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세이가 아닌 수필
에세이라는 말보다는 수필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고 더 와닿는데 어느 순간부터 수필이라는 말보다는 에세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개인적으로 에세이라고 하면 뭐가 세련된 무엇인가가 떠오르는 반면 수필이라고 하면 마음 가는대로 썻지만 그 안에 숨은 작가의 의도가 느껴지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에세이는 다소 가볍게 느껴져서 흥미가 생기지 않는 다면 금방 책을 덛게 되는 한편 수필은 그 이야기가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안에 담인 내용이 궁금하여서 끝까지 읽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내게 수필은 시작하기에는 부담이 큰 책이기 때문에 잘 시작하는 경우가 적었다. 이번 책도 사실 내가 먼저 골라서 읽기 시작할 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2025년의 끝에서 이 책을 만나게 해준 STEW에게 정말 감사함을 먼저 전한다.
이 책은 나만의 기준에서 수필이다. 가볍게 쓴 글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연결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를 여러 개 하면서 작가는 독자에게 자신이 가진 장애에만 빠지지 않고 타인의 장애를 이해하고 그들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작가 자신은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책을 보는 독자들에게 굳어있는 생각을 깨닫게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을 그 분량에 비해 매우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 안의 작가의 의도 또한 가볍다고 할 수 없으므로 나에게 이 책은 정말 오랜만에 읽은 좋은 수필이었다.
아픈 사람과 아픈 사람의 부모 이야기
작가는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10년 이내에 시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더욱이 작가의 엄마의 잘못은 더더욱 아님에도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작가의 엄마는 자녀의 장애를 자책하고 극복하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시도하여 본다. 작가는 누구를 원망하여할지도 모른채 담담히 받아들인다. 혼자서 장애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무도 찾지 않는 중학교 졸업식에 가지 않고 학교 옆에서 졸업식을 듣는다. 그런 자녀를 보고 엄마는 무심한척 하며, 다가올 장애에 무서워하는 자녀를 회피하며 자녀의 고등학교 졸업식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엄마는 혹여 자녀의 눈이 나을 수 있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약수를 찾아다니고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치료를 시도한다. 하지만 무당의 치료에 피를 흘리는 자녀를 보고는 기겁을 하며 치료를 멈추게 한다. 그렇게 엄마와 자녀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녀의 예정된 장애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결국 엄마는 자녀가 눈이 멀기 직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자녀는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엄마의 뒷정리를 다한 후에게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된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아이를 둔 엄마라는 존재도 결국에는 어떠한 성자라기 보다 한명의 짠한 인간이다. 자식임에도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피하고자 하는 약한 모습도 있지만 그 와중에 낮은 확률이라도 나을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며 끝까지 자녀가 회복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식이 아픈 것은 또 싫다. 그렇게 제멋대로의 한명의 인간이 엄마가 된 것이다. 자녀도 마찬가지다. 자녀는 다가올 장애가 두렵다.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렸고 다 큰 현재도 장애를 이유로 자신이 제한되는 것을 두려워 하며 해외여행을 가고 춤을 배운다. 그런 와중에 자신에게 다소 무심한 엄마에게 상처도 받고 장애를 가진 자를 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상처를 받는다. 많은 상처로 무너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자녀는 엄마가 죽은 와중에도 그 상처를 딛고 살아간다. 그리고 자녀는 엄마의 죽음과 함께 시력을 잃고, 시력을 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악착같이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엄마의 죽음에도 악착같이 살아가던 어느날 엄마의 죽음을 받아 들임과 동시에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인다.
이 책의 작가와 엄마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그 누구도 완전하거나 이상적인 존재는 없다. 다만 모두가 하루하루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 무게가 어떤 날은 가벼운 때도, 더욱 무거운 때도 있기에 회피하는 때도 그에 대들어 싸우는 때도 있지만 묵묵히 수행자와 같이 무게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작가도 엄마도 그러한 존재이고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담담한 모녀의 이야기가 더욱 와닿는 것 같다.
모두가 장애를 가지고 있으나 모두가 상대의 장애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2부 마지막 이야기에 수미씨가 나온다. 수미씨는 자원봉사자로 작가가 장을 보거나 주민센터 업무를 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수미씨는 좋은 의도에서 장애인들을 돕기위해 자원봉사를 하는 매우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수미씨 또한 착한 사람이지만 수미씨는 자신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볼 뿐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굳이 병명을 줄이자면 “공감능력 장애”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공감능력 장애를 지닌 수미씨는 작가에게 매우 살갑게 대하며 장도 함께 봐주고 주민센터 일도 함께 해주면서 작가나 봉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한다. 이것만 봐서는 수미씨는 정말 천사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수미씨의 이야기를 듣다가 장애를 가진 자녀에 최선을 다해 돌보지 않는 부모를 험담하는 것을 듣고 “수미씨는 장애인 자식 없어봤잖아요. 그래본 적 없으면서 희생하지 않는다고 헐뜯을 자격 있어요?”라고 한다. 이 작가의 말이 이 책에서 가장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봉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만족도 중요하겠지만 누구나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감사를 받는게 아니라 비난 받는다는 것은 사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봉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준에서 자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사람들의 위선을 저 말로 꼬집는 것이다. 어떠한 입장에서도 제3자 밖에 안되는 봉사자들이 아픈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은 생각하지 않은채, 자신의 기준에서만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섣부른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말이었다.
실제로 나도 저 수미씨 같은 것일 것이다. 내가 하는 일, 내가 배운 것들, 내가 겪은 경험에 맞추어 세상을 보고 있고 타인을 재단하고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타인을 주제넘게 평가하기도 할 것이다. 사실 아닌 사람이 있을까.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드러나는 장애가 아니더라도, 모두 자신이 보아온 대로만 세상을 재단하는 갇힌 사고라는 장애나 물질적으로만 생각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장애, 타인의 충고에도 귀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강요하는 장애, 자신의 정치적 견해만으로 모든 사건을 판단하고 그 안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외면하는 장애 등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작가는 장애가 있다는 것이 타인의 장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누군가는 시각장애인들의 해외여행을 가이드하며 그들을 이해해주고, 보이지 않는 자를 위해 더 많은 시간들 들여 춤을 가르치고 춤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 타인의 장애를 이해하고자 하고 있고 누구나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의 장애에 갇히지 말고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타인의 장애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야할 것이다. 나는 이 수필을 통해 이 부분을 다시 한번 느꼈다. 단순히 결말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 책은 직접 장애를 가진 작가가 털어 놓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통해 묵직하게 그 메시지를 전해준다. 그래서 이 서평을 읽고 그럴 수 있지 하고 생각하는 당신도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어떤 때는 같은 결론에 이르더라도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그 결론이 미치는 영향이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면 나와 같이 이 책을 읽고 위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면 당신의 인생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