐까? 결국 철학자들도 자신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그걸로 알리는 삶을 살았던거 아닌가? 아무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이 책을 마무리한다. 참 어려웠고 끝까지 이해가 안가는 책이었다. 조금 생각이 정리된 후 다시 한번더 가볍게 읽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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