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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의식의 빛을

내가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을 때는 언제인가. 두 가지 이유를 인지한다.

첫번째는, 내가 삶을 더 온전히 살기 위해 의식적으로 잠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두번째는, 내가 침대 밖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즉 불안하거나 두려울 때.

의식적으로 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침대에 머무는 것은 좋은 선택이다. 내가 왜 이 행동을 하는지를 스스로 알고 하는 행동은 나에게 힘을 더 불어넣는다.

두번째는 다소 안타까운 행위인데, 나도 잠을 통해 나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치유가 받고 싶어 머무를 때가 있다.

나는 왜 불안한가.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현재에 머무르지 못하는가.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나약하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들이 나에게는 아직 너무 많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내가 왜 앞으로 나아가는지는 조금 뒤에 설명하도록 하고,

이 책은 내가 두려움을 이기도록 도와주었을까, 어떤 철학이 내 삶의 무기로 작용해주는가.

어떤 철학 하나가 내 모든 두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해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철학자들은 인생의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나만의 정답을 찾을 수 있게 그들은 나를 도와준다. 내가 지니고 있는, 삶의 무기들은 어두울 때 나를 비춰주는 빛이 된다.

예컨대, 마르쿠스는 내일 아침 침대에서 이렇게 말하며 나를 깨울 것이다.
“일어나라, 너에게는 침대 밖으로 나갈 사명이 있다. 너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일해야만 한다. 직장인으로서, 누군가의 동료로서, 누군가의 아들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일해야만 하냐는 물음에는 사랑으로 일하라는 음성을, 또 다른 철학자 칼릴 지브란으로부터 듣는다.
“일하고 있을 때 그대들은 대지의 가장 깊은 꿈의 한 조각을 채우는 것이다. 오직 그대들에게만 맡겨진 꿈을. 그대들은 삶은 암흑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리고 피로 속에서 그대들 또한 지친 자들의 말을 되풀이한다. 허나 내 말하노라. 강한 충동이 없을 때야말로 삶은 진실한 암흑이라고. 모든 충동이란 깨달음이 없을 땐 쓸모 없는 것, 모든 깨달음은 노동이 없다면 헛된 것. 그리고 모든 노동은 사랑이 없다면 공허한 것임을.
그러면 사랑으로 일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대들 심장에서 뽑아 낸 실로 옷을 짜는 것, 마치 그대들 사랑하는 이가 입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은 애정으로 집을 짓는 것, 마치 그대들 사랑하는 이가 살기라도 할 것처럼. 그것은 또 그대들이 형상짓는 모든 것에 그대들만의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 (칼릴 지브란 『 예언자』 중)

또한 최근 리서치 작업 중에 편리한 최신 기술을 찾고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나도 모르게 쉽게 생각하려는 나에게 쇼펜하우어의 메시지는 내가 기술을 경험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활용하도록 도와준다.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

이처럼 철학자들의 사상은 내가 편하지만 어두운 길로 들어서려 할 때마다 환하게 의식의 빛을 밝혀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렬하게 느낀 것은 모든 철학자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속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장 현명하게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 자기가 만들어가는 순간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나의 철학은 결국 나만이 완성할 수 있다.

나에게도 최근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철학이 하나 있다. 나는 약속론이라고 부르는데, 작은 하나의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퇴사하고 몇 주를 보내며 인지하게 된 것인데, 내가 세운 계획을 지키는 것이 타인이 부여한 계획을 지키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강제성이 부여된 회사에서는 누구보다 책임감 있는 구성원으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자신이 한 새해 다짐이나 스스로 이루고자 결심한 가치들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책임하고 작은 유혹에도 쉽사리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나 또한 그랬다. 퇴사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내가 계획한 생활을 이행하지 못하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왜 나와의 약속을 타인과의 약속보다 가볍게 여기는가.

결론은, 이는 무지에서 온 것이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무지.

나와의 약속은 어떤 의미인가? 나와의 약속은 나의 우주를 만들어가는 한 걸음이다.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을 천 명에게 물어보면 천 명 모두 제각각의 대답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우주는, 나의 세상은 내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나의 우주를 만드는 아주 작은 한 걸음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근원이 되는 행위이다.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과의 약속을 가벼이 여긴다. 그러나 그 작은 한걸음들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내 세상을 확장시키고, 내가 만든 나의 세상은 타인과의 교류의 근간이 된다.

타인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데, 나는 이를 두 세상의 만남을 통한 새로운 세상의 생성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의 우주를 만들어가는데, 그 우주가 서로 만날 때 또 다른 우주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타인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 역시 조화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창조행위인 것이다.

다른 세상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우주가 충분히 확장하고 있고, 충분히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매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기본으로, 타인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며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내가 원하는 목표를 세우고, 현재에 머무르며, 내가 하고자 한 일들, 내가 해야하는 일들을 해나가면 된다.

여전히 두려운가?

괜찮다, 그래도 된다. 그저 현재에 머무르며 나와의 약속을 지켜나가면, 삶은 그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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