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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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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게 된 동기 ]


이전에도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는 제목이지만, 읽지는 않았다. STEW 독서 모임을 시작하며 올해의 첫 지정 도서라 이제서야 책을 들었다.

 

[ 한줄평 ]


당연시해왔던 사회의 안전망이 오늘 밤 붕괴되면, 내일의 나는 누구일까.

 

[ 서평 ]


이 소설의 설정은 잔혹하기 짝이 없다.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실명이 된다. 일반적인 빛이 안 보여 어둠에 잠기는 실명도 안타깝지만, 그런 실명과 다르게 흰색 빛밖에 안 보인다고 하는데, 마치 수술대에 누워 있는 상태를 연상시키는 듯 하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 이른바 ‘백색 질병’은 단 한 명의 인물인 의사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피해갈 수 없는 기상천외한 전염률을 자랑한다. 그 때문에 아무도 눈 먼 사람에게 도움의 손을 건낼 수가 없으며, 아무도 이 질병을 연구할 수조차 없다. 이 혼란 속에서 사회는 붕괴한다.

사실 우리를 포함해서 책을 살 형편이 되는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시한다. 오늘 밤 잠을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눈이 머는 둥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세상이 실제로 그렇게 안전하지만은 않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을 타던 중 엔진 폭발로 비행기 창문이 깨져 사망한 승객은 이를 예상하고 비행기를 탈 때부터 초조했을까? 타이타닉호 탑승객들도, 세월호의 학생들도 그들의 세상이 갑자기 뒤집힐 것이라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화여대 교정 안에서도 트럭이 학생을 들이받은 사고가 일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절대적인 안전지대란 있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휴리스틱에 의존해 세상을 간단히 보는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위험에 대해 둔감해, 극심한 빈곤 상태가 아닌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은 내일에 대해 안일하다.

이러한 우리에게 작가 사라마구는 포비아(공포증) 노출치료인 홍수처럼 돌직구를 날린다. 재미 있는 우연이지만 (어쩌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지만) 세계2차대전의 시작을 알린 폴란드 전투는 독일어로 “백색 상황”으로 불렸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찾아 온 소설 속 비현실적인 백색 질병에 대처하고 대처하지 못 하는 사람들은 정말 현실적이기에 책을 읽는 내내 소설 속 사회와 우리 사회는 겹쳐 보인다. 등장 인물들은 내 친구나 이웃일 수도, 심지어 나일수도 있을 것 같다.  이 과정 내내 저자는 사회가 지속되는 데에 치안 관리와 같은 동력과 사회의 안정성에 대한 구성원들의 믿음이 얼마나 핵심적인지, 그리고 사회가 붕괴하는 과정을 묘사하며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사회는 사실 얼마나 복잡한 이해관계 위에 어렵사리 형성이 된 것인지를 일깨워준다.

이는 결국 사회 속 개개인의 의미에 대해서도 의심 아닌 의심을 하게 만든다. 누군가 갑자기 내 방 문을 부수고 들이닥쳐 약탈해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는 지금 이렇게 서평을 쓰고 있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내가 보람을 느끼며 하는 많은 활동들은 사실 상 위태롭지 않은 사회가 있기에 그 의미가 있으며 애초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사회가 없는 세상 속 개인은 무엇일까.

 

[ 인상 깊은 문구 ]


  •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 사실 우리가 이기주의라고 부르는 그 제 이의 살갗 없이 태어난 인간은 없으며, 제 이의 살갗은 너무 쉽게 피를 흘리는 원래의 살갗보다도 훨씬 오래 지속되기 마련이다.
  • 언제 살인이 필요할까, 그녀는 생각하면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이미 죽은 것이 될 때.
  • 그들이 처음 요구했을 때 당연히 저항했어야 한느 건데, 그걸 못한 거야. 물론이에요, 우리는 두려웠고, 두려움이 늘 지혜로운 조언자 노릇을 하는 건 아니죠.
  • 다행히도, 인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악에서도 선이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선에서도 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들을 잘 하지 않는다.
  • 복수도 정의롭기만 하면 인간적인 거예요, 부정한 방법으로 피해를 준 사람에 대해 피해자가 아무런 권리도 가질 수 없다면 정의도 있을 수 없어요. 그럼 인간이고 뭐고 없는 거지
  •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계속 살 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이란 필요하다고 해서 꼭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유일한 답은 답을 기다려보는 것일 경우가 많다.
  • 그러나 램프든, 개든, 사람이든, 누구도 또 어떤 것도 처음에는 왜 이 세상에 나왔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운생이에요.

[ 읽게 된 동기 ]

2019년 STEW 독서소모임 첫 선정 도서

(사실 제목을 보면 내용이 뻔할 것 같아서 혼자서는 안 읽었을 것 같다.

 

[ 한줄평 ]

시작은 뻔해보였지만 끝은 소름 돋았던 책.

 

[ 서평 ]

처음 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을 때 너무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눈이 안보이게 되고, 전염병이 퍼진다는 설정이 개연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소재 자체는 신선해서 초반에 기대를 했지만 용두사미로 끝났던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그럼에도 세밀한 묘사와 심리에 대한 설명이 왜 이 책이 ‘환상적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품인지 알게 해주었다.

1995년에는 놀라운 작품이었겠지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컨텐츠 (소설이든 드라마 또는 영화)가 넘쳐나는 요즘, 그 내용 자체는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책을 점점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고,  다 읽고 나서는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소설을 읽으며, 읽고 나서는 환경에, 배경에, 인물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하며 다양하게 생각해보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았다. 특히나 등장 인물을 의사, 의사아내, 검은 선글라스와 같이 부르기에 다르게 읽어보았다. 요즘은 특별할 것 없는 뻔한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왜 이렇게 소름끼쳤던 것일까.

환상적 리얼리즘이다고 보니 이 책의 설정과 설정에 따른 사람들의 변화를 관찰하고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 책의 중요한 설정이자 은유는 인간이 평소에 당연하게 여겼지만 중요한 능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예측할 수도 없이 갑자기 왔다는 점이다. 이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성을 잃고 타락하고 말지만 그럼에도 특정한 인물은 그 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인간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설정과 사람들의 변화들이 단순한 소설이 아닌 설득력있게 심지어는 소름끼치게 다가왔다. 지금의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이 쌓아온 것들이 모래성과 같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여겨졌다. 인간의 문명은 이렇게 크게 발전했고  좀 더 신에 가까워지기 위해 그 능력을 넓혀가고 있지만 언제든 싶게 잃을 수 있는 능력들이다. 즉, 소설에서의 상황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 자동차, 비행기를 바탕으로 멀리가고 컴퓨터의 메모리를 이용하여 많은 내용을 저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더 작은 것을 더 멀리있는 것을 보고 기록하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이러한 능력들이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당장 스마트폰이 없어져도, 아니 당장 인터넷만 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당황하고 불편해하지 않는가. 그렇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지만 이러한 기술과 능력들은 우리의  일부가 아니기에, 더욱이 그 자체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에, 언제든지 사라진 수 있다. 언제든지 누군가 또는 어떤 상황이 상황이 걷어갈 수있다. 소설과 같은 상황은 언제든지 갑작스럽게 올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소름끼쳤던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런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서로 다른 모습들 모두가 설득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폭력적으로 자원을 획득하고, 독점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모습들 뿐만 아니라 누구 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 있어 다란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 틈에서 희생하며 헌신하는 모습 또한 설득력이 있었고 그래서 소름 돋았다.  바로  인간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고민해보아야 하는 지점이 나온다.

둘 다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 인간의 양면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어느 때보다 빠르게, 혼란스럽게 발전하는 이때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망하고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의 또 다른 역할을 알게 되었다.

 

[ 인상 깊은 문구 ]

  • 자신이 아는 것을 알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며, 나아가서 그것을 표현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 처음으로 자신이 현미경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멸스럽고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 사람들이 무엇에든 익숙해진다는 것, 특히 사람이기를 포기했을 경우에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녀 역시 눈이 멀어야 했다.
  •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 읽게 된 동기 ]


따뜻한 커뮤니티 STEW, 2019년도 첫번째 지정도서

 

[ 한줄평 ]


다 잃는다면, 나는 뭐부터 얻으려 할까?

 

 

[ 서평 ]


소설책을 평소 안 읽는 편이다.

STEW에서는 지난 12월에 처음 소설책을 지정도서로 읽었는데, 2월에 연달아 소설책이다.

덕분에 소설책을 읽는다.

 

제목 그대로 주인공들이 눈을 먼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나약한 존재다. 그저 눈만 멀어도 아무짝에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게다가 눈은 굉장히 약한 신체 기관이다. 이토록 중요한 신체 기관이 사라졌을 때, 그러니까 내게 정말 중요한 것이지만 사실은 너무도 쉽게 잃어버릴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래서 원하는게 뭐야>

최근 겪는 고민과 소설 내용을 함께 읽었다.

사회 생활 8년 차. 이제는 한 분야 전문가가 되거나, 다방면에 축적한 지식이 많아져야 할 시기다. 헌데, 생각보다 지나온 7년이 그다지 대단해보이지 않는다.

 

우선,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느샌가 방향성을 잃었고, 어딘가로 가고는 있지만 마지못해 가는 것이다. 헌데 가고 싶은 곳도 잘 모르겠다. 그토록 걸어왔는데, 어떤 길이 좋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눈이 먼다면 이런 기분일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눈이 먼 것과 다름 없다.

 

어쩌면 소설 속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의사 아내에게 기대하는 눈먼 자들과 다름 없을지도 모른다.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그녀에게 음식과 위생을 바란다. 길잡이는 당연히 그녀 몫이다.

과연 그녀에게 그 많은 것을 맡기는 이유는 그녀가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일까?

 

아등바등하며, 움직여 봤자 눈이 보이는 의사 아내가 볼 땐 의미 없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의미’라는 것은 누가 정하는가?

음식을 얻지 못하는 행동은 의미가 없는 걸까?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 행동은 의미가 없는 걸까?

 

볼 수 있는 의사 아내가 의미 없다고 느끼는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걸까?

 

<잃는다는 것>

어느새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지게 됐다.

 

학창시절 갖고 싶었던 맥북을 가졌다. 아이패드도 가졌고, 얼마 전엔 애플워치도 샀다.

어렸을때 로망이었던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도 샀다.

 

좋은 코트도 샀고, 가방도 샀다.

가끔 차를 빌려 타기도 하고, 피곤하면 택시를 타기도 한다.

 

도전을 하고 싶어 창업을 해보기도 했고,

새로운 환경이 궁금해 커리어도 바꿔봤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얻은 걸까?

잃은 걸까?

 

하나 둘, 내 주머니에 들어왔기에 얻은 것일까?

내 호기심과 버킷리스트, 만족감, 기대감 등이 사라졌기에 잃은 것일까?

얻는 삶은 행복이고, 잃는 삶은 불행일까?

 

얻으면서 잃고, 잃으면서 얻었다면

그건 잃은 걸까? 얻은 걸까?

 

<살아야 하나>

소설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굴까?

 

눈이 보이는 의사 아내일까? 눈이 보이는 아내를 가진 의사일까?

새로운 보호자와 함께한 사팔뜨기 소년일까? 젊은 미녀를 얻은 노인일까?

눈이 보이기 시작해 집을 되찾을 흥분감에 젖은 첫 번째로 눈먼 남자일까?

수십 명과 쾌락을 즐긴 깡패 두목일까?

어쩌면, 가장 먼저 죽어버린 자동차 도둑일까?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하루하루 배달되는 음식에 연명하며, 할 수 있는게 없어 그저 먹고 자며,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계속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라면, 기적을 만들어야 할 이유는 뭘까?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뭘까?

 

<무엇을 상상하든>

소설 속 주인공들이 만나는 현실은 너무도 처참했다.

특히, 깡패 두목이 여자를 노예로 만드는 과정을 지하철에서 읽고 있었는데,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주변에서 내가 읽는 부분을 보진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책을 덮어버렸다.

어느새 감정을 이입한 나 역시 그들처럼 삶을 위해 이동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내가 왜 살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겠다.

 

많은 것을 갖게 됐지만, 갖기 전에는 행복하지 않았냐 묻는다면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어떠냐는 질문을 해도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눈이 보여도 보이지 않아도 행복하지 않다면 눈은 행복의 기준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가진 전부 중 행복의 기준따위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행복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도 중요치 않다.

어쩌면 살면서 기적을 만드는 것도 의미 없을지 모른다.

 

나는 동이 틀 때까지 여기 있겠소. 동이 트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해가 알려주겠지, 해의 온기가. 날이 흐리면 어쩌려고. 어차피 이제 불과 몇 시간 안 남았소, 곧 낮이 될거요. 많은 사람들이 지쳐서 땅에 주저앉았다.

 

나를 지키는 것도 중요치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누굴까?

 

끝나지 않는 재귀함수 속에서

기적이 아닌, 기적을 기다리며

 

눈을 뜨기 위해,

눈을 감아본다.

 

 

[ 인상 깊은 문구 ]


  • 최신 소식을 하나 알려드릴까, 아까 말했던 대령이 눈을 멀었소. 지금은 아까 그 기발한 발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려. 별로 궁금할 것도 없소, 이미 자기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으니까. 그 사람, 태도 하나는 일관성이 있군.
  • 두려움은 실명의 원이이 될 수 있어요.
  • 그가 총을 쏠 때마다 총알이 거꾸로 튀고 있는 셈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총을 쏠 때마다 조금씩 권위를 잃어갔다.
  • 나는 동이 틀 때까지 여기 있겠소. 동이 트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해가 알려주겠지, 해의 온기가. 날이 흐리면 어쩌려고. 어차피 이제 불과 몇 시간 안 남았소, 곧 낮이 될거요. 많은 사람들이 지쳐서 땅에 주저앉았다.
  • 사람들이 무엇에든 익숙해진다는 것, 특히 사람이기를 포기했을 경우에는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녀 역시 눈이 멀어야 했다.
  • 아마 인류는 눈 없이도 살아가게 되겠죠. 하지만 그것은 이제 인류라고 부를 수 없을 거에요, 그 결과는 분명해요.
  •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 사라마구의 작품에는 담론간의 일치나 담론의 내적 긴장이 중시되고 있으며, 문장 부호를 생략하며 직, 간접 화법조차 구분하지 않는 그의 작품은 독자들을 몹시 긴장시키며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읽게 된 동기 >

2019년 STEW 독서모임 첫 번째 지정도서. 몇년 전 영화화 되기도 했고,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읽어봐야지 하고 예전에 구매해 놓았다가, 이번 기회에 처음 읽게 되었다.

 

< 한줄평 및 별점 >

★★★★☆ (4점 / 5점)

본능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는 인간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고발.
나라면 과연 어떻게 하였을 지 끊임 없이 성찰하며 읽었고, 우리 ‘눈’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 서평 >

<눈먼 자들의 도시>. 몇년 전에 영화화 되면서 국내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고,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읽어봐야지’라는 생각에 진작 전자책을 구매해 놓았다가, 이번 STEW 독서모임 지정도서로 선정되어 드디어 읽게 되었다. 작년 상반기 ‘해리포터’ 이후 간만에 보는 소설이라 그런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제목 그대로 한 남자가 운전을 하며 신호를 대기하던 중 갑자기 눈이 멀게 되면서 시작한다. 이후 모든 세상이 하얗게 보이는 이 ‘백색 질병’은 전염병이 되어 천천히 온 도시를 집어삼키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인간성 상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되돌아 볼 수 있었으며, 소설을 읽으며 만약 나라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지 스스로 끊임 없이 되물으며 읽었다. 또한 눈이 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용이 이렇다 보니, 소설을 읽는 내내 참으로 불편하고 씁쓸했다. 우리 몸에서 단 한 부분, ‘눈’이 보이지 않을 뿐인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저자는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특히나 씁쓸했던 것은, 과연 나라고 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 아니 모든 생명체들의 가장 근본적이고 강력한 욕구는 ‘생존’이다. 이러한 생존 욕구는 다른 모든 욕구보다 우선하며, 이는 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분명 달랐을거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어느 누구도 쉽사리 욕을 할 수가 없었다.

소설 곳곳에서는 인간성이 상실된, 여러가지 인물들이 등장한다. 눈이 먼 남자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차를 훔쳐 달아난 남자, 전염을 막기 위해 시설도 갖추어지지 않은 폐 정신병원에 격리 조치부터 하고 보는 정치인들과 무차별 살상을 저지르는 군인들, 병동 내에서 폭력을 앞세워 약탈을 일삼고 인권을 유린하는 무리들, 일부 사람들이 마트를 점거하고 먹을거리를 독차지하자 거기에 불을 지르는 이기적인 사람들, 먹을거리가 발견되자 지하실로 몰려가다가 집단으로 떼죽음을 당한 사람들 등등. 소설을 읽으면서 당연히 머리로는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입으로는 욕을 했지만, 만약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안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이러한 인간성 상실 외에도, ‘눈’을 잃자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는 모든 시스템이 붕괴한다. 소설의 뒷부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의사의 아내는 집 안의 수도꼭지에서 그 귀중한 액체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문명의 결점이다. 우리는 집 안에 들어오는 수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급수 밸브를 열고 잠그는 사람들, 전기가 필요한 급수탑과 펌프, 부족분을 확인하고 여유분을 관리할 컴퓨터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곤 한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을 하는 데는 사람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지 ‘눈’이 보이지 않을 뿐인데 수 천년에 걸쳐 우리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명 시스템이 유명무실해진다. 실명은 우리가 평소에 정말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 가령, 집에 도착해서 불을 켜고 손을 씻는 행위 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 몸에서 눈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장면이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결국 이 소설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이에 대한 해답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의사와 그의 아내는 이런 말을 주고 받는다.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 바로 이 말이 저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사실 소설에서 나오는 여러 비인륜적인 장면들은 다소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오늘날에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씁쓸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 바로 이때문인 것 같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약자들을 대상으로 한 비 인륜적인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성 범죄는 연일 언론에 보도되고 있으며, 보험금을 타기 위해 가족을 죽이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 역시 종종 보도된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범죄를 외면한다. ‘내 일이 아니니까’, ‘먹고 살기 바쁘니까’ 등등 변명거리는 많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린 눈먼 도시에서는 이러한 범죄가 일상이 되고, 그 범죄가 나한테까지 미치자 사람들은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저자가 비판하고 싶었던 부분이 아니었을까?

또 우리는 눈이 보이기 때문에 얻는 수많은 이점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할 수가 없다는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수도와 전기가 있었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높은 건물에 올라갔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눈’이 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의사 아내의 말처럼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에서는 희망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눈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최소한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눈먼 도시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이다. 본인 눈은 멀쩡한데도 남편을 따라 정신병동으로 들어와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끊임없이 희생을 한다. 특히 인상깊었던 부분은 바로 폭력배 두목을 가위로 찌른 장면이었다. 본인은 폭력배들에게 끌려가 인권을 유린 당해도, 같은 병동 사람들의 식량을 얻기위해 꾹 참았지만, 같은 범죄가 다른 여성들에게 자행되는 모습을 보자 결국 외면하지 못하고 폭력배 두목을 살해한다. 이외에도 늙은 노파와 따라다니는 개를 위해 소중한 식량을 나누어주고, 남편보다 어린 아이를 먼저 챙기는 등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의사의 아내는 인간성을 잃지 않는다. 같은 병동의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소설 내내 병동 사람들은 서로를 위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주인공들이 비가 오자 빗물에 샤워를 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바로 이 장면이 동물과는 다른, 인간성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늙은 남자는 아무도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혼자 씻고 싶어한다.

이처럼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저자는 ‘인간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모든 도시 사람들이 눈이 먼다는 다소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여 다양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모든 사회 시스템이 붕괴하고 폭력과 살인, 무질서가 난무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의사의 아내로 대표되는 병동 사람들은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평소 눈이 보이는 것에 감사하고 그 동안 외면했던 다양한 현실을 직시하고 행동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 인상 깊은 문구 >

“자신의 잘못을 얼버무리려 하는 사람은 결국, 가혹하게도,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의 두 배를 받게 된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먼저 그 결과를 생각해 본다면, 곧 즉각적인 결과, 확률이 높은 결과, 가능한 결과, 상상할 수 있는 결과를 차례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 머리에 처음 떠오른 생각에 가로막혀 절대 어떤 한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리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이 시간에 이 낡고 황폐한 건물 어딘가의 은신처에서는 도둑들이 예기치 않게 두 배, 세 배로 늘어난 식량으로 차갑긴 하지만 우유를 섞은 커피와 비스킷과 마가린을 바른 빵으로 배를 불리고 있을 텐데, 예의를 존중하려던 사람들은 그 이 분의 일이나, 삼분의 일, 심지어 그것조차도 안 되는 양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반면 저 바깥 도시에 있는 눈먼 사람은 얼마나 괴로울까. 그래, 정말 괴로울 것이다. 길을 가다 걸려 넘어지기 일쑤이고, 모두들 그를 보기만 하면 달아날 것이고, 그의 가족은 공황에 빠져, 그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워할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자식의 사랑, 그런 것은 이미 전설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문제는 조직이다. 첫 번째가 먹을 것이요, 그 다음이 조직이다. 둘 다 사는 데는 불가결한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이 있소, 모든 병실을 개방하는 거요. 그렇게 되면 보균자들이 맹인들과 직접 접촉하게 되는데. 어차피 보균자들은 조만간 눈이 멀 가능성이 아주 높소, 게다가, 상황이 이 지경이라면, 우리 모두가 감염될 판이오.”

“최신 소식을 하나 알려드릴까, 아까 말했던 대령이 눈이 멀었소. 지금은 아까 그 기발한 발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려. 별로 궁금할 것도 없소, 이미 자기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했으니까. 그 사람, 태도 하나는 일관성이 있군. 군은 늘 모범을 보일 준비가 되어 있소.”

“아, 잊기 전에 하나 이야기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사격이 공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승합차 운전사 하나가 눈먼 재소자들과 함께 들어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기 눈은 아주 잘 보인다고 항변했다. 그 결과, 삼초 뒤, 죽으면 눈도 먼다는 보건부의 이야기가 증명이 되고 말았다.”

“오후 네 시였다. 그러나 사실 기계는 그런 데 관심이 없다. 시계는 일에서 십이까지 움직일 뿐이고, 나머지는 그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일 뿐이다.”

“사람들은 단순한 버스 사고에 대해서 걱정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사실 그 사고는 버스의 브레이크가 고장나 일어난 사고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에는 바로 그런 브레이크 고장으로 인해 다른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거꾸로 사고 버스의 운전사가 눈이 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런 식으로 진실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짓으로 위장을 하기도 하는 법이다.”

“그곳에 있으면 악당들의 불의의 행동으로 그의 정직한 마음에 적개심이 불타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굶지는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이성과 비이성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것 아닌가.”

“동시에 이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내려진 금번 격리 조치가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공동체의 나머지 구성원들과의 연대에 기초한 것임을 명심하고, 정직한 시민들로서 책임을 다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기억이란 어떤 장소의 이미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것뿐이지, 우리가 그 장소에 이르는 길을 생각나게 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사의 아내는 집 안의 수도꼭지에서 그 귀중한 액체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문명의 결점이다. 우리는 집 안에 들어오는 수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급수 밸브를 열고 잠그는 사람들, 전기가 필요한 급수탑과 펌프, 부족분을 확인하고 여유분을 관리할 컴퓨터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곤 한다. 그리고 이런 모든 일을 하는 데는 사람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눈에 그런 표정이 드러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상례인데, 사실 이런 표현은 근거가 없다. 눈에는, 엄격히 말해서 눈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눈알을 뽑아냈을 때도, 그것은 그저 아무런 활력이 없는 두 개의 둥그런 물체에 불과하다. 여러 가지 시각적 웅변과 수사를 전달하는 것은 눈꺼풀, 속눈썹, 눈썹이다. 사람들은 보통 눈이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요,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모르고, 다른 무엇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가씨는 우리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게 그 얘기야.”

“우리는 기생충처럼 사모님 피를 빨게 될 거예요. 우리가 볼 수 있을 때도 그런 사람들은 많았어.”

“그러나 우리가 심한 고난을 당해 통증과 괴로움에 시달릴 때, 그때는 우리의 본성이 지닌 동물적 측면이 가장 분명하게 부각된다.”

“아래층의 노파는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기가 그런 감상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거리에서는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떠났다. 거의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이곳을 떠나버렸다. 노파는 기뻐해야 마땅했다. 이제 닭과 토끼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지 않아도 되니까. 그녀는 기뻐해야 마땅한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그녀의 멀어버린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계속 살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이란 필요하다고 해서 꼭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유일한 답은 답을 기다려보는 것일 경우가 많다.”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예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말이란 것이 그렇다.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두 마디나 세 마디나 네 마디 말, 그 자체로는 단순한 말,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흥분한다. 그 말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살갗을 뚫고, 눈을 뚫고 겉으로 튀어나와 우리 감정의 평정을 흩트려 놓는 것을 보며 흥분한다. 때로는 신경마저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돌파당하고 만다. 사실 신경은 많은 것을 견딘다. 모든 것을 견딘다. 갑옷을 입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의사의 아내의 신경은 강철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이런 단순한 문법적 범주들 때문에, 단순한 부호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다른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거지.”

“만일 그 눈마저 언젠가 소멸해 버린다면,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럼 우리와 인류를 연결시켜 주는 끈이 끊어지고 말겠죠, 그렇게 되면 마치 허공에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 거예요, 영원히, 모두 눈이 먼 채로.”

“어쨌든 달라지지 않는 것은 꼭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래 대를 이으며 계속되어 온 일이다.”

“불행이 모두에게 닥쳐도, 늘 남들보다 더 심하게 그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읽게 된 동기]

20대 초반에 읽어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렴풋한 이미지만 남아있을 뿐 어떤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워낙 인기있는 소설이기도 해서 책을 빌리자마자 냉큼 다 읽어버렸다. 눈이 멀어버리는 내용이라 소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줄 평]

인간의 파괴적인 본능과 이기심을 적나라게 드러내 불편했지만 반성하게 만들었다.

 

[서평]

눈에 상이 맺힌다고 해서  본다고 할 수 있을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보이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인간이 눈이라는 기관으로 보는 것은 뇌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뇌가 순간 잘못된 판단을 하면 우리는 같은걸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즉 착각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 나는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지구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하는 경고 메시지

나는 평소에 환경을 파괴하는 일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일회용품을 마구 사용하고 버리고,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삶에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대량 만들어지고 폐기되는 상황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공간을 눈요기하러 보러 가면서도 이를 위해 깎이고 버려진 자연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렇다고 정작 내가 환경 보전을 위해 큰 일을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조금이라도 덜 훼손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개인적인 차원에서 조금 노력을 할 뿐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며 초기에 눈이 멀었던 사람들이 수용된 정신병원 시설이 수용자들의 배설물,  시체, 먹고 남은 그릇과 음식물 등으로 오염되가는 모습이 인간이 먹이사슬의 가장 상위에 오르면서 지구를 파괴하는 모습을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농업의 발달로 인구가 급격하게 늘면서 지구의 파괴 속도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자연을 파괴하고 편리하고 관리하기 쉽도록 만든 도시는 인간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지만 지구의 입장에서는 이로울게 하나도 없다. 지구가 생겨나면서 이뤄좋은 생태계가 파괴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구의 훼손과 오염을 보지 않고 외면한 채 멋지게 구조화된 도시를 동경하며 인류가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는건 우리가 눈이 먼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눈이 멀어버렸다

소설 속의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처럼 우리는 정작 봐야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엉뚱한 곳만 더듬거리고 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본능에 충실해 허기진 뱃속을 채우고, 성적 욕망을 채우고, 불편한 뱃속을 비운다. 우리는 본능적인 모습을 잘 차려진 음식으로 둔갑시키고, 남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는 개인적이거나 숨겨진 공간에서 욕구를 충족시키고, 배설물을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고 즉시 잊어버린다. 그리곤 우아하고 품위있게 행동한다. 더럽고 추악한 일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짓밟고 착취를 하지만 이를 정당화 시키려는 구실을 찾았다.

마지막 남아있던 양심마저 눈이 멀어버렸다

내가 환경 오염을 불러 일으키는 행동을 하면서 마음이 불편한 것은 양심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안과 의사의 아내는 우리의 마음 속 양심과 같다. 인간의 본능에 의한 행동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길라잡이가 되어주듯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양심은 봐야할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괴로워하면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소설 마지막에 눈이 멀었던 사람들이 다시 볼 수 있게 되고 의사의 아내는 이내 눈이 멀어버린다. 양심이 눈이 멀어버린다면 과연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는 어떻게 될까.

나는 과연 제대로 보고있을까

반성의 시간을 가져본다.  환경 말고 또 내가 보고싶지 않아서 외면하고 있는게 또 뭐가 있을까.

 

[인상 깊은 문구]

나도 데려가야 할 거에요. 방금 나도 눈이 멀었거든요.

어쩌면 눈이 먼 사람들의 세상에서만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우리가 심한 고난을 당해 통증과 괴로움에 시달릴 때, 그때는 우리의 본성이 지닌 동물적 측면이 가장 분명하게 부각된다.

이제는 선과 악에 관한 한 우리 모두 평등해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냐고 묻지 말아주세요.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하야 해요.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에요.

나는 보고 싶어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마음만 가지고 눈을 뜰 수는 없습니다. 유일한 차이는 아가씨가 이제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이 아리는 거지요.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건가. 볼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몬 사람들이라는 거죠.

[읽게 된 동기]

본래 영화화도 되고 작가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두꺼운 소설책은 기피하는 성향이 있어 읽은 적은 없었다. 이번에 Stew 지정도서로 선정되어 읽게 되었다.

[한줄 평]

희망은 빛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꼭 빛이 빛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평]

흔히 실명은 검은색에 비유된다. 하지만 눈 먼자들의 도시에서 모두가 겪게되는 실명은 백색의 실명이다. 너무 밝아 혹은 너무 하얘서 볼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결코 고귀하거나 품격있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길거리를 전전하며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개나 고양이와 다를바 없다.

  • 신뢰의 붕괴

사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은 서로를 신뢰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처음 눈이 먼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호의에 신뢰를 하는 것처럼 서로를 신뢰하며 구축한 사회라는 거대한 개인의 집단 속에서 개인은 서로를 신뢰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일순간 무너진다. 사회라는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지켜주는 제도 혹은 법에 의해 살아갔지만 어느 날 발생한 백색 실명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격리로 시작해 결국 사회의 붕괴로 이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여 식량을 훔치고 공정한 분배를 의심하며 결국 좀더 힘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학대하려는 모습은 눈이 멀기 전에는 멀쩡한 사회인이었던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사망선고를 받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과 같다. 본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절이라는 것이 자연상태의 개인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당신에게 해를 끼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을 고려할 때 더이상 자신의 의도를 보여줄 수 없게된 사회에서 그러한 자연상태로의 회귀는 일견 타당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자연상태로 회귀하는 가운데 의사와 의사 아내, 처음 눈이 먼 남자와 그 아내, 검은 색 안경을 쓴 여자, 사팔뜨기 아이, 안대를 한 노인들은 서로 간에 신뢰를 회복하게 된다. 시력을 잃지 않은 의사 아내가 있기 때문에 그 집단이 유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초기 서로가 모두 보이지 않는다고 믿던 시기부터 시작된 신뢰에 의사 아내가 눈이 보인다는 것을 공유한 것은 단순히 신뢰를 공고히 하게 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본래 실명이었던 회계사가 총을 쏨과 동시에 자신의 권위를 잃어간 것이다. 자신을 지지해주는 것은 자신이 가진 무기의 실효성만이었던 회계사와 달리 의사 아내는 그들에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며 신뢰를 쌓았고 그 덕분에 집단은 유지되었고 어느 순간 절망적인 순간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불안함과 공포를 품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눈이 멀었다면 반대로 불안함과 공포를 극복하고 신뢰를 회복하고 희망을 품은 사람이 가장 먼저 시력을 회복한다는 부분을 보며 결국 주제 사라마구가 말하고자 한 것은 사람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자 는 것이 아닐까 한다.

  • 눈을 가린 신상들

소설에서 가장 클라이막스는 지하실에 쌓인 시체더미를 본 후 성당으로 들어가 눈을 가린 신상을 보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어둡고 어두워 보이지 않는 죽음과 눈을 가린 새하얀 성상들은 그 대비를 통해 사람들의 희망이 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 어떤 시기보다 안정되었지만 그로 인해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이었던 의사 아내가 마주한 한 무더기의 시체는 인간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며 절망에 빠뜨린다. 그 후 몸을 쉬기 위해 성당으로 들어가 기운을 찾아 되돌아오는 모습은 언뜻보아서는 4일만에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성당은 신성함이나 회복의 공간이 아니었다. 눈이 멀었지만 여전희 신의 신성함을 믿고 그에 위안을 얻으려는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하지만 신의 형상이라 할 수 있는 성상은 모두 눈이 가려져 있었다. 누가 그렇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모든 성상의 눈이 가려졌다는 것은 신이라는 존재는 결국 인간을 딴 것이고 인간이 모두 눈이 멀었으므로 그들도 눈이 멀고 마는 절대적이지 않은 오히려 인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유지되는 존재라고 보여졌다. 그런 떨어져 버린 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눈 가린 성상으로 가득찬 성당을 나옴으로서 의사의 아내는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권위나 예절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의 버티며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 왕이라고 해서 모두가 악한 것은 아니다.

눈 먼 자들 사이에서는 눈이 보이는 자가 왕이다. 이 소설 속의 구절은 맹인 회계사와 총 하나로 수많은 사람을 공포로 지배했던 한 격리자의 모습에서 가장 잘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눈이 보이는 자가 아니었다. 의사 아내야말로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속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이끌라는 남편의 이야기를 따르지 않고 그저 그 사실을 숨기고 자신의 그룹의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챙기기 위해서만 그녀의 눈을 사용한다. 이런 모습에서 개인적으로 사회에 만연한 갑질이라는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모두가 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을인 것도 아니다. 순간의 상황 혹은 어쩔 수 없는 능력의 차이로 우리는 갑이나 을이 된다. 명심하여야 할 것은 그렇다고 모두가 갑질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의사 아내와 같이 그가 가진 지위나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도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야 말로 눈 뜬 자들이 만들어야 할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한다.  갑이라고 해서 모두 갑질을 하는 것은 아니며 갑 중에서도 선한 갑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선한 갑이 되고자 노력해야한다.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지금 우리는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그 어떤 때보다 눈이 멀어만 가는 것 같다. 눈 먼 사람들이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을 보듬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과 달리 우리는 눈을 뜨고 있음에도 가까이 있는 사람을 불신하고 갈등하며 살아가고 있다. 불신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신뢰가 약해져가고 있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 책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눈먼 자들의 도시

 

2018년 마지막 책을 읽었다. 본 책의 저자는 포르투갈의 최초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주자 사라마구’ 이다.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 속 부정세력에 맞서 싸우고 독재정권에 대해 우화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다양한 책을 집필했고, 특히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이라는 본능에 대해 이야기를 풀었다.

부정부패 권력, 인간의 본성과 본능은 추악하고, 익명의 무서움 등, 
아무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는 책임이 없고, 
이기적인 행동만 더욱 하게 되는 인간들의 진짜 모습을 시대적 경에 맞춰 인간의 본질을 빗대어 말한다.

과거에는 특히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문제를 해결하려하고, 더 심하게는 권력을 악용해 사람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해 사회의 이슈가 되고,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 속에서 발생하는 ‘성악설’과 연관되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얘기한다. 지금이야 경제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인식과 시선이 변화해 과거처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지만, 책의 내용처럼 상황이 안 좋아지고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다면 다시금 인간의 본성이 나온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하루하루가 생존인 경우에는 나조차도 책에 나오는 수많은 눈먼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하루하루가 힘든 상황 속에서 남들을 과연 도울 수 있을까? 아니면 정말 성악설이 맞는 것일까?

[읽게 된 동기]

약 10년 전 군대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
어느 날 서점에 들렀는데, 책이 눈에 들어와 구매했고,
아무 생각 없이 읽었던 군대시절과 다르게 작가의 의도와 생각을 이해하고 싶어서..

[한줄 평]

일반적인 삶의 감사함을 느끼고, 볼 수 있음에 나 자신에게 감사함을 갖도록 해야겠다.

[서평]

10년 만에 다시 읽었던 책으로 다시금 나에게 재미를 선사했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보게 되었다. 다른 책을 읽을 때와 다르게 한 시간 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만큼 스토리 전개와 흐름이 적절하게 구성하려고 한 노력이 느껴졌고, 보고 싶었던 책을 봐서 그런지 책을 읽고 난 후 개인적인 만족감도 컸다. 다만 멀리서부터 다가온 인간의 본성에 대한 아쉬움과 언제가 우리 지구에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올 수 있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된 점 외에는 높은 평점을 주고 싶다.

볼 수 없다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하루아침에 원인도 모르는 백색의 빛만 가득하다면,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갖고 오는 공포는 어느 정도일까?

나는 사실 백색의 공포를 경험한 적이 있다. 다만 양쪽 눈이 아니라는 점이 조금 다르지만, 한쪽 눈을 잠깐 잃었던 경험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약 한 달 동안은 두 눈 다 잃었던 것 같다. 우연치 않게 한쪽 눈을 크게 다쳤고, 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최소 5개월은 눈을 감고 생활을 해야만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백색의 공포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의사의 진찰과 소견에도 앞으로 계속 못 보게 되면 어쩔까 하는 생각이었다. 괜찮아 진다는 얘기는 사실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표현은 못했지만 두렵고 무서웠다.

또 난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더더욱 하루하루가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이 나에게도 안내자가 있었다. 그녀는 항상 나에게 먼저 희생을 했고, 도움을 주었다. 혼자서 반찬의 위치도 확인하기가 어려웠고, 숟가락과 밥그릇만 잡고 있으면 반찬을 올려주었고, 가끔은 머리도 감겨주셨다.

그녀의 희생은 의무인가 봉사인가

지금 돌이키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매일매일 내가 보지 못하는 동안 나의 눈과 손이 되어 주셨다. 그때 눈 과 손은 평생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그녀는 나의 어머니다. 나의 어머니기에 당연히 해야 하는 어머니로서의 의무가 있을 수도 있고, 아들을 향한 사람의 힘일 수도 있다. 나는 그때의 어머니의 눈과 손의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고 있다.

그러나 책에서의 그녀는 아들도 아니고 먼 가족도 아니다. 물론 자신의 남편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를 위해 희생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남들을 도와가며 나의 삶을 포기하기까지 그녀도 많이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다. 상황이 만든 의무 일 수도 있고, 희생과 봉사에 대한 마음에서 한 행동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서 결코 잊어선 안 될 일이다.

과연 나였더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남을 위해 내가 희생해보고 봉사했던 게 언제 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모습

나는 본성과 본질을 어떨까? 나도 극한의 상황에서는 악한행동을 저지를까? 나는 아닐거라 생각하지만, 상황에 처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옳은 정답은 없을 것이다. 왜 우리가 악한 행동을 할까? 답은 간단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악한 행동을 저지른다. 그 악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욕구이다.

인간의 악함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고, 또 권력을 남용하는데서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면접을 본적이 있다. 이직을 결심했고 우여곡절 끝 최종면접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의 나는 을이 될 수밖에 없다. 갑은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을에게는 법이 되고, 이행해야만 한다. 이를 지키지 않고 생각이 다를 경우 면접에서 미끄러지는 건 안 봐도 뻔 할 것이다.

사실 면접은 상황이 약간 다르다. 면접관들은 갑이 아니고 면접자도 을이 아니다. 그러나 면접자들은 행동을 조심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좋은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면접관의 사인하나와 점수 하나가 그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갑은 아니지만, 때로는 슈퍼 갑이기도 하다. 권력을 이용하지는 않지만 이용할 수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처럼 권력은 작은 곳에서부터 여러 다양한 곳에 두루두루 있다. 책의 내용 중에 암울한 환경에서도 인간은 권력을 얻고 권력을 이용한다. 권력이 도대체 무엇이고,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느끼는 힘은 어느 정도일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나도 나이가 먹어 어느 정도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권력을 갖고 있을 때, 과연 권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미래에 나에게 묻고 싶다.

[인상 깊은 문구]

– 눈이 먼 남자는 마치 눈을 뜬 채로 우유의 바다에 빠진 것처럼, 진하고 균일한 백색을 본다고 단언했다.
– 나도 데려가야 할 거에요. 나도 방금 눈이 멀었거든요.
– 우리는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이제 곧 우리가 누군지도 잊어버릴 거야, 우리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 모두 입 다물어, 조용히 해, 누구든 목소리를 높이면, 그냥 쏴버리겠다.
– 네 목소리는 잊지 않겠어. 나도 네 얼굴을 잊지 않겠어
– 그녀가 절망감에 사로잡혀 수도꼭지를 비틀자 마치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는 것처럼 물이 갑자기 분출하며 사방으로 튀었다.
– 불길은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한다. 달빛이 다시 비춘다. 눈먼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의 이런 진지한 걱정을 보면 그런 자들의 선입관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다.
– 맨 앞에 볼 수 있는 누을 가진 여자가 섰고, 그 다음에 눈을 가지고 있지만 볼 수는 없는 사람들이 섰다.
– 이 도시의 눈먼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 참나, 눈을 감고도 오르 내릴수 있었던 계단인데
–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두려워서, 늘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용서해 줄 구실을 찾으려고 하죠, 우리 차례가 될 때를 대비해 미리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를 구해놓듯이 말이에요.
– 이 모든 일이 아직도 꿈 같아요.
– 그는 소리쳤다, 눈이 보여
–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하얗게 보였다. 내 차례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 때문에 그녀는 눈길을 얼른 아래로 돌렸다. 도시는 여진히 그곳에 있었다.

책의 주인공들의 이름은 없다. 이름 없이 특징으로만 그들을 설명한다.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곳에서, 이름은 뭐가 중요할까.

나의 이름을 속여 말할 수 있지만, 나의 이름을 걸고 말하기는 어려운 게 많다. 나에 대한 믿음과 내가 행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만 나를 알릴 수 있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들은 눈 뜨기 전까지 자신을 알리고 말하는데 어려움이 컷을 것이다.

볼 수 있던 볼 수 없던 그건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남기를 바랄 뿐이다. 불가능하겠지만 보이지 않아도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 갖았으면 좋겠다.

[ 읽게 된 동기 ]


STEW 독서소모임 첫 소설 책.

 

[ 한줄평 ]


서평을 쓰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서평 ]


아마 몇 년 동안 읽은 책 중 가장 가벼운 책이 아니었나 싶다.

이불 위에서 슥슥 한 권을 뚝딱 읽는다는 사람들이 ‘이런 두께와 이런 내용을 읽었구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도 얻었다… 왜냐면 내가 최근 읽은 책들이라 함은….

[서평] 벨 연구소 이야기 ★★★★★

[서평] 플랫폼 제국의 미래 ★★★★☆

[서평] 일의 미래 :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오는가 ★★☆☆☆

… 그만 알아보자.

 

무튼 무게감이 있는 책을 읽다가 정말 3시간 정도 반쯤 누워서 슥슥 읽었다. 읽다보니 ‘햄릿’이라는 작품의 줄거리가 조금씩 떠올랐다. 어차피 햄릿 내용은 대다수의 사람이 알테니 조금 스포일러를 해보면…

왕자 햄릿은 죽은 왕인 아버지의 영혼을 만나 아버지가 살해됐음을 듣고, 복수를 꿈꾼다. 광대를 이용해 삼촌이 아버지를 살해한 것인지 확인을 하고, 잉글랜드로 팔려갈뻔 했지만 다시 돌아와 복수를 시작한다. 아쉽지만 삼촌도, 햄릿도, 어머니도 그리고 햄릿이 사랑했던 여인과 그녀의 가족 모두도 죽었다는 비극적인 결말.

사실 이 소설을 또 읽고도 ‘내가 이걸 왜 읽는건가…’ 하는 고민이 또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을 보면 나는 이런 고전과 친하지 않은게 분명하다. 게다가 번역상 문제인지 끊임없이 말장난을 해대는 것을 다 읽고 있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간단하게 말합시다… 뭘,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기라고 해서 기라고 하려고 했더니만, 기가 아닌것 같기도 하고… 이게 뭔소린가…

 

어쨌든 햄릿은 비극의 주인공이 됐지만, 명언을 남겼고. 나는 소설 속 햄릿의 고뇌와 비슷한 현실 속 내 모습을 비교해보는 나름의 서평을 적어볼까 한다.

 

나는 뭘 하고 싶은가? 뭘 해야 하는가?

햄릿은 많은 고뇌의 갈림 길에 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갈림 길. 나는 그 중 햄릿이 가장 답답했을 시기를 소설의 초반부로 꼽고 싶다. 아버지 영혼을 만나기 전 말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한 뒤, 삶의 의욕을 잃었을 그 시절. 할지, 말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닌 도대체 난 뭘 해야 하는지를 걱정하던 그 때 말이다.

 

아마도 현재의 청년들이 겪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취업 전 대학시절 겪었던 시기고, 지금의 경험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당연히 돌아가겠지만 초기화 돼 그때의 막막함을 다시 겪어야 한다면 가고 싶지 않은 그 시절.

누군가는 ‘뭣도 아니기에 뭐든 될 수 있다며’ 말장난 할 수도 있겠지만, 뭐든 될 수 있기만 한가? 뭣도 안된 채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을. 이런 류의 말장난을 하는 사람에겐 말장난으로 되돌려주고 싶다.

그래, 로또 확률도 50%야. 되거나 안 되거나.

 

셰익스피어의 햄릿 원본도 이런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오히려 초반부 햄릿이 아버지 영혼을 만나기 전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2달을 버텼을지 말이다. 그 괴로웠을 2달 간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어머니의 재혼을 바라보며 왜 견뎌냈는지 말이다.

내가 햄릿이라면 복수를 할지, 말지 보다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더 힘들었을 것 같다.

 

계획을 하느냐? 마느냐?

올해 직업을 바꾸고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 개발자와 기자는 정말 많은 점이 다르지만, 최근 느끼는 정말 다른 점 중 하나는 ‘노력이 꼭 좋은 결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몇 달 간을 공들였지만 너무도 쉽게 엎어지는 일이 있는가 하면, 별 생각 없이 하던대로 진행했는데 노력보다 훨씬 큰 보상을 받기도 한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다 그동안 열심히 해서 그런거야’라며 사람 편한 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 내가 아니라는데…

 

내가 쓴 기사가 바이럴 마케팅이 잘 돼 여기저기 퍼져나가는 것이 마냥 기쁠 것 같았는데, 몇 번 경험하다보니 당췌 바이럴이 되는 포인트를 못찾겠더라. 이게 참 괴롭다. 잘 읽히는 글을 쓰려면 그 포인트를 알아야 하는데, ‘이건 그냥 넘어가자’ 하고 쓴 글이 터져버리면 사실 좀 싫기도 하다. 더 잘 쓸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 꿈이라는 게 바로 야망입니다. 야망은 결국 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새로운 일을 시작한지 이제 1년이 돼 간다. 아직도 단단해지려면 한참 멀었고, 내가 보지 못한 일들이 훨씬 더 많지만 욕심이란게 그리 간단히 정리 되지는 않더라. 더 잘하고 싶고, 더 빨리, 더 큰 성과를 내고 싶고, 남의 떡이 더 커보이고 말이다.

 

다시 앞의 이야기를 가져오면, 그래서 공들이지 않은 일이 좋은 성과를 낼 때는 사실 좋은 성과 만큼 걱정이 되기도 한다. 여전히 내가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의 좋은 결과는 달갑지만은 않다.

깊게는 차라리 아무 생각하지 말고 몸 가는 대로 일을 할까 싶기도 한다. 어차피 내가 계획한 대로 이뤄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냐?

햄릿이 안타까운 것은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차라리 햄릿 혼자 죽었더라면, 삼촌이라도 어머니와 행복했겠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채 하고 오필리아와 살았다면, 그것도 또 나름의 행복이 있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모두 죽은 이 상황을 과연 죽은 아버지는 만족해 했을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투였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햄릿의 행보를 박수치고 싶진 않다. 결국 누구도 승자가 없는 전투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민은 이해한다만, 결과 마저 그리 됐으니 그 점이 참 아쉽다. 가장 아쉬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햄릿’은 어디 있었냐는 말이다.

햄릿, 스스로가 하고자 했던 일은 뭐였나? 왕이 되고 싶었던거라면, 삼촌을 죽일 기회가 왔을 처음에 죽였어야 했다. 아버지의 원수를 좀 더 괴롭게 죽이겠다는 안일한 생각에 결국 모두가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좀 전의 그 배우에 비하면 난 정말 헛 살고 있지 않아? 그자는 단지 허구일 뿐인 상상의 사건에도 격정을 토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 배역에 영혼을 쏟아부어 얼굴이 온통 해쓱해지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고, 표정은 일그러지고, 목소리는 갈라지고, 그야말로 온몸의 기능 하나하나가 제 배역의 연기를 위해 열렬히 반응하고 있어.

 

언젠가 새벽에 일어나 축구를 본 적이 있다. 스페인 리그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엘 클라시코’ 경기였는데, 당시 레알마드리드의 우측 풀백 ‘다니엘 카르바할’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미친듯이 질주하는 그 모습에서 인용문 속 햄릿의 마음을 그대로 느꼈다.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저 선수는 왜 저렇게 미친듯이 뛰나? 나는 왜 저렇게 안뛰나? 저 선수가 뛰는 곳은 세계 최고의 클럽, 세계 최고의 리그, 세계 최고의 경기. 나는 왜 세계 최고에 속하지 못하나? 나는 속하면 안되나? 나는 왜 세계 최고에 속하려는 생각 조차 하지 않았나?

 

그쯤 비슷한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리곤 ‘세계 최고는 무엇인가?’ 따위의 철학적 질문들을 했던 것 같다. 꼭 열심히 달려야만 하는지, 위로 달려야만 하는지, 앞으로 달려야만 하는지 등 말이다.

결국 답은 ‘나’ 였다. 내가 달리는게 좋으면 달리고, 위로 향하는게 좋으면 위로 향하는 것이다. 내가 숨쉬는 역사가 곧 내가 된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가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햄릿은 햄릿으로 살았을까? 글쎄, 햄릿이 있기는 했을까?

나는 나로서 살고 있을까? 글쎄, 나는 누구인가?

 

 

[ 인상 깊은 문구 ]


  • 그 꿈이라는 게 바로 야망입니다. 야망은 결국 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 좀 전의 그 배우에 비하면 난 정말 헛 살고 있지 않아? 그자는 단지 허구일 뿐인 상상의 사건에도 격정을 토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 배역에 영혼을 쏟아부어 얼굴이 온통 해쓱해지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고, 표정은 일그러지고, 목소리는 갈라지고, 그야말로 온몸의 기능 하나하나가 제 배역의 연기를 위해 열렬히 반응하고 있어.

2009년, 우연히 블로그를 시작하고 그 매력에 흠뻑 빠졌다. 네이버 블로그로 시작해 티스토리로 옮기며 축구칼럼을 썼는데, 당시 다음뷰 메인에 실리고 축구 카테고리 랭커가 될 정도로 글을 자주 썼다. 그런 나를 본 어머니가 2010년 1월 솔깃한 제안을 한다.

세용아, 이제 책 읽고 서평 쓰면 권당 2만원씩 줄게.

당시 나는 방학때만 알바를 하고, 최대한 돈을 아껴쓰는 대학생이었다. 용돈이 필요하던 찰나, 어머니의 제안에 솔깃해진 나는 냉큼 수락했다.

▲2010년, 최근 3년치를 더한 만큼의 책을 읽었다. / 오세용

서평은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주제다. 책을 많이 보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100권 읽기를 목표로 하는데, 아마도 나는 67권으로 100권의 효과를 냈을지도 모른다. 주로 자기계발서적을 읽었고, 소설책 등으로 권수를 늘렸다.

2010년 많은 책을 읽고, 2011년에는 취업을 했다. 그 뒤로는 월 1권 읽기도 바쁜 시간들을 보냈다. 사실 서평 데이터를 정리하기 전까지 나는 늘 월 1권은 읽었는줄 알았다.

그렇게 책을 간간히 읽던 중 내가 운영하는 따뜻한 커뮤니티 STEW(http://stew.or.kr/)에서 재미난 일을 벌리게 됐다.

 

2015년, STEW 독서소모임 시작


2011년 시작된 커뮤니티 STEW는 한국장학재단 멘토링으로 시작됐다. 창업 멘토링이었던 우리는 이후 나를 포함해 실제 창업을 한 친구들도 있고, 여전히 창업 중인 친구도 있다. 나는 2기로 활동했고, 가장 최근은 7기까지 있었다. 2기가 끝난 뒤에도 우리 나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했고, 그렇게 히스토리가 쌓일 때쯤 중요한 친구들이 들어왔다.

2014년, STEW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5기 친구들이 들어왔다. 5기 팀장 이윤석과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사부작 하던 중 이참에 STEW에서도 독서소모임을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다. 옳다구나! 친구들과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이야기가 나온 김에 냉큼 진행하자고 했고, 윤석이의 초안과 함께 STEW 독서소모임이 시작됐다.

▲이윤석 STEW 5기 팀장이 만든 독서소모임 초안. / 오세용

현재는 위 프로세스와는 달라졌지만, 다양한 도서를 읽자는 목표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만 말하면 독서소모임이 쉽게 만들어진 것 같지만, 사실 STEW에서 독서소모임을 만들려는 시도는 전부터 있었다. 2010년 책을 67권 읽으며 정말 많이 배웠던 나는 친구들과도 이 배움을 함께 하고 싶어 늘 책을 함께 읽자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전국에 흩어진 물리적 거리와 취업이란 큰 장벽이 앞에 있어 모든 친구들이 마음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2012년에도 시도했던 STEW 독서소모임. / 오세용

시간이 흐르고보니 정말 ‘때’라는 것이 있나보다. STEW의 모든 친구들이 소중하지만 STEW를 함께 만들었던 2기, 한층 활동력을 넓혀준 5기가 없었더라면 단언컨대 지금의 STEW는 없다.

어쨌든, 그렇게 5기 친구들의 활약과 기존 STEW 멤버들의 합류로 2015년 드디어 STEW 독서소모임을 시작했다.

▲2015년 독서소모임 본격 시작. / 오세용

4년이 지난 지금과 비교하면, 정말 갖춰진게 없던 모임이었다. 각자 읽은 책을 가져와 이야기를 나눴고, 분야도 경영도서부터 소설까지 함께 이야기 하려니 내용도 뒤죽박죽이었다. 그래도 친구들과 평소 나누지 않던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

독서소모임을 시작하자마자 행운이 찾아왔었는데, 당시 전자책 서점 ‘리디북스’에서 북클럽을 뽑아 지원을 한다는 공지였다. 독서소모임은 이제 막 시작 단계였지만, 2011년부터 쌓인 STEW 이야기를 잘 풀어내 리디북스 북클럽에 뽑혔다.

▲행운이 따른, 리디북스 북클럽. / 리디북스 공식 블로그

우리는 책을 읽고 정성껏 PDF로 정리해 제출했다. 당시 북클럽은 3달 지원을 받은 뒤 끝났는데, 정말 좋은 타이밍에 적절한 지원을 받아 STEW 내부에서도 신이 나서 활동했던 기억이 난다.

2015년은▲자유도서▲유엔미래보고서 2045 ▲징비록 ▲운동화를 신은 마윈 ▲예술가로 살아가기 등 총 5권을 읽었다.

 

2016년, 서평 제도 시작


2016년부터는 욕심이 생겼다. 5권은 물론, 책을 읽고 서평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2010년부터 책을 읽으면 늘 서평을 쓰는 습관이 생긴 나로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친구들은 서평을 쓰는데 부담을 느꼈다. 그 부담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하지만 서평을 쓰면 확실히 얻는다 주장했고, 결국 서평 제도는 시작됐다.

▲2016년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 STEW 비공개 카페

생각보다 큰 부담을 느끼는 친구들도 있었다. 취업준비 등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인원이 줄기도 했다. 그래도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는 등 늘 3~6명 사이의 참석 인원을 유지했다. 경험상 토론하기에 3명은 너무 작았다.

독서소모임 2년차, 다른 독서소모임과 같이 STEW도 같은 고민들이 있었다. 지각과 책을 읽고 오지 않는 문제였다. 일단 지각은 말할 것도 없고, 책을 읽고 오지 않는 문제는 참 어려웠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기에 사실 책 없이도 다양한 대화가 가능했지만, 독서소모임에 대한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군주론… 너무도 어려웠던 책. / 오세용

2년을 운영한 뒤 포맷 변환의 필요성을 느꼈다. 토론의 깊이도 고민이었고, 모임 후 결과물이 없는 것도 걱정이었다. 이렇게 진행되면 결국 몇 년 뒤에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다.

욕심병이 또 도졌다. 기왕 하는거, 뭔가 더 남는 모임을 만들고자 했다.

2016년에는 ▲자유도서 ▲군주론 ▲마인드체인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한 권으로 보는 서양 미술사 이야기 등을 읽었다.

 

2017년, STEW 독서레시피


커뮤니티 STEW는 STEW 내 셰프를 담당하는 친구 서보경이 지었다. 당시 보경이의 아이디어는 이랬다.

미국을 샐러드 볼(SALAD BOWLS)이라고 하거든. 다양한 문화, 민족이 있다는 뜻이야. 근데 우리 모임도 그렇잖아? 너는 컴퓨터고, 나는 영어, 쟤는 경영, 전자 등 다 다양해. 대신 우리는 열정이 있으니까! 뜨거운… STEW 어때?

그렇게 우리는 STEW가 됐다.

▲따뜻한 커뮤니티 STEW. / 오세용

STEW는 함께 성장한다. 일정 성취를 얻으면 졸업하지 않고, 시스템도 성장해 늘 함께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꿈꾼다. STEW를 만든지 8년째인 지금, 친구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이 친구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더 깊이를 가질 때 STEW는 보다 더 강한 커뮤니티가 될거라 생각한다.

2017년, STEW 독서소모임은 큰 변화를 만들었다. ‘발제자’ 시스템이다.

기존 임의로 자유, 사회, 과학, 인문, 예술 등 분야를 나눠 책을 함께 정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자는 취지에는 적절했으나, 토론에 깊이가 얕다는 단점이 있었다. 사실상 모여서 해당 분야에 대해 겉핥기만 하고 끝나는 식이었다.

발제자 시스템은 이를 보완했다. 발제자는 자신이 편하고, 잘 아는 분야의 도서를 선택해 토론을 리딩한다. 발제문을 올려 친구들이 같은 주제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하고, 모임 내용을 정리해 콘텐츠화 한다. STEW 독서레시피다.

▲STEW 독서레시피 시작. / STEW 페이스북 페이지

STEW 독서레시피는 토론 내용을 정리한 카드뉴스다. ▲페이스북 등 SNS에서 추후 STEW를 알릴 때 사용하기 위해 기록하기 위함 ▲기록을 약간의 부담으로 보다 질 높은 토론을 유도하기 위함 ▲그리고 STEW 내 다른 친구들에게 내용을 공유하기 위함 등 다양한 목적이 있는 콘텐츠다.

2017년부터 오늘까지 매 독서모임이 끝나면 STEW 독서레시피를 만드는 강행군을 했다. STEW 독서소모임은 2016년부터 늘 오전 10시에 진행했는데, 발제자는 오전 10시에 나와 토론 후 점심을 먹고 저녁 5~6시까지 독서레시피를 만들다 귀가하곤 했다. 물론 팀장인 나도 늘 함께 했다.

만들어진 독서레시피는 늘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렸지만, 그다지 많이 읽히진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고민이 필요하겠다. 하지만 발제자 시스템 도입으로 고민했던 토론의 깊이에 대한 문제는 많이 해결이 됐다. 친구들의 사회 경험이 쌓이며 각자의 위치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도 점점 더 재밌어졌다.

2017년 발제자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자유 도서는 없앴다. ▲배민다움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오가닉 미디어 ▲불안 ▲데이터의 보이지 않는 손 등을 읽었다.

 

2018년, 연 6회로 확장


2015년 독서소모임을 시작하고 늘 걱정스러운게 있었다. 팀장인 나의 일정이었다. 개발자로 일했던 내 업무 특성상 간헐적으로 굉장히 바쁜 시기가 있었다. 이때마다 나는 모임에 참여하지 못할까 걱정이 깊었다. 하지만 독서소모임이 더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내가 없어도 운영이 돼야만 했다.

2018년부터 STEW 독서소모임은 연6회로 확장했다. 그리고 내 스케쥴에 따라 유동적이었던 일정을 짝수달 첫 번째주 일요일 오전 10시로 무조건 진행하기로 했다. 3년간 매번 운영을 해온 내가 없어도 말이다. 운영진으로서 굉장히 큰 결심이었다.

그만큼 서평 제도와 독서레시피가 일정한 퀄리티의 토론을 보장할 수 있었다. 물론 나 외에도 처음 STEW 독서소모임을 기획했던 이윤석 등 몇몇 친구들에게 진행을 위해 필요한 것, 독서레시피 제작 방법 등을 알려준 뒤였다.

▲짝수달 첫 번째주 일요일 오전 10시 무조건 진행되는 STEW 독서소모임./ STEW 페이스북 페이지

2018년은 특히 내게 부담이 있었다. 6년간의 개발자 생활을 마치고 기자라는 새로운 포지션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올해의 단어를 ‘초심’으로 정할 만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과 무게감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언제나처럼 STEW 독서소모임에 모두 참여했지만, 두 번 정도는 조금 버겁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서평도 쓰고, 발제문도 준비하는 것은 하루 이틀만에 되지 않는다. 결국 처음으로 서평 지각을 했다.

2018년 STEW 독서소모임 멤버는 처음 2015년 대비 3명만 남고 모두가 교체됐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모임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초기 독서소모임을 기획했던 이윤석의 도움이 정말 컸다. 그리고 늘 지각하고, 서평을 안쓰지만 4년만에 처음으로 발제자 역할을 맡아 준 내 친구 김지용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2018년 STEW 독서소모임은 ▲대량살상수학무기 ▲혼자 있는 법 : 인생학교 ▲일의 미래 :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오는가 ▲플랫폼 제국의 미래 ▲벨 연구소 이야기 ▲햄릿 등을 읽었다.

이제 STEW 독서소모임은 만 4년 동안 총 21회의 독서소모임을 진행했고, 멤버가 계속 교체됐음에도 여전히 매 모임 4~7명 참여자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새 상위 모임인 STEW의 8년 업력을 절반으로 따라잡았으며, 내가 없어도 언제나처럼 운영될 수 있게 됐다.

이제 내가 아끼는 STEW 독서소모임을 조금은 공개해도 될 것 같다.

 

2019년, STEW 독서소모임 멤버 모집


내게 있어 책은 정말 감사한 존재다. 우연히 시작한 블로그, 그리고 어머니의 제안으로 들인 습관 서평. 그렇게 10년간 책을 읽고 서평을 쓰다 보니, 컴퓨터학과 출신 개발자였던 내게 이제는 글쓰는 것이 업인 기자가 됐다.

개발하는 기자, 개기자의 탄생이다.

▲개발하는 기자, 개기자.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오세용 기자. / 오세용

나는 올해부터 소프트웨어 전문지 ‘마이크로소프트웨어’를 만든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는 1983년 창간된 현 대한민국 유일의 소프트웨어 전문지로 연 4회 출판하고 있다. 새로운 조직에서 새로운 일을 하지만, 언제나처럼 커뮤니티 STEW를 만들고, STEW 독서소모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고, STEW 경영소모임에서 미래를 생각하며 늘 배우고 있다.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어떻게든 해냈던 경험이 있다면 큰 벽 앞에서도 쫄지 않을 수 있다. ‘위닝 히스토리’다. 지난 4년간 STEW 독서소모임을 안착시키며, 나는 새로운 위닝 히스토리를 만들었다. 당연하지만 이는 나 혼자서 할 수 없었던, 내 친구들이 함께 해줬기에 가능했던 너무도 소중한 경험이다.

▲STEW 독서소모임. / 오세용

다르지만 공감할 수 있고, 두려울때 함께하고 싶은 내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가?

STEW 독서소모임에서 2019년을 준비한다. 이제 기존 멤버에 새로운 에너지를 더하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우리와 함께 책을 읽을 수 있는 STEW 독서소모임으로 초대한다.

 

참가신청서 – http://bit.ly/2Qbf40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