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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어른들의 잔치에서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과 귀와 손과 발을 잃어가고 있다.

0. 도입

이 책은 한 변호사님이 추천한 책으로, 평소에 전혀 읽어보지 않는 분야의 책이었다. 아동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한 사람의  노력 이야기,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나는 사실 아동의 인권과 체벌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못 하고 살아왔다. 이 책을 통해서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일들에대해서 조금이나마 사고할 수 있는 시야를 얻게된것같아 다행이다.

1. 가족과 체벌

1.1 가족에게 아이란

최근 몇년간 정말 많은 놀이터가 사라지고 있다. 내가 어렸을때만 해도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두꺼비 집을 만들며 놀았다. 그리고는 손과 발은 흙 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흙을 보기가 참 힘들다. 20년 전의 아이들이 놀이터에 가서 놀았던 반면 현재의 아이들은 놀이터 대신 학원에 가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놀이터대신 학원에 가는가.

점차 보기 어려워지는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수학 공식과 영어 단어를 외우는게 인생에서 중요한게 아니라 노는법을 배우고 친구들과의 유대감을 키우는게 인생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몇이나 될까. 누구를 위한 고통의 시간인가? 어떤 부모들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을 위해서라고 한다. 또 어떤 자식들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모를 위해서라고 한다. 이 경기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다.

이 시대의 몇몇 아이들은 도통 자신들의 선택으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것 같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 부터 부모의 계획대로 아이를 키워 나간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잘 키우려 한다.  그런데 잘 키운다는 것의 초점이 아이의 행복보다는 성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부모들은 말한다, “성공하려면 이렇게하고 저렇게해서 그렇게 되어야해” 도대체 그렇게 해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행복한 아이의 인생을 원하는 것이라면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어린시절에 놀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경험을 해야할 나이에, 사회가, 세상이 원하는 인재가 되기위해서 살아가고 있다.

아이는 부모의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가족의 행복에서 태어나, 다시 가족의 행복으로 되돌아 간다. 아이를 소유물로 생각하지 말고, 부모와 동등한 존재의 가족 구성원으로서 인식해야 한다. 아이들에게는 부모든 국가든 누군가의 이해관계를 충족할 의무가 있는게 아니라, 자기자신의 자유와 권리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1. 2 아이에게 체벌이란

나는 2012년부터 7년간 과외를 해오면서 수많은 학부모들과 학생들을 만났다. 그런 일련의 경험들에 미루어 볼때, 부모가 강압적일 수록 아이의 자존감과 성적이 낮았으며, 부모가 자유로울수록 아이의 자존감과 성적이 높은 경향이 있었던것 같다. 물리적 학대만이 학대는 아니며, 자유와 권리를 빼았고 억압하는 것은 더 심각한 정신적 학대이다. 학대는 아이들을 아프게 한다.

체벌은 아이들에게 위계 질서를 각인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체벌이란 개념이 인류가 시작했을때 부터 존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벌은 조폭, 군대, 전쟁, 폭력과 가깝다. 가족, 사랑, 교육, 보호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가족은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하는가? 가족을 전쟁터로 내몰지 않기를 바란다.

1.3 체벌의 존재 이유

부모는 왜 아이들에게 체벌을 할까.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적이 없겠지만, 언뜻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말을 안 들었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을때 당근과 채찍의 채찍으로써 체벌을 한다. 그 행동을 하지 않게하고, 다른 행동을 하게끔 위한 것이다. 조금더 깊이 생각하면 부모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다. 

왜 감정적으로 공감을하거나, 논리적 언어로 이해시키지 않고 체벌이라는 도구를 쓸까. 이것은 평등한 관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말 그대로 높은 지위를 이용한 강압적 폭력에 가깝다. 부모가 아이를 체벌하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아이가 부모를 체벌하는것은 도덕에 어긋난다고 하지 않는가. 이것은 기저에 부모와 자식은 평등하지 않는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있다는 사고다. 

저자는 글에서 한 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래가르드가 발표한 ‘스웨덴식 사랑 이론’이 그런 논리인데 아래와 같이 말한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나는 체벌이라는 한 가지 예시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체벌이라는 물리적 폭력을 포함한 정신적 학대는 인간적 교류 없는 가족을 만들며, 가족의 행복을 빼앗아 갈 것이다. 그럴거면 아무것도 안 하는게 차라리 낫다. 아이를 끌고 가는 부모가 되지 말고, 아이와 함께 옆에서 걸어가고 넘어졌을때 일으켜 줄 수 있는 부모가 되자. 

2. 비정상 가족

2.1 다른것을 틀린것으로 보는 사회.

살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혼동하는 단어 중 하나가 ‘다르다’와 ‘틀리다’라고 느껴왓다. 영어로 “different”와 “wrong”이다. 이 두 단어를 혼동하는 영어권 사람을 본적이 없다. 단어는 소리로 나타나지만 그 안에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단어를 혼동한 다는 것은 명백히 그 개념을 혼동한다는 것이며,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 두 개념을 혼동하고 있다.

왜 혼외자녀는 차별 받아야 하는가, 다르니까 틀린것인가? 종이에 쓴 사인이 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바꾸는가? 결혼의 정상가족이라는 프레임에 갇힌 사고방식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다른것에 대한 불편함, 그리고 남의 시선에 대한 의식이 뿌리깊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책 <사피엔스>에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칠흑의 장막”이라는 것이 있다. “만약 당신이 이세상에 피부색, 국가, 소득, 사회계층이 모두 무작위적인 확률로 다시 태어난 다면, 당신은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 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별이 없는 세상을 원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마음은 자신이 우월한 존재가 되면 바로 바뀌어 버린다. 

2.2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

남들도 다 하니까… 불안이 낳은 사교육 과열

밤10시면 학원 끝? 심야교습 금지 비웃는 대치동 불법 새벽과외 - 매일경제
명동이 아니다, 평범한 대치동 학원가 밤10시 풍경이다. 아이들은 고군분투하고 있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일때, 남들을 따라한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이런 맹목적인 군중심리는 굉장히 큰 피해를 낳는다. 남들과 다른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타난 하나의 예로, 자녀들을 어릴때부터 과하게 교육하는 것을 들 수가 있다. 이 군중심리는 가정의 경제적 풍요, 화목한 가정, 가족의 함께 보내는 시간, 아이들의 꿈, 아이들의 주체성을 빼앗아 간다. 그리고 심화되어 결혼과 출산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하며, 청년들이 자녀를 낳는것을 꺼리게 되고 출산율을 낮추는데 한 몫을 한다. 물론 이런것 뿐만 아니다, 좋은 아파트,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동네, 좋은 휴대폰 등등 남들과 다르면 안 된다는 것이 다 포함된다.

2.3 인종차별을 하면서 자신에게는 인종차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회

 저자는 책에서 한국도 인종차별공화국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인종차별 받는것을 매우 싫어한다. 간디의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간디에게 어느 부모가 와서 부탁을 했다. 아이가 사탕을 너무 자주 먹는데, 사탕을 먹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다. 간디는 그 부모에게 한 달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한 달 뒤에 다시 왔을때, 간디는 이제서야 아이에게 사탕을 끊으라고 조언을 해줄 수 있었다고한다. 그 때 간디도 스스로 사탕을 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사회라는 틀속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가 사회에서 준 경험은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나에게 바라는 행동을 당신도 남에게 하라.

3. 아동 인권의 과거 현재 그리고 우리 사회의 미래

3.1 조선 시대 때 부터 내려온 전통적 체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난 그림이 있는데 바로 다음과 같다. 김홍도의 ‘서당’이다. 그림은 아이들이 시험을 보고난 뒤 시험을 못 본 제자를 훈장이 회초리로 체벌을 한 것으로 보인다. 훈장님의 표정도 좋지 않고, 아이는 울고 있다. 다른 아이들은 체벌 당한 아이를 보며 웃고있다. 서당은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인데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에 그려진 것을 보면 흔히 있는 일이었던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교육기관에서의 체벌은 최소 몇백년을 지나 2012년에 법으로 금지됐다.

김홍도의 ‘서당’

3.2 점차 사라지는 체벌 그러나 또다른 문제

학교에서 체벌이 법으로 금지되면서 체벌은 많이 사라진 듯 하다. 하지만 사실 체벌은 학교보다도 가정에서 더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맞고 부모에게 달려가 우는 아이는 그래도 부모가 달래주지만, 가정에서 맞고 학교 선생님에게 달려가기는 조금 어렵지 않은가. 체벌이 사라져야 하는 제 1순위는 가정이다.

“세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부모의 헌신’과 ‘자식의 보답’구조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부채의식을 갖도록 한다.

“아동인권운동에 앞장섰던 폴란드의 교육자 야누시 코르차크는 ‘세상에는 많은 끔찍한 일들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아이가 자신의 아빠, 엄마, 선생님을 두려워 하는 일’ 이라고 했다.”

또다른 문제는 21세기 자본주의 시대의 투자처로 전락한 아이들이다.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인식에 더해 아이들에게 가족의 성공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약한 존재인 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주는건 아닐까. 많은 부모님들이 자기자신이 아이였다면 원하는 가정을 자신의 아이에게도 주었으면 좋겠다. 공감 그리고 역지사지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3.3 아이들이 행복해야 나라가 행복하다

아이들이 곧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그런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국가도 곧 행복하지 않게된다. 21세기가 되면서 더욱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후손들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경향이 생겨가는것 같은데, 예를 들어 “나때만 아니면 돼” 라던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등 이다. 우리가 그런 선조의 후손이었다면 매우 화가나고 슬플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후손에게 그런 세상을 물려주지 말자. 행복한 아이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누구나 미소를 띠게 될것이다. 아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게 곧 국가의 종말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의 미래에 행복이 사라지지 않도록 아이들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도록 자유와 권리를 지켜주자.

자녀를 소유하려 들지 말고 독립적 인격체로 보라

김희경

4. 마치며

나는 어린 시절 체벌을 거의 받지 않았고, 매우 자유로운 편으로 자랐다. 그래서 아동의 인권과 체벌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하지 못 했다. 하지만 대학생 시절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물리적 체벌은 보지 못 했지만, 정신적 체벌에 가까운 장면들을 다소 목격했다. 내가 본것들과 이 책의 내용이 합쳐지면서 , 사실 글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썼다. 하지만, 모든 부모들이 이 글과 이 책처럼 행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저자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극단적인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나는 우리사회가 체벌 문제를 비롯한 많은 점에서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아지는 만큼 새로운 문제들도 발생하고 있는것 같다, 예를 들어 과보호와 과한 교육 등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을 따라할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이 나의 자녀를 지켜주는 방법인지 자신만의 철학을 가졌으면 좋겠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이런 생각을 할 틈이 없지만, 우연한 계기에 아동의 인권과 삶에대해 생각해보는 기회가 온 다면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방법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니까.

5. 인용구

  1. 나는 가족 내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인 아이를 중심에 놓고 우리의 가족, 가족주의가 불러오는 세상의 문제들을 바라보자고 제안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
  2. 나는 이 책을 통해 가족 안팎에서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인간성과 도덕성, 질서,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고 독자들에게 청하고 싶다.
  3. 채벌을 해도 된다고 보는 태도가 뿌연 안개처럼 사회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아동학대를 뿌리 뽑을 방법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4. 소중한 대접을 받지 못하면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다.
  5. 아이들에게 체벌은 위계질서를 어린이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6. 이누이트족은 자녀가 성장해서 사고력을 갖추게 되기 전까지는 부모가 무엇을 가르치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7. 과보호는 거의 모든 가정이 자녀교육을 놓고 총력 질주하는 경쟁사회에서 남들이 하는 만큼을 해야한다는 불안함 때문이든, 자식의 성공률을 어떻게된 높이려는 열망 때문이든, 아니면 부모 자신의 성취욕구 때문이든, 요즘의 한국 중산층 가정에서 흔한 일이다.
  8. 기도를 할 때에도 남편과 자식들 말고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빌지 않는 엄마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갈아 넣어 운영하는 가족의 성공을 꿈꾸는 야심가다. 이게 다 너를 위한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엄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엄마 꿈의 대리 실현자가 된 아이는 희망의 포로디.
  9. 부모로부터 과보호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 일수록 낮은 자존감과 우울로 인해 무기력하고 복종적인 태도를 보인다.
  10. 요즘 수강신청에서부터 어느 동아리에 가입할 것인지까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음번에 올 것인지조차 엄마에게 물어보겠다라고 하는 학생들이 있다고 했다.
  11. 10대들의 하루 평균 학습시간은 6시간이 넘는다. 주 단위로하면 성인의 법정근로시간인 40시간보다 더 오래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12. 와중에 있던 놀이터도 없어지는 추세다. 2015년 1월에 어린이 놀이시설 안전관리법에 따른 안전성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놀이터 1,740곳이 동시에 페쇄됐다.
  13. 사회가 함께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 없이, 남을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따는 불안으로 모두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놀지도 못한 채 일찌감치 떨려나거나 부모의 소망은 충족시켰을지언정 자기 인생을 위해선느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아이들에게 맘껏 놀며 자시 속도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힘껏 가보라고 격려해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14. 열한 살 소녀가 서툰 솜씨로 그린 한 장의 그림. 도화지의 위쪽 절반에는 주먹만 한 글씨로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하지 마세요 라고 쓰여있다.
  15. 한국은 인종차별 공화국.
  16. 일터는 부모가 늦게까지 일하기를 원하고 학교와 학원에서 아이들은 늦게까지 공부해야 한다. 그렇게 가족이 함께하는 소소한 순간을 놓치는 사이, 아이들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도 함께 사라져간다.
  17.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18. 자녀가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이 대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택해왔다. 덕분에 아이는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진 성인이 됐지만 결정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출 기회를 놓쳤다. 결국 스스로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갈 문 앞에 서게 된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했던 일들이 사실은 아이에게 독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19. 자녀를 소유하려 하지 말고,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라.
  20. 아동은 보살핌과 보호, 좋은 양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아동은 인격과 개별성을 존중받는 방식으로 다뤄져야 하며 체벌이나 다른 어떤 모욕적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21. 아동인권운동에 앞장섰던 폴란드의 교육자 야누시코르차크는 “세상에는 많은 끔직한 일들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아이가 자신의 아빠, 엄마, 선생님을 두려워하는 일”이라고 했다.

심금을 울리는

심금을 울리는 책이다

사회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자기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손을 든다. 그리고 돈이 판치는 현 세상에서 소외된 문제 중 하나는 ‘가족’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감정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라 이렇게 눈물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억지 눈물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보려고 하지 않는 사회의 어두운 내면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현재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저자가 제기한 문제는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내용이라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한 존재 가족. 가장 개방적이면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존재. 같은 행동도 타인이라면 엄청난 문제가 됐을 상황도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그렇기에 저자가 던진 가족에 대한 문제는 독자로 하여금 평생 가렵지만,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살짝 긁어준 꼴이다.

아동 : 출생에서 사춘기 사이의 시기에 있는 사람. 주로 성인과 대비되는 개념

책의 주된 내용은 아동 폭력이다. 폭력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는 단어다. 폭력 없이는 인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가장 빈번하면서도 소외된 폭력이 바로 아동 폭력이다. 저자는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용서(?)된 가족에 의한 아동 폭력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한다.

다양한 사례는 이미 뉴스를 통해서 봐왔지만, 다시 봐도 충격적인 내용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폭력을 극혐하는 비폭력주의자이다)

사전에서도 나오지만, 아동은 성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많이 알고 있다. 성인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는 약자인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개념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언어가 중요하다

아동을 성인과 대비되는 존재, 약자인 존재, 가르쳐야 하는 존재, 덜 진화한 존재로 배우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무지한 행동은 끊이지 않는다.

저자는 아동을 성인과 동등한 인권을 가진 존재로 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스웨덴과 같이 법으로 아동체벌 금지 등의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춘기를 보낸 대부분의 성인은 그 당시에 아이 취급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나 또한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부모가 아니라 모르지만, 부모에게 자식은 늙어도 자기한테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사춘기를 지냈던 성인이 부모가 되어서 자기 자식을 자기가 받았던 것과 똑같이 취급한다. 현실에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가 현실을 몰랐다는 생각과 함께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살아본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그렇게 아이들은 학업이라는 억압된 환경 속에서 자아를 상실한 기계가 되고, 그 과정에서 폭력과 마주친다.

나도 억압적인 학업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 강한 사춘기 반항으로 인해 스스로 만든 자유 속에서 살았다. 지금도 부모님은 그때 부모님 말씀을 들었으면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조건 속에 살고 있을 거라고 종종 말씀하시지만 아직은 후회해본 적이 없다.

저자는 아이들의 오락 장소가 없어지고 있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다. 저자의 말처럼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는 놀았던 기억밖에 없다. 총 싸움, 팽이, 자전거, 오락실, 레고 등등 모르는 아이들과도 친한 친구처럼 놀면서 사회를 배웠다. 학원을 운영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온종일 학원에 다니고 집에서는 숙제를 한다고 한다. 학원을 안 가면 놀 친구도 없다고 한다. 모두가 학원에 다니기 때문이다. 나도 자식이 생기면 달라질 거라 하지만 정말 그렇게 키우기는 싫다. 자기가 어떤 자아를 가졌는지조차 모른 채 부모가, 아니 양육강식이라는 문화를 주입하는 사회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게 두고 싶지 않다.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뛰어놀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게 하는 대안 마을들이 있다고 한다.

국가는 어디까지

저자는 기자 출신이자, 공직에 있어서인지 현실적인 해법에 대해 지속해서 독자를 설득한다. 이미 갈 때까지 간 대한민국의 문화로서는 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나 또한 결혼과 육아라는 험난한 벽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저자의 말에 많은 동의가 갔다. 우리나라는 저출산이라는 국가 존망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회사에서도 많은 분이 육아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본다. 과거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육아로 인해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도 결혼할 때 전제 조건으로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부부들이 종종 있다.

국가적인 육아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저출산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

국가는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나 또한 양육강식의 문화에서 자라서 그런지, 개인의 삶은 개인이 주도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저자의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에 동의하면서도,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일변도식의 흐름에 조금은 거부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체벌 금지법 등 인간으로서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기본법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이것 저것

내 글을 돌아보니 참 정리가 안 된 것 같다.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이 하나씩만 두고 볼 수 없고 너무 많은 것들과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려고 한다. 가족의 문제는 모든 사회적 문제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모든 문제는 사람으로 인해 나오고, 그 사람의 기본 구성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도외시했던 가족이라는 문제에 대해 되돌아보아야 한다. 저자의 마지막 말처럼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다음 세대인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다시 봐야 할 책이며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할 책이다.

다시 봐야 할 책이며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할 책이다.

인상 깊은 문구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 – p5

가족 해체보다 여전히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 p9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을 말한다. 바깥으로는 이를 벗어난 가족 형태를 비정상이라 간주하며 차별하고, 안으로는 가부장적 위계가 가족을 지배한다. 정상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가족이 억압과 차별의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 p10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 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 p29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p30

자녀가 직계존속, 즉 부모를 폭행할 경우에는 타인이 같은 대상을 폭행했을 때보다 가중처벌을 받는다. 반면 부모가 직계비속, 즉 자녀를 폭행했을 때에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 p32

기도를 할 때에도 남편과 자식들 말고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빌지 않는 엄마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갈아 넣어 운영하는 가족의 성공을 꿈꾸는 야심가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엄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엄마 꿈의 대리 실현자가 된 아이는 희망의 포로다 – p66

그래서 제일 덜 급하고 점수화되지 않을 일들이 가장 먼저 저희들의 인생에서 지워집니다. 어쩌면 행복은 지워진 일들 속에 있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 p68

경쟁과 수익 창출이 지상과제일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장소는 공적인 삶이 이뤄지는 곳이기 십상인데 그 대가는 크다. 동네의 놀이터와 골목길은 아이들이 공적인 삶을 배우는 공간이다.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 없이 놀면서 아이들은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차이를 협상하고 갈등의 타협점을 모색한다. 그렇게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키운다. 그런 물리적 공간이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 p75

사회가 함께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 없이, 남을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불안으로 모두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놀지도 못한 채 일찌감치 떨려나거나 부모의 소망은 충족시켰을지언정 자기 인생을 위해서는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아이들에게 맘껏 놀며 자기 속도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힘껏 가보라고 격려해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가 그토록 어려운 걸까 – p76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동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p78

아이를 직접 키우는 미혼모보다 아이를 버렸을 때 그 아이를 대신 키우는 사람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는 한국 사회는 어떤가. 시설에 대한 지원의 일부라도 직접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지원으로 돌린다면 양육을 포기하는 미혼모가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 p123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유일한 나라다 – p133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 p157

위기의 나락으로 둘러 떨어지는 개인을 밪쳐줄 사회적 보호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개인이 부여잡을 지푸라기는 뭐였을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었다. 가족은 부계혈연 중심의 유교적 가족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며 줄곧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개인을 지켜주는 거의 유일한 울타리였다. – p166

사회정책이 가족 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서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 p175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억울하면 출세하라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 p179

세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부모의 헌신과 자식의 보답 구조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부채의식을 갖도록 만든다. 헌신과 보답의 도덕적 의무로 서로에게 지우는 이 가족주의의 구조 안에서 행복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 p184

자신안에 내면화한 부모의 모습과 싸우고, 달래고, 도망치고, 협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곧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성장의 과정이다. 나는 그 과정을 어떻게 치러내는가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 p190

한국 가족주의에 대해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

첫째.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 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 안전망인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겼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리는 만무하다.

둘째.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 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개별성과 다양성의 설 자리는 없다

셋째. 자기 집단만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러졌다 – p 203

부모의 체벌금지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의 목적은 단순하다. 명백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매우 선명한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 폭력과 비폭력 사이에 아주 단순하고 선명한 줄을 긋는 것이다. 어른의 책무는 아이들에게 폭력이나 협박, 위협에 기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며, 정부의 책무는 비폭력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체벌을 금지하는 법과 함께 부모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정부가 제공하고, 정부와 사회가 합심하여 부모가 아이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될 만한 시간과 에너지를 갖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체계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 p217

스웨덴의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300분이고, OECD 국가 평균은 47분이다. 한국은? 6분이다 – p231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잉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한국은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 p232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 p255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의 선을 정하는게 먼저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는 공감의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물론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의 도덕적 과제, 감성의 영역으로만 남겨두어선 안 된다. 우리의 폭을 넓히려는 교육이 공교육에 제도적으로 포함되어야 하고, 차별금지법,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게 우리를 같이 살아가게 해주는 공감의 제도화다.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계에선 예의, 공적 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다 – p256

내 혈연이 아니더라도 세대를 이어 인류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기대가 사라진다면, 개인의 삶은 유한해도 나보다 더 크고 지속되는 전체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다면, 그 모든 추구와 삶의 의미도 빛을 잃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미래의 낯선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를 다음 세대에,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 p267

★★★☆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니까”

한국 사회에서의 ‘정상’ 범위는 너무 좁다. 

일전에 친구와, “길거리에 정상적인 사람이 많다는 건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규정되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올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당장 최근에 외출한 날만 생각해보아도, 길거리에서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았는지 떠올려보면 간단하다. 그러다 사회 속 비정상의 통계를 보면 생각보다 큰 수치에 놀라기도 한다. 단순히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은 거리인 게 아니라,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어야만 편하게 나올 수 있는 거리인 게 아닐까?

김희경 작가의 <이상한 정상가족>은 그 중에서도 특히나 가족이라는 구성원 형태 속 정상 범위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나는 사회적으로 보여지는 정상 범위의 가족에서 자랐고 가까운 지인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책을 읽고나니 그게 우연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동반 자살이 아니라 가족 몰살”

저자는 한국의 특이한 ‘동반 자살’ 포맷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식을 소유물로 여겨 그 처분 또한 부모가 결정할 수 있다는 의식과, 부모와 자식이 함께 사는 정상가족의 형태가 아니면 자식이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공공 역할의 부재가 합쳐져 만들어진 동반 자살. 서양에서는 ‘아동 살해’ 혹은 ‘자녀 살해’, ‘가족 몰살’ 등의 용어가 사용되는 것과는 대비된다. 말 그대로 나와는 독립적인 다른 인격체를 죽이는 행위에 살해가 아닌 자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도 인식을 하고 나니 굉장히 기형적으로 다가온다.

이로 인해 자식을 살해한 부모는 동반 자살을 ‘선택’한 부모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흔히 자살자에 가지는 연민을 그들에게도 가지게 된다.

(※스포일러※)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도 동반 자살을 시도한 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영화에서 어머니의 행위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내린 안타까운 결단으로 비춰지거나 모성애로 포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로 인해 성인이 된 아들이 가지는 트라우마와 피해를 적나라하게 그릴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다시금 생각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모성애’의 아이러니를 꼬집는 명작이었다.

“왜 미혼모만 있고 미혼부는 없을까”

미혼부도 존재한다. 보이지 않을 뿐. 

책은 미혼부가 아닌 미혼모만 존재하는 현상에 대해 여성에게 양육을 떠넘기고 남성에게는 책임을 지우지 않으며, 아버지 없이 혼자 키우는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문제로 꼬집었다. 이 또한 일리있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미혼부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다.

몇 년 전 보았던 다큐멘터리에서 처음으로 ‘미혼부’라는 개념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다. 영상 속 아버지는 아이를 두고 어머니가 도망을 가서,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3개월 전 처음으로 미혼부도 아이의 어머니 없이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있었다. 엄마에 대한 서류 없이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미혼부에 대해 아동이 태어난 즉시 출생을 등록할 수 있는 권리를 기본권으로 인정한 첫 사례이다. 이처럼 당연한 논리가 2020년에서야 인정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이 또한 이상한 정상가족을 위한 든든한 첫 계단이 되어줄 것이다.

“저를 때리고 싶다면 돌을 던지세요”

책은 아동문학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폭력에 반대합니다(Never Violence)’ 연설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한 여성이 아들을 매로 가르치려고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하자, 아들이 회초리감을 찾을 수 없었다며 대신 자신에게 던질 수 있는 돌을 어머니에게 내밀었다는 일화였다. 이 부분을 읽고 머리를 한대 맞은 느낌이었다.

훈육 목적을 위한 체벌에 찬성하는 사람 중에서도 위 일화를 인상깊게 읽은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회초리로 때리는 것과 돌을 던지는 것의 차이가 뭔가? 본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두 행위의 의도는 다를 지언정 결과는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 두 행위를 구분지어 보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일 뿐이다. 회초리로 때리는 것은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훈육 행위이고 돌을 던지는 것은 죄를 지은 자에게 행하는 야만적인 행위라고 보는 그 ‘시선’. 결국 사회적 시선이 아직 내면화되지 않은 아이를 통해 우리의 고착화된 관념이 깨지는 것이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정상 가족”

저자는 마지막 챕터에서 이상한 정상가족을 위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도 아동학대를 해결하기 위한 스웨덴의 예시가 인상 깊다. 아동 체벌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가정 내 뿌리깊은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스웨덴은 1979년 체벌 금지를 분명히 명시하는 법을 개정했다. 단순히 유명무실한 법 개정으로 남지 않기 위해, 스웨덴 정부는 다양한 언어로 적힌 설명서를 아이가 있는 모든 가정에 배포하는 등 대대적인 캠페인을 펼쳤다. 그 결과 스웨덴 전체 가구의 99%가 이 법에 알게 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본인은 이 사례를 통해 다양한 가족 형태를 위한 미디어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미디어는 우리 안의 정상을 규범짓고 내면화하는데 놀랄만큼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

한국의 미디어 속에서는 너무나 많은 정상가족만이 등장한다. 비정상 가족이 등장하면 그들은 항상 어딘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이상한 비정상 가족으로 비춰진다. 아니면 정상의 범위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을 응원한다. 정상 규범에서 벗어나면서도 행복하게 잘 지내는 이상한 정상가족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정상가족에 익숙해지며 이상한 정상가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환상을 심는다. 이처럼 아직은 해결책보다 문제가 많은 세상이지만,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몇십년동안 이상한 정상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이상함이 이상해지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

인상 깊은 구절

“선량한 많은 이들이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금을 매우 쉽게 긋는다는 걸 깨달았다.”

“구성원의 절반가량이 특정 연령층에 대해 특정한 조건하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수용하는 사회에서는 체벌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폭력이 더 높은 수위의 폭력으로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아동학대는 극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고의적 폭력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의 우발적 체벌이 통제력을 잃고 치달은 결과라는 것이 그간 숱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이유로 또는 타인의 행동 교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때릴 수 없는데 오직 아이들만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것이 용인되는 유일한 집단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때리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어떤 폭력은 정당화가 가능하다는 뜻인데, 이는 전적으로 매를 든 사람의 논리다. 맞는 아이들에겐 체벌의 이유가 사랑이든 분노든 다를 게 없다.”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역향 중 하나”

“체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더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비대한 국가를 선호해서가 아니다. 공공의 개입이 닫힌 방문 안에까지 이루어질 때에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고 자유로워지는 약자들이 가족 안에 있기 때문이다.”

“소위 ‘정상가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들을 학대가 일어나기 쉬운 취약가정으로 분류한 셈이다… (하지만)문제는 가족의 형태가 아니었다.”

“이렇게 예측을 하려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안전은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쓰는 놀이터니까 이같은 동시 폐쇄가 가능했을 것이다. 한꺼번에 이렇게 폐쇄된 곳이 경로당이라고 생각해보라.”

“언론이 ‘동반자살’이라고 보도하는 것은 아래와 같은 잘못된 인식을 유포할 위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

“이렇게 구조적으로 아이 버리기를 부추기는 사회에서 아이를 버리는 ‘주범’이 여전히 미혼모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른바 ‘정상가족’이 아닌 다른 삶은 잘못되었다고 차별하고 배제하면서 교육받을 권리와 일자리까지 위협하는 한국의 가족주의에 그 혐의를 두고 싶다.”

“출산율이 높은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가장 특징적인 차이는 혼외출산 비율이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유일한 나라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이 경쟁단위다.”

“우리는 왜 중립적 호칭을 놔두고 굳이 가족적 거리를 암시하는 표현들을 점점 더 많이 쓰게 되었을까?”

“회초리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찾을 수 없었어요. 대신에 이 돌을 저한테 던지세요.”

“법 개정의 목적 자체가 체벌이 자연스럽고 양육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문화적 규범을 바꾸자는 거였으므로 스웨덴 정부는 법 통과 이후 이를 알리기 위해 대대적 캠페인을 펼쳤다… 법안 통과 2년 후인 1981년엔 스웨덴 전체 가구의 99%가 이 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쉽다는 말로 서평을 시작한다. 좋은 주제, 좋은 접근이 좁은 시야와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어떤 문제도 단순히 감정을 내세워 해결될 수는 없다.

여기에 사상을 더했다. 다양한 해법이 있을 터인데, 어째서 한 방향으로 결론 짓는지 모르겠다. 정해진 답을 향해 문제를 만들고, 풀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훌륭한 문제 제기

책은 훌륭한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나는 매일 아침 30분씩 이 책을 읽었고, 5시간 만에 책을 다 읽었다. 보름 정도 걸린 셈이다.

5시간 만에 현 가족공동체의 단점과 아쉬운 정부 정책, 선진국 사례와 소외된 계층에 관해 빠르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저자 기본 커리어인 ‘기자’가 어떤 능력치를 갖는지 알 수 있었다.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받음.” ‘체벌’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이다.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이 2001년에 아이들이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정리한 기록이다.

난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체벌을 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손을 든 적이 없으며, 내 실수에 몇 차례 나무란 것을 제외하곤 큰소리를 친 적도 손에 꼽는다. 때문에 나는 체벌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 논리라면 나는 어머니에게 체벌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몇 차례 회초리를 맞은 기억이 있다. 전혀 괴로운 기억이 아닌 내게 저자 주장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그런데 저자는 체벌도 ‘학대’라고 한다. 때문에 일단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가 조사한 다양한 자료를 통해 ‘체벌’이라는 게 굉장히 넓은 범위를 말한다는 것, 그리고 적어도 나는 더 나은 방법으로 육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곳곳에서 내 배경지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도 있었다. 혼외출산을 장려해야 한다느니, 해외 입양 자체를 부정하는 등 좀 더 정보가 있어야 고개를 끄덕일 만한 큰 덩어리도 나왔다.

그럼에도 저자가 제기한 ▲가정폭력 ▲친권 ▲미혼모 등 문제를 인식하는 데는 탁월한 글이었다. 한 번쯤 이 문제에 관해 생각하고, 더 나은 방안은 없을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문제 제기를 왜 이렇게 풀었을까?

길을 잃은 문제…방향은 사상으로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은 학교에서나 찾을 수 있다. 어떤 정답에 관한 문제를 찾고, 그 문제에 관한 대안을 제시하고, 그 대안에 관한 문제를 찾으며 인류는 발전해왔다.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 따위는 없다. 정답이 있었다면 인류사에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인류는 늘 선택을 했고, 승자는 선택을 정답을 만들기 위한 승자독식 사회를 만들어왔다. 어떤 문제에 관한 정답은 없다.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저자는 정답을 강요한다. 그동안 문제 제기가 마치 개인의 정답을 논하기 위함으로 보일 정도다.

사회학자 김혜영은 이를 가족을 통한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발전과정에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을 골자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 것이다.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저자는 모든 문제를 정치와 엮는다. 저자가 주장하는 정답은 ‘큰 정부’다. 대부분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줘야 한다는 논리다.

저자가 말한 ▲가정폭력 ▲친권 ▲미혼모 등 문제를 꼭 큰 정부로 풀어야만 할까?

이런 저자의 주장이 무섭기까지 한 점은 큰 정부라는 선택을 논하기까지 현재가 갖는 장점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점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진행돼야 하는 것은 ‘문제 파악’이다. 이 문제 파악에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만 논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프로그래밍 세계에서 상용 소프트웨어 문제를 해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문제 해결도 아니오, 정확한 문제 해결도 아니다. 기존 정상 기능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문제 A를 해결하겠다고, 문제없던 B, C, D를 문제로 만드는 게 주니어 개발자가 흔히 하는 실수다.

저자는 ▲가정폭력 ▲친권 ▲미혼모 등 문제 해결을 위해 기존 정상 기능을 부숴버리려 한다. 과연 현재 구조가 무조건 나쁜 것만 있을까? 현재 구조를 없앴을 경우 또다시 누군가는 소외될 가능성은 없을까? 왜 그런 언급은 없을까?

2017년 12월 국회가 이듬해 9월부터 소득 하위 90%의 만 0~5세를 대상으로 월 10만 원 아동수당을 선별 지급하기로 합의한 내용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동수당을 선별 지급하면 수당을 받지 못하는 소득 상위 10%를 걸러내는 데 들어갈 행정 비용과 사회적 갈등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제도의 근본 취지도 심각하게 훼손된다.

아동수당을 모든 아이들에게 지급하고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더 걷으면 될 일을 정치적 흥정에 붙여 선별 지급하겠다는 것은 양육을 가족 책임에서 사회 책임으로 가져오자는 아동수당의 근본 취지를 저버리는 것이다.

고소득자 기준은 어떻게 정하는가? 100억 원 자산가의 소득이 0원이라면, 이는 상위 10%로 들어가지 않는가? 소득 상위 10%에게 세금을 더 걷을 경우엔 사회적 갈등이 생기지 않는가? 이번 통신비 지원 2만 원을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 수 있다.

큰 정부에 관한 이중잣대는 본문에서도 슬쩍 드러난다. 결국 정부가 많은 것을 보장하면, 행정 비용과 이를 행하기 위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은 어디서 갑자기 떨어지는 게 아니다. 현 정부 정책처럼 기존 민간 인력을 활용하게 된다.

창업 정책 중 팁스(TIPS)가 있다. 팁스는 이스라엘에서 가져온 정책으로 민간 투자기관이 1억을 투자하면 이를 신뢰하고 정부가 총 10억에 달하는 추가 투자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즉, 민간 투자기관이 좋은 기업을 찾아야 한다. 이 정책에서 핵심은 민간 투자기관의 역량이다.

큰 정부를 논하며, 기존 기관에 관한 불신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세 미혼모가 생계를 꾸리며 검정고시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아이를 24시간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는데, 보육료가 벅차 부담이 덜한 고아원에 딸을 맡겼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죽었다.

은비 엄마는 17세에 미혼모가 되어 홀로 생계를 꾸리며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느라 딸을 24시간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다. 보육료가 벅차 전전긍긍하던 그는 하는 수 없이 보육료 부담이 없는 고아원에 딸을 맡겼다. 은비 엄마도 본인도 외할머니에게 자랐기 때문에 딸이 시설에서 자라는 걸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입양을 보내면 아이가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랄 수 있다고 해서 은비 엄마는 입양을 결심한다. 그러나 결국 딸은 싸늘한 주검으로 엄마에게 돌아왔다.

아이가 왜 죽었는지는 본문에 없다. 소름 돋게도 저자는 아이가 죽은 이유를 사회적 지원으로 꼽는다. 고아원이 아이를 죽이는 곳인가?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다.

사회적 지원이 있었다면 미혼모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이 대신 검정고시를 준비한 것은 미혼모의 선택이었다. 미혼모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고아원에 아이를 맡긴 것이지, 검정고시를 위해 아이를 죽인 게 아니다. 여기서 잘못은 고아원에서 아이가 죽은 것이지, 고아원에 맡길 수밖에 없도록 사회적 지원이 부족한 게 아니다.

이쯤 되니 저자 논리 핵심이 보였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저자 논리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저자 논리에는 ‘감정’이 들어있다. 17세 미혼모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국가 지원이 적어 고아원에 딸을 맡기는 이야기에 미혼모 본인이 외할머니에게 자라는 이야기가 왜 들어가는가?

그저 ‘이렇게 슬픈 이야기니, 너는 여기서 마음을 아파해야 해’라고 들린다.

보육료 부담이 적어 고아원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보육료를 더 주고 24시간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게 하는 게 큰 정부인가? 24시간 어린이집에서는 아이가 죽지 않는가? 24시간 어린이집에서도 아이가 죽으면, 아이는 어디로 보내야 할까?

만약 24시간 어린이집을 ‘아이가 죽지 않는 곳’이라 정의한다면, 보육료 부담이 없는 고아원에서도 아이가 죽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게 더 근본적인 해결책 아닌가? 사회적 지원을 더 주면, 아무도 고아원에 가지 않는가?

▲감정에 호소하는 것 ▲정해진 답을 향해 논리를 푸는 것 ▲큰 정부를 세금으로 충당하려는 것 등에서 나는 저자가 ‘기자 출신이 맞구나’ 싶었다.

저자는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18년간 동아일보 기자, 6년간 국제구호 개발단체, 문화체육관광부 차관보, 여성가족부 차관 등 커리어를 보냈다. 나는 저자 커리어 중 ‘비즈니스 경험이 없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기자는 비즈니스를 모른다. 한국에 기자 출신 손꼽히는 창업가는 없다. 현시대는 자본주의다. 자본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시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글을 쓰고, 구호단체에서 일하고, 정책을 만들며 저자는 얼마나 비즈니스를 이해했을지 의문이 든다.

저자는 이 책을 마치 기사처럼 썼다. 기사는 한 가지 큰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저자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결국 사상이라는 것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촛불집회에서 또 하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장면은 대거 참여한 청소년들이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촛불을 든다”라는 어른들에게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한 촛불을 드는 광장에선 ‘아이’가 존중받는 시민으로 설 틈이 없다.’

많은 시민이 참여해 비폭력 시위를 지킨 것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몇몇 학생이 집회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건 억지다.

집회에 참여하는 시점에도 미혼모는 검정고시와 고아원 사이 고통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다. 정부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 고민 자체를 없애주는 것 아닐까?

여러 선택지가 있음에도 마치 기사처럼 자신이 정한 주제를 위한 자료를 나열하고, 명사의 이야기를 끌어오고, 심지어 주제를 위해서라면 근거 없는 트위터 글까지 나열하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자신의 주장을 위한 자료만 나열한 저자에게 저자가 적어둔 글로 서평을 마치려 한다.

사람들은 외집단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으며 내집단보다 덜 도덕적이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아니, 인류 역사가 지속하는 한 문제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열린 마음을 가져주길 바란다. 특히, 권력을 쥔 많은 정치인이 그래 주길 바란다.

한줄평 ★★☆☆☆

대의 속에 감춘 개인 사상…좁은 시야가 신념을 가지면

인상 깊은 문구

  • 아동학대의 80% 이상은 집에서 일어났다.
  •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삶의 질 종합지수’에서 지난해 10년 전보다 후퇴한 유일한 항목은 ‘가족・공동체’ 영역이었다.
  •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을 말한다. 바깥으로는 이를 벗어난 가족 형태를 ‘비정상’이라 간주하며 차별하고, 안으로는 가부장적 위계가 가족을 지배한다.
  • 국가인권위원회의 <2016년 국민 인권의식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국민의 절반가량은 아동, 청소년을 체벌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조사에서 체벌에 찬성한 절반의 국민도 거의 다 학대에는 반대할 거라고 확신한다. 체버로가 학대 사이의 경계를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때린다는 주장은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들을 괴롭히는 항변 1순위다. 상담원들이 신고를 받고 현장 조사를 나가면 “내 자식 내가 가르치는데 웬 참견이냐”라며 상담과 조사를 거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학대 신고를 받아도 “부모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조사에 불성실한 경찰들도 많다.
  • 평소 체벌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극도의 양육 스트레스를 겪을 때 이 스트레스가 촉매제가 되어 학대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양육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상황에서도 학대로 치닫는 경우가 없었다. 도구를 갖고 엉덩이를 자주 때리는 부모들이 그렇지 않은 부모에 비해 학대를 할 가능성이 9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받음.” ‘체벌’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이다.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이 2001년에 아이들이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정리한 기록이다.
  • 서양에서 체벌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1900년대 초반 어린이도 개별적 존재로서 인권을 갖고 있다는 자각이 시작되면서부터다.
  • 법적 구속력을 지닌 협약으로 아동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1989년 <유엔아동권리협약>이 만들어졌다.
  • 협약이 정한 체벌의 범위는 몸에 국한되지 않늗나. 협약의 이행을 감독하는 기구인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2006년 발행한 논평에서 체벌을 “아무리 정도가 가볍다 해도 물리적 폭력이 사용되고 이로 인해 어느 정도의 고통이나 불편을 야기하는 모든 벌”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는 “손이나 채찍, 막대기, 벨트, 신발, 나무주걱 등의 도구를 이용하여 아이를 때리는 것”이 포함되며 “무시하기, 창피주기, 비난하기, 책임 전가하기, 협박하기, 겁주기, 조롱하기” 등도 비신체적 체벌의 예로 제시됐다.
  • 2017년 5월 현재 가정 내 체벌을 포함하여 아이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명백히 폭력으로 규정하고 법으로 전면 금지한 나라는 전 세계 52개에 달한다.
  •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답신을 받은 직후에는 가정 내 체벌 금지를 법에 이렇게까지 명시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우리가 자문한 변호사들 중에서도 법원이 해석을 잘하면 되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하면 안 된다’라는 조항을 넣은 <아동복지법>이 시행된 지 2년여 동안 사회적 규범과 인식 변화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성인 간의 관계에서는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행위는 이유가 무엇이든 형사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보호와 교양 목적의 징계’라는 말로, 상대에게 의도적인 해를 끼쳐도 된다고 법이 허용하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이다.
  • 친부모라고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시 아이가 생기지 않아 시험관 시술을 해서 세쌍둥이를 얻은 부부가 둘째를 학대로 숨지게 한 사례가 있었다. 극심한 양육스트레스로 우울증에 시달리던 엄마는 첫째와 셋째는 건강이 안 좋은데 혼자 건강한 둘째가 왠지 얄미워 자주 학대했고 결국 숨지게 만들었다. 아빠는 온라인 게임에 빠져 아이들을 방치했다.
  • 아동보호전문기관에는 중산층 가정의 학대도 종종 신고되는데 체벌과 학대의 원인은 대부분 성적이다. 아들의 학업성적이 계속 좋지 않고 말을 듣지 앟ㄴ는다는 이유로 자기가 운영하는 병원 직원을 시켜 산에 데려가 묶어놓고 때리다가 아동학대로 신고된 의사도 보았다.
  • 부모로부터 과보호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일수록 낮은 자존감과 우울로 인해 무기력하고 복종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런 아이들일스록 강한 아이들의 공격 표적이 되기 쉽다. 폭력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폭력 피해자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 2013년 보건복지부의 <아동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아이들 세 명 중 한 명은 하루에 30분 이상 놀지 못했다. 절반의 아이들이 방과 후 하고 싶은 활동으로 ‘친구들과 놀기’를 꼽았지만 실제 방과 후 친구들과 노는 아이는 5.7%에 그쳤다.
  • 2015년 나와 동료들이 ‘잘 노는 우리 학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아이들과 인터뷰를 할 때 열두 살의 한 여학생은 어디서 노냐는 질문에 ‘화장실’이라고 대답했다.
  • 더 이상 ‘동반자살’ 또는 ‘일가족 집단자살’이라는 표현은 쓰지 말아야 합니다. 부득이하게 그러한 사건을 보도할 경우 언론은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했다”라고 써야 합니다.
  • 가족 살해자의 전형적 특징은 대체로 가족에게 헌신적이고 충실해 보였지만 친구가 별로 없고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던 중년 남성들이라고 한다.
  • 다른 사람들이, 사회가 남겨진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인간 대접을 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 근대화의 전 과정에 걸쳐 이를 불행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 흥미로운 점은 같은 유교문화권 중 일본, 한국, 대만, 홍콩은 이러한 유형의 사건을 모두 ‘가족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며 마치 가족 구성원 전체의 자발적 결정인 양 다루지만 중국 본토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 한국과 일본에서는 ‘가족’ 윤리가 우위지만 중국에서는 ‘개인’ 윤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 이 사건을 알리는 기자들은 죄다 ‘무정한 계모’ ‘아직도 팥쥐 엄마가’ 등의 제목으로 비정한 계모를 부각시켰다. 그런데 기사를 읽다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는데, 계모뿐 아니라 함께 아이를 폭행한 친아버지도 같이 입건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부부가 함께 입건됐다는 것을 알리는 제목은 없었다.
  • 부모와 아이를 분리하는 것이 아이의 안전과 삶의 질을 위해 더 낫다고 판단할 때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국가의 아동보호제도다.
  • 친권 때문에 부모와 분리된 아이들의 위탁양육만 불편한 게 아니다. 자녀를 데리고 살지만 친권이 없는 한부모도 마찬가지다. 취학통지서도 직접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병원 진료도, 여권 발급도 어렵다. 겨우 먹이고 재우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 한국 사례는 부모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신생아 수혈을 거부하자 병원이 의료진의 수혈행위를 부모가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낸 것에 대한 동부지방법원의 판결이다.
  • 법원의 결정이 나자 부모는 병원을 옮겨버렸고 결국 안타깝게도 아이는 1주일 뒤 사망했다.
  • 흔히들 해외입양이 한국전쟁 직후 오갈곳 없던 전쟁고아들을 대거 선진국으로 보낸 일이라고들 알고 있는데, 해외입양은 한국의 경제가 초고속으로 발젛나던 1980년대에 가장 많았다. 그 대다수는 미혼모의 자녀들이다.
  •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박영미 대표에 따르면 파트너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절반가량의 미혼부들이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소식을 감춘다고 한다.
  •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저소득 미혼모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어떨까. 정부는 아이(만 13세 미만)를 홀로 키우는 저소득 미혼모에게 월 12만원(엄마가 청소년일 경우 17만 원)의 양육비를 준다.
  • 2009년 유엔총회 결의를 비롯한 국제인권규범은 아이를 원래의 가정에서 분리하는 것은 모든 방법을 다 써본 뒤 가장 마지막에 선택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아이를 직접 키우는 미혼모보다 아이를 버렸을 때 그 아이를 대신 키우는 사람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는 한국 사회는 어떤가.
  • 최근 자주 거론되는 저출산과 연계해 보아도 미혼모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일이 시급하다. 출산율이 높은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가장 특징적인 차이는 혼외출산 비율이다. 한국의 혼외출산 자녀 비율은 세계 최하위권이다. OECD에 따르면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등은 혼외출산이 전체 출산의 절반이 넘지만 한국은 1.9%(2014년)로 조사 대상 42개국 가운데 제일 낮았다.
  • 해외입양 맥락에서 한국은 희한한 나라이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만 2016년에도 해외입양된 아이는 334명으로 거의 매일 아기들이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갔다. 이만큼 발전한 나라에서 부모가 돌보지 못하게 된 300명 안팎의 아이들을 보호할 시스템조차 없어 여태 해외로 입양을 보내야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유일한 나라이다. 중앙입양원 통계에 따르면 2016년까지 한국에서 태어나 해외로 입양된 사람은 총 16만 6,512명에 이르며, 이는 같은 기간 국내입양(7만 9,088명)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 1980년대의 무분별한 해외입양 러시는 88올림픽 전후 해외 언론으로부터 ‘고아수출 세계 1위’라는 거센 질타를 받았다. 거기에 해외입양 중개기관 4곳의 수익이 연 30억 원에 이르는 등 영리 목적 입양 알선이 도마에 오르자 정부는 또 1996년부터 해외입양을 전면중단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한다. 하지만 이 방침도 1994년에 백지화하고 대신 “앞으로 국외 입양을 3~5% 줄여나가겠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안가 IMF 경제위기로 유보하고 만다.
  • 입양되는 아이들의 90% 이상은 미혼모의 자녀다.
  • <헤이그협약>은 해외입양은 ‘보충성의 원칙’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말인즉슨 부모와 떨어지게 된 아이의 경우 국내에서 가정위탁, 국내입양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보호할 방법을 찾아본 뒤 정 방법이 없거든 최후의 보충적 수단으로 해외입양을 선택하라는 뜻이다.
  • 국내의 미등록 이주아동은 대략 2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체류기간이 만료됐거나 외국인등록을 하지 못해 미등록 상태인 이주아동의 경우 아마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가운데 가장 열악한 처지, ‘사각지대 중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일 것이다.
  • 무수한 비판 중 일상생활에서 이주민에게 실제로 피해를 당한 경험에 근거한 주장은 찾기 어려웠다. 대개 ‘왜 내가 낸 세금으로 불법체류 아동을 돕느냐’는 논리였다. 내가 낸 세금으로 남을 돕는 사회보장제도는 비난하지 않는 자칭 ‘민주주의자’들이 미등록 이주아동의 기본권 보장에 대해서는 ‘세금이 아깝다’는 논리를 들이밀었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부모들도 한국에서 일하며 사는 이상 지역 경제의 한 부분을 맡고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금을 낸다는 것도, 간접세 비중이 50%에 육박하는 한국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생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안중에 없었다.
  •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사회심리학자 헬렌 조페의 <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에 따르면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 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프랑스에선 ‘독일병’으로, 플로렌스인들에겐 ‘나폴리병’, 일본인에겐 ‘중국병’으로 불렸다. 매독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불치의 질병은 늘 ‘타자’와 연관되어왔다.
  • 위기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개인을 받쳐줄 사회적 보호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개인이 부여잡을 지푸라기는 뭐였을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었다.
  • 전근대사회에서 가족주의가 지배적이었던 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한국 사회의 특이한 점은 흔히들 가족주의가 약해지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더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근대화 과정 내내 국가가 ‘선 성장, 후 분배’의 논리하에 거의 모든 사회 문제를 가족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 그나마 공공의 사회적 보호제도가 도입된 것은 1987년 민주화 대항쟁 이후의 일이다. 미뤄뒀던 국민연금이 1988년 시행됐고 같은 해 의료보험이 5인 이상 사업장에까지 확대됐다. 이듬해에는 의료보험이 전 국민 대상으로 확대됐고 <모자복지법>(1989년), <영유아보육법>(1991년)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법안들이 잇따라 만들어졌다.
  • 1990년대의 개인화가 더 발전하지 못하고 가족주의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지층을 뒤흔든 IMF 경제위기의 영향이 크다. 국가 경제가 파탄 나면서 모두 불안해졌다. 개인의 자유로운 성장은커녕 가족이 뭉쳐 살아남거나 흩어져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 취업이 어려우니 연애와 결혼, 출산은 유예 혹은 기피 대상이 됐다. 비혼의 급증은 개인화의 결과가 아니라 불안정해진 삶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혼을 해도 삶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모든 것을 일터에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 가족에겐 ‘저녁이 없는 삶’이 일상화됐다. 시간이 있으면 ‘가족과 함께’는 커녕 몸값을 올리기 위한 ‘자기계발’이 시급했다.
  • 사실 핵가족은 근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서도 확대가족, 대가족은 드문 현상이고 부부 중심의 핵가족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수명이 짧아 3대 이상이 공존하는 게 드문 일이었고 확대가족 유지에 필요한 경제력을 갖추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줄곧 핵가족 체제였는데도 핵가족을 이상화했다가 10년도 지나지 않아 비판하는 담론이 출몰했던 이유는 뭘까.
  • 사회학자 김혜영은 이를 가족을 통한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발전과정에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을 골자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 것이다.
  • 남들이 다 하니까 안 하면 늦는다는 ‘공포마케팅’으로 돌도 되기 전의 아이들이 학원에 떠밀려 간다. ‘3세에 뇌 발달이 끝난다’는 식의 근거도 불투명한 ‘3세 뇌발달’ 마케팅이 번지면서 생후 6개월부터 시작하는 이른바 ‘0세 사교육’도 등장했다.
  • 일터에서 가족주의는 1970, 1980년대 고도성장의 시기에 자주 호출되어왔다. 기업은 ‘가족 같은 기업’을 내세우며 노동자들의 한없는 희생과 헌신을 요구했다. 법인과 사인의 계약 대신 가족의 논리를 일터에 끌어들여 권위적, 수직적 인간관계로 노동자들을 통제해왔다.
  • 2015년 EBS가 서울의 한 자치구를 골라서 관내 초등학교 전체 학생 수를 조사했더니 전체 32개 학교 가운데 학생 수가 300명이 안 되는 미니 학교는 모두 여섯 곳이었다. 이 학교들의 위치를 조사해보니 하나같이 임대아파트나 임대 단지 바로 옆에 있는 학교들이었다고 한다.
  • 법으로 부모의 체벌을 금지하는 것은 스웨덴 국내에서도 그렇고 국제적으로도 매우 논쟁적 이슈였다. 법이 제정됐을 때 유럽의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는데 당시 한 프랑스 신문은 “미쳐버린 스웨덴인들” 같은 헤드라인을 붙여 보도하기도 했다.
  •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믿음이 팽배했던 시절 젊은 엄마였던 그 여성은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말을 듣지 않자 매로 가르치려고 아들에게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시킨다.
  • 그런데 이 소년은 회초리를 찾으러 나갔다가 한참 만에 울면서 돌아와 작은 돌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회초리로 쓸 만한 나뭇가지를 찾을 수 없었어요. 대신에 이 돌을 저한테 던지세요.” 아이는 ‘엄마가 나를 아프게 하길 원하니까 회초리 대신 돌을 써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스웨덴 정부는 법 통과 이후 이를 알리기 위해 대대적 캠페인을 펼쳤다. <체벌금지법>과 함께 체벌 대신 사용 가능한 훈육 방법을 설명하는 16쪽짜리 설명서를 자국어뿐 아니라 독일어, 영어, 불어, 아랍어 등 여러 언어로 만들어 아이가 있는 전국의 모든 가정에 배포했다. 또 두 달간 <체벌금지법>에 대한 설명을 우유병에 붙이도록 했다. 아동병원과 산전클리닉들도 캠페인에 참여했다. 그 결과 법안 통과 2년 후인 1981년엔 스웨덴 전체 가구의 99%가 이 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래가르드가 발표한 ‘스웨덴식 사랑 이론’이 그런 논리다.
  •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 <세계가치관조사>에서도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적 신뢰도가 가장 높은 국가들로 꼽힌다. 개인의 자기실현을 가장 중시하면서도 낯선 이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을 신뢰한다는 응답도 50% 이상이었다.
  • 부모휴가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가사 분담이 자연스러워졌다. 한국에선 육아휴직의 부담 때문에 고용주가 여성 채용을 꺼리지만 남녀 모두 육아휴직을 쓰는 스웨덴에선 굳이 여성의 채용을 꺼릴 이유가 없다.
  • 스웨덴 아이들의 거의 절반은 결혼제도 밖에서 태어난다.
  • 출산율이 회복된 나라들에는 혼외출산을 ‘정상가족’에 대한 도전이나 일탈로 간주하며 차별하는 배타성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웨덴이 그 대표적 경우다.
  • 사람들은 외집단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으며 내집단보다 덜 도덕적이고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Brainstorming) 책을 읽으면서 제일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견해는 무엇이었나요?

  1. 작가는 우리의 의식과 제도에 스며있는 소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경계합니다.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고, 바깥으로는 이를 벗어난 가족 형태를 ‘비정상’이라 보아 차별하고 안으로는 가부장적 위계로 가족구성원을 지배하는 세태를 비판하는데요, 이 견해에 동의하시나요?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은 무엇인가요? 또는 “가족”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자녀의 수가 줄어든 요즘에도 교육을 중심으로 한 ‘부모의 희생과 헌신, 자녀의 보답’을 아름다운 관계로 바라는 오래된 가족주의의 경향은 약해진 것 같지가 않다. 되레 가족이 더욱 응집돼 자녀를 두고 ‘너의 성공=우리의 성공’이라고 바라보는 등식이 더 심해진 듯하다. 세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부모의 헌신’과 ‘자식의 보답’ 구조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부채의식을 갖도록 만든다. 헌신과 보답의 도덕적 의무로 서로에게 짐을 지우는 이 가족주의의 구조 안에서 행복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p184

스웨덴의 이상적 가족이란 부부가 각자 일을 하며 서로에게 경제적으로도, 양육의 부담으로도 의존적이지 않은 성인들, 그리고 가능한 한 이른 나이에 독립하도록 고무되는 아이들, 서로가 서로의 신체적 온전성을 훼손하지 않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다. 이는 ‘가족적 가치’를 갉아먹는다기보다 사회적 제도로서 가족이 현대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p221

2. 작가는 한국이 유달리 배타적 가족주의가 팽배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 이유로 한국의 가족이 압축적 근대화 과정 속에서 사회적 안전망 없이 복지와 교육, 의료, 부양 등 거의 모든 사회 문제를 오롯이 떠안으면서 각자도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하는데요, 이 견해에 동의하시나요?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공연한 멸시, ‘정상가족’의 범위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미혼모,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아이들에 대한 차별을 서슴지 않는 심성도 이처럼 내 가족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배타적 가족주의에서 비롯됐다. – p199

‘정상가족’의 안팎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의 문제들을 지켜보며 내가 한국 가족주의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 즉 가족 안에서는 개별성, 가족 밖에서는 다양성이 왜 존중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본 답은 이렇다. 첫째,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 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 안전망인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겼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 리는 만무하다. 둘째,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 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개별성과 다양성의 설 자리는 없다. 셋째, 자기 집단만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p203

3. 당신이 생각하는 “체벌”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러한 체벌을 찬성하시나요 혹은 반대하시나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녀를 소유물처럼 바라보기 때문에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 체벌은 엄연히 별개인 인격체에 대한 구타이고 폭행인데도 아이의 관점이 아닌 성인, 부모의 관점에서 지속된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이유로 또는 타인의 행동 교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때릴 수 없는데 오직 아이들만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것이 용인되는 유일한 집단이다. -p28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 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 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p29

4. 부모의 친권은 부모의 “권리”인가요 “의무”인가요? 그리고 자녀에 대한 친권행사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할까요? 예컨대, 자녀의 통장개설부터 의료행위에 대한 동의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친권과 자녀의 기본권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 설정이 필요할까요?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 긴급보호조치로 집을 떠나 시설에서 살게 된 아이의 경우 국가에게서 수급자로 지정받아 의복비, 식비 등 필수적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문제는 수급비를 받기 위한 통장을 개설해야 하는데 미성년자인 아이의 명의로 통장을 만들려면 친권자인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이를 학대에 결국 격리를 당하기까지에 이른 부모가 통장 개설에 순순히 동의해줄 리가 없다. -p102

5. “가족”이라는 영역은 사생활의 영역에 해당할까요? 그렇다면 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허용될 수 있을까요? 국가의 바람직한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국가는 어린이를 부모에게 귀속된 존재가 아니라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 개인으로 간주하여 보호제도를 운영한다. 국가가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을 일정 부분 떠맡으며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아이들의 권리를 위해 필요하다면 부모 뜻을 거스르면서까지도 강제한다. 아이들의 인격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전통적으로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던 가정 내에 개입해 ‘투명한 가족’을 창출한다. -p215

어른의 책무는 아이들에게 폭력이나 협박, 위협에 기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며, 정부의 책무는 비폭력적으로 아이를 키우는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p217

아이들에게 가족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부모-자녀는 생애의 가장 일차적 관계다. 그러나 가족 안에서 부모의 친권이 아이의 인권을 침해했을 때, 이 경우에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이 부모의 권리보다 우월하고 정당하다. 이게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이자 약자의 편을 들어줘야 할 공공의 역할이다. – p248

6. 작가는 개인과 가족, 국가의 관계 설정에서 이상적인 모델로서 스웨덴을 제시합니다. 개인의 자율을 보장하되, 국가의 적절한 개입을 통해 그 자율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고 하면서 차가운 신뢰 cool trust를 이야기하는데요, 우리나라도 이러한 관계 설정이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발표자들은 이처럼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가 중심에 있는 스웨덴 식의 사회적 계약방식을 국가주의적 개인주의 statist individualism 라고 불렀다. 여기서는 개인의 자율에 대한 강조가 국가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신뢰와 상반되지 않는다. 되레 국가는 시민들의 동맹으로서 개인의 자율성을 수호하는 조력자다. 오히려 개인들 사이에 위계와 불평등이 심한 전통적인 가족의 가부장제가 국가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이 맞서야 할 상대다. -p223

7. (자유토론)

언젠가 읽어보자, 읽어보자, 마음 속에 간직만 해두었던 책인데 이번 기회로 좋은 책을 알게 되어서 기쁘다. 비록 책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 나에겐 너무 어려운 책이었지만 인생, 특히 사랑에 대한 좋은 문구를 많이 접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당시 토마시는 은유란 위험한 어떤 것임을 몰랐다. 은유법으로 희롱을 하면 안 된다.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첨언할 말은 없지만, 소중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문구. 그 가벼운 마음이 너무 소중하다. 사랑은 은유라는 우연에서도, 평소보다 늦은 발걸음에서도 생길 수 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제 공격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프란츠의 사랑이란 언제 공격이 올지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사랑은 나의 가장 연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굳이 가장 약한 속살을 내보일 필요는 없지만, 이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을 거라 믿는 마음의 상태.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크리스티나 양이 메러디스 그레이를 표현할 때 사용한 표현이 있다. “내가 살인을 저지른다면, 만약에라도, 그렇다면 내가 가장 먼저 불러서 같이 시체를 치워달라고 할 사람은 메러디스야.” 드라마 역사상 이만큼 사랑을 잘 표현해주는 문구가 있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를 멍한 상태에 빠뜨렸고 동시에 그를 진정시키기도 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그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그의 무기력함에 구원받았다. 그의 무기력함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불능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인과관계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결정이 선택이고 선택은 포기라는 것이다. 그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결국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도출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은, 선택(이자 포기)을 외면한 도피성 낙원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Movie ref) 미스터 노바디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동정심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일생 동안? 한 달 동안? 딱 일주일만?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으로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자기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회귀는 불확실성에서 온다. 불확실한 선택에서 오는 확실한 불확실보다 이미 한번은 입증된(같은 결과리란 보장이 없음에도) 과거의 선택으로 회귀하는 것이 불확실하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심리적으로나마 줄여주기에, 우리는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불확실한 도전을 하는 건 더 큰 행복을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테레자가 그의 친구 Z가 아닌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그가 느낀 유일한 것은 위를 누르는 압박감, 귀향으로 인한 절망감뿐이었다.

세상에 우연 아닌 결과나 우연 아닌 운명은 없다. 모든 것(물건, 생각, 행동, 현상까지도)은 그것이 비롯된 우연에 의하고, 그 우연도 우연에 의한다. 우연이라 칭해도 운명이고, 운명이라 칭해도 우연인 것이다. 그 둘이 같은데, 무엇이라 부르든 의미는 없다. 중요한 건 모든 것이 ‘한 번(저자에 의하면 의미가 없다는 그 횟수)’이기에 결국 중요한 것은 없다. 과장의 신경통은 토마시의 삶과 상관 없으면서도 그의 인생의 끝자락까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관계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작가가 자신의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몸이 아니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다.

문학의 핵심은 empathy다.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그 상황에 공감하고, 기쁨에 공감하고 사랑에 공감하고 절망에 공감하는 것. 모든 위대한 문학의 의의는 그 공감에서 온다. 그 공감이 나와의 동일시에서 온다면 그것은 자아성찰일 것이고, 그 공감이 나와의 이질감에서 온다면 그것은 카타르시스일 것이다.

나에게 가장 인상깊게 남았던 1부의 여운을 한 장 사이에 두고 저자는 나의 공감의 대상을 종이 위에 분해해서 펼쳐놓았다. 비록 그것이 채 한 문단이 되지 않는 길이였다고 해도, 저자는 순간적인 강렬한 이질감을 통해 비로소 이 글 너머에 있는 저자의 얼굴을 그릴 수 있게 했다. 인상깊은 순간이었다.

“그는 정중한 말투로 말했고, 테레자는 자신의 영혼이 그 남자에게 모습을 드러내려고 그녀의 모든 정맥, 모세혈관, 모공을 통해 표면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가 뭐래도 운명을 믿는 낭만론자들에게 이는 드물지 않은 경험일 것이다. 서로의 짝을 만났다는 생각이 드는 그 순간, 고요함 속에서 시끄럽게 외치는 나의 존재를.

* Movie ref) 팬텀 스레드

8월 마지막날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완독했다. 초반에 조금 달리다가 중간에 갑자기 지루하게 느껴져서 덮어두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심각해져셔 강제 집콕라이프를 하게 되기도 했고, 곧 서평 써야 할 날이 다가오는 기운(?) 을 느끼면서 책을 다시 펼쳤다. 이 책을 읽던 나의 모습은 부푼 기대 > 약간의 실망 > 다시 생긴 호기심 > 흠… > ?! 순서로 설명된다. 분명 완독은 했는데 어딘가 가려운 곳이 덜 긁힌 느낌이었다. 평소 책을 읽을 때 1회독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갖고는 하지만, 이 책은 뭔가 다른 느낌의 찝찝함(?) 을 안겨주었던 것 같다. (찝찝하다는 게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도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각각의 시선을 통한 서술이 꽤 흥미로웠다. 테레자, 토마시, 사비나, 그리고 프란츠까지 적어도 그 부분을 읽는 동안은 나는 그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침투하여 그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 예로 토마시가 테레자를 처음 만나 첫눈에 반하고, 한 줄기의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조금은 억지스러운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설레이는 감정도 느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다가 사이사이에 툭툭 튀어나오는 작가의 생각들, 그리고 철학들을 읽어내는 은근한 재미도 있었다. 작가의 말들 중에서는 꽤 공감가는 문장들이 있어서 나올 때 마다 메모지에 한자 한자 눌러서 적어두었다.

아무도 모르는,

테레자의 솔직한 내면의 심리,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비참한 생각들이 가감없이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들고있던 책 한 권이 상징하는 바, 신분 상승의 욕구, 술집에서 당한 수모로 인해 받은 수치스러움 (요즘 말로 현타라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늙은 토마시를 보며 느끼는 죄책감.. 처음부터 끝까지 테레자의 깊은 내면의 심리를 파헤치며 글을 읽어나갔다. 유년기에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가 깊게 자리잡힌 테레사는, 사랑 앞에 당당할 수 없었다. 토마시에게 솔직하게 불만을 말하고 싶은데, 바람피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가 떠나갈까봐 말하지 못하는 테레자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말하지는 못하지만 티를 내고 싶은 그녀의 유치한 행동들도 이해가 가며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에 목매는 테레자가 가여웠다. 그녀에게 토마시는 세상의 전부였다. 진짜 운명이건, 운명으로 가장한 우연이건, 토마시는 테레자에게 희망이었고, 미래였다. 나는 테레자에게 이 상황에서 벗어나라고, 당신은 토마시 없이도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입밖으로 꺼낼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피하고 싶은 선택의 순간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번째, 세번째, 혹은 네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무수히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A안과 B안이 있을때. 단 1 퍼센트라도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종종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노력들이, 결국 내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조금이라도 나은 대안을 선택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선택을 해야하는 그 상황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돌이킬 수 없으니까.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조금이나마 나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원하니까. 인간의 본성이니까. 그렇지만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A를 고르던, B를 고르던, 내가 한 선택에 대해 100퍼센트 만족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99퍼센트는 만족할 수 있겠지만, 1 퍼센트는 결국 후회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생각해보면 조금의 후회가 항상은 남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는 무거움과 가벼움의 모순이 선택에 관한 나의 평소 생각을 이끌어냈다.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것과 같이 가벼운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일까? 반대로, 베토벤이 말하는 필연적인 것, 무거운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토마시가 그동안의 바람을 정리하고 의사의 삶을 포기하며 테레자와 함께 무겁게 살아가는 것만이 옳은 선택일까? 보헤미아 귀족이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권 대사 두명을 내던져 버린게 과연잘 한 선택일까?

리허설 없는 인생이다. 우리에게 두번째, 세번째 인생은 없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완전한 선택이란 없다. 우리는 무거움과 가벼움이 뒤섞여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보다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정답은 없다. 이분법적으로 정의할 수도 없다. 그래야만 하는 것도 없고, 한번만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우리가 하는 이 모든 과정이 결국 내면에 축적되어 앞으로의 인생에 있어서 선택의 기준이 될 가능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자. 뭘 더하자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

마무리

이 책을 읽는 내내 등장인물들처럼 나도 혼란스러웠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복합적인 감정이 지금 작성하고 있는 서평에 녹아있는 것 같다. 알쏭달쏭한 드라마를 한 편 본 것 같다.

한줄평

최소 5년 뒤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

인상깊은 문구

  •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번째, 세번째, 혹은 네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 사비나의 삶이 음악이었다면, 중산모자는 그 악보의 모티프였다.
  •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 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것이다. 마치 한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사실 이런 고전소설을 읽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번 달 지정도서로 이 책이 정해졌을 때, 오히려 책의 두께보다 이런 류의 책을 읽게 된 신선함에 더 매력을 느낀 것 같다. 사실 책의 1/3 가량 읽을 때 쯤….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읽어도 되는 고전소설이 맞나?’ 이런 생각을 했다. 조금은 불쾌하고, 내 머릿속으로는 이해 안되는 행동들이 꽤 있었다. 토마시의 강압적이고 명령적인 태도, 사비나와 테레자의 관계, 프란츠의  전부인에 대한 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 책이라고 꼽히는 책이었지만 내가 이해하기는 아직 조금은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책을 읽으며 인상깊었던 부분들에 대해 몇 자 적어보려 한다.

진리 속에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늘 우리는 군중, 대중 속에서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다. 즉,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한다. 

프란츠에게 있어서 ‘진리 속에서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 개인적인 삶 속에서의 모습과 공적인 삶 속에서의 모습은 별개이며, 자신의 인생에 이를 깨는 행위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사비나에게 “목걸이가 흉측하네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는 계속해서 거짓 속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부분을 통해 더 이상 그는 가만히 있을 수 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면서 그의 부인에게 대놓고 상처를 주는 모습이 보기 좋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인 그의 심정은 홀가분 이었을 것이다. 이후 프란츠는 사비나와 함께 하기 위해, 그의 부인과 이별을 했지만, 결국 사비나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여기서 사비나는 그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감정들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인생을 단순히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무엇이 나쁜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물론 정답도 없다. 하지만 단 한 번 뿐인 인생은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모순 속에 있기에 인생을 너무 무겁게만 대할 필요도 없는 듯 하다.

책을 읽으면서 사실 사랑이라는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사람마다 각자의 사랑 방식이 있고, 각자가 살아가는 인생이 다르다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책 속에서 토머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주인공들이 삶의 많은 변화를 통해 각자가 깨닫는 바가 다르 듯, 나 역시도 인생의 변화 속에서 수많은 변화들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선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줄평: 연애세포가 살아날까 하는 부푼 마음으로 책을 읽었으나, 나에게는 심오하고 또 심오했다.

평점: ★★☆☆☆

한줄평

다양한 사람들의 복잡한 관계, 우울한 사회상이 어울어져 인생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서평

실제로 이 책은 나에게 꽤나 재미있었다. 매우 속도감있게 전개가 이루어져 읽는데 집중하기도 용이했다. 하지만 이해는 되지 않는 책이다. 다른 멤버들은 인생의 책으로 꼽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누군가에게는 영감을 주고 뜻깊은 책이겠지만 나에게는 ‘아 무언가 있긴 한데 나는 모르겠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서평도 길지 않게 쓰려한다. 내가 이해하고 공감했던 부분까지만 써보려 한다.

수면 위의 행동은 수면 아래 감정을 나타내지 못한다.

토마시, 테라자, 사비나, 프란츠, 시몽, 카레닌 등 주인공들은 모두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 소련의 공산화가 진행중인 동유럽을 배경으로 각 인물들은 매우 인상적인 관계를 가진다. 그들의 관계는 혼란이다.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글을 전개하며 작가는 각 인물 한명한명의 심리를 세밀히 묘사해준다. 특히 불륜이라 할 수 있는 관계에서 토마시가 가지는 태도, 사비나의 예술관을 공산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묘사하는 기자에 대한 항의, 죽음 직전 법적 아내를 보는 눈빛에 대한 프란츠의 심정 등 다양한 장면에서 수면 아래 숨어있는 인물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사람의 행동은 그 감정을 오롯이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을 이 책은 정말 인상깊게 활용한다.

토마시

토마시는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다. 그는 분명 배우자를 사랑한다. 그 스스로도 헷갈려하고 다른 여자를 습관적으로 만나기는 하지만 결국 그녀가 테레자에 가지는 감정은 사랑이다. 사랑에는 육체적인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테레자와 그 사이와 같은 사랑의 형태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 뿐이다.

성공한 외과의사에서 정치세력에 찍혀 유리닦이, 트럭운전수로 지속적으로 그의 사회적 지위는 하강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갈수록 더욱 안정되어간다. 그의 혼란은 사실 테레자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는데서 시작했다. 사랑을 의심하던 그는 지속적으로 다른 여자를 만나며 그 의심을 이어나갔지만 사회적 지위가 하강하면서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달라지면서 줄어들었으나 의심이 사라지진 않았다. 결국 시골에 가서 테레자와 카레닌을 묻으며 서로 간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면서 그는 안정을 찾게 된다.

토마시 이야기 중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매우 와닿았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통해 그는 공산화의 모순을 꼬집었고 당시 사회 상류층의 위선을 까발렸다. 그런 소신을 그는 끝까지 꺾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다소 오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정말 생각지도 않게 나에게 이 책을 각인시켰다. 아마 10년 뒤 이 책을 떠올릴 때 나는 다른 이야기보다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는 아마 내가 소설 속에서 현실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현대 대한민국에도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지만 스스로는 정의감에 불타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디 그들이 더이상 부끄럽기 전에 오이디푸스의 과오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응당한 대가를 치르길 바란다.

테레자

테레자는 시골소녀다. 사랑에 빠져 도시의 혼란에 몸을 던졌고 도시의 혼란이 점점 심해지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혼란을 지속적으로 겪었다. 프라하에서 취리히에 가서도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시골소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진을 통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자 했었으나 결국 그것은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처음 도시에 나온 사랑하는 토마시마저 버리고 프라하로 돌아간다. 프라하에서도 그녀는 원하는 일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돌아온 토마시와 함께 할 시간마저 없는 뒤바뀐 생활을 하게 된다.

토마시의 여성편력은 지속적으로 테레자를 괴롭혔고 그러한 토마시에 대해 그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다른 여자의 냄새를 배고 온 토마시에 대해서도 그녀는 말 한번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결국 정말 시골 소녀였던 것이다. 시골소녀가 자신의 소중한 것 하나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품는 것과 같이 자신의 사랑인 토마시가 정말로 떠날까 두려워 혼란에 빠진 것이다. 결국 테레자는 시골에 돌아가서 진정한 평화를 되찾는다. 카레닌과 함께 소를 치면서 좋아하던 책을 마음껏 읽으며 그녀는 비로소 안정을 찾는다. 카레닌의 죽음을 통해 토마시와의 관계를 재발견하고 춤을 추러 가는 장면은 그를 무엇보다 확실히 보여준다.

사비나

소설 중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작가의 작품관을 표현하는 듯한 사비나의 예술관이었다.

사비나는 배신이 목표인 여자였다. 프란츠에게 사비나의 배신은 그녀를 동경의 대상으로 만들었을 정도이다. 그녀의 그러한 배신은 처음에는 모든 것에 대하여였다. 조국을 도망나온 뒤 조국을 침략한 세력에 관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끝에 가서 사비나는 그녀의 배신은 키치에 대한 배신이라 했다. 사실 아직 키치가 어떤 것인가 정확히 이해는 못하지만 나름 짐작으로는 모두가 옳다고 하는 것, 좋다고만 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녀의 인생은 불행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보통의 관념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런 삶은 극적이게도 그가 바란 키치에 둘러싸여 끝나게 된다. 미국으로 건너가 상류층으로 그녀의 예술적 능력을 인정받으며 가식적인 문화에 스며들어가는 것으로 그녀는 살아가게 된다. 이런 그녀의 삶에 그녀는 적극적으로 부정하려하지만 이미 그것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프란츠

프란츠는 엄친아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이 없는 것을 동경했고 그를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진흙탕으로 뛰어들어갔다. 예쁜 부인, 안정적인 직업, 소득, 사회적 지위를 다 버리고 사비나라는 자신과 전혀다른 존재를 추구하며 새로운 자신을 찾으려 했다. 결론적으로 그의 그러한 시도는 절반만 성공했다.

그가 믿었던 대장정은 결국 허구였고 결과적으로 그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된다. 대장정은 허울뿐이었고 어떠한 사람도 대장정에 진심인 사람은 없었다. 단지 구호만을 외치고 사람을 감동시키기 위한 운동일 뿐 실제로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러한 모순을 죽음으로 깨닫게 된다. 그야말로 공산주의를 비롯한 현대에도 여전히 진행중이 대장정의 모순과 위선을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캐릭터가 프란츠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후 그의 의사와는 상반되게 그는 결국 자신이 처음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곳은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사비나가 배신했던 곳이다.

시몽

토마시의 아들이라는 시몽은 매우 신기한 캐릭터다. 마지막에 가서는 겉으로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 안정을 찾은 것 같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 같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동경을 평생 품고 살아왔다. 아버지에 대해 멋대로 상상하고 아버지를 신성시하며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기자를 도우며 사회운동을 했고 아버지의 사회운동에 대한 미참여를 보고 사회운동에 대한 혼란을 느끼며 결국 사회운동을 벗어나 현실에 적응하며 살게된다.

시골에 가서 살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상상에 기반하여 지속적으로 연락하여 접점을 만들고자 했다. 어찌보면 시몽은 너무나 이해가 되는 캐릭터이다. 어린 사람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마음대로 상상하고 부풀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시몽은 인물 중 사비나와 함께 살아남는다. 이를 그가 젊기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는 시몽은 진정한 안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시골로 돌아간 토마시-테레자와 달리 시골에서도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하고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찾으려 했기에 그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였다. 사비나 또한 모순된 일상 속에서 혼란을 여전히 겪고 있었다.

카레닌

개인적으로 카레닌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동물보다 못하다. 동물보다 복잡하지만 결국은 동물과 같은 것을 추구하면서 멀리 돌아오는 존재이다. 개의 삶은 인간보다 훨씬 짧다. 짧은 카레닌의 삶은 단순히 반려견이라기 보다는 모든 주인공의 삶의 무상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외계인이 본다면 우리의 삶 또한 매우 짧을 것인데 왜 우리가 개와 다른가. 창세기 구절로 시작한 챕터에서 인간의 특별함을 지우며 인간과 개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결국 모든 주인공들이 매우 혼란스러운 일생을 살아왔지만 카레닌과 같이 안정을 추구한다. 카레닌은 극 중 초반부터 안정된 상태로 그 상황에 적응하여 살아왔지만 극 중 인물들은 매우 복잡한 삶을 살다가 결국 카레닌과 같은 안정을 찾고 곧 죽음을 맞이한다. 이처럼 개와 사람은 다르지 않고 오히려 동일한 목적을 지닌 존재라 할 수 있다.

사람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이다.

주인공들은 정말 말도안되게 커다란 혼란을 고민한다. 키치에 대한 배신이 그러하고 대장정에 대한 회의가 그러하다.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한 고민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본질, 사회의 본질과 같은 것을 고민하는 것 모두 거대한 혼란에 대한 고민이다. 이런 고민의 끝은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조그만 카레닌과 같다. 삶의 모습이 어떤 방식이든 그 사람이 추구한 이상이 무엇이든 결론은 사과 나무 아래 네모난 흙더미가 그의 마지막이 된다. 그래서 사람은 정말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는 것 같다. 결국 어떤 사람이든 같은 모습으로 끝이 나기에, 끝에 가서야 이를 깨닫는 존재이기에 그러한 거 같다.

그럼에도 사람은 위대하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명예를 쌓아도 이는 말일 뿐 끝을 바꿔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나누며 전해왔다. 그 결과가 이 세상이다. 21세기의 발전한 문명이 그 증명이다. 물론 여전히 혼란스럽고 갈등하며 결론을 못 내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진 않는다. 한 개인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혼란은 전해지고 발전한다. 그것은 위대한 것이다. 유한한 삶에서 영원한 혼란을 낳은 것이다. 자신의 존재는 잊혀질지 몰라도 어떠한 과거의 가벼운 존재가 떠올린 생각, 혼란은 남아 세상에 전해진다. 그렇기에 인간은 개와 다르고 가벼운 존재지만 동시에 위대한 존재가 된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것은 5-6년 전이다. 당시 참여 중이던 독서모임의 발제도서였고, 항상 그래왔듯 다소 억지로 읽어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때 처음 책을 구입하면서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가끔 헷갈리는, 그 당시의 최대 궁금증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까?

말장난일지도 모르지만, 책의 내용에 비춰봤을 때 어느 하나라고 단정 짓지 않아도 무방하지 않나싶다. 만약 작가가 의도한 부분이라면 그때 이미 천재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 틀림없다. 그 당시에는 독서량도 지금처럼 안정적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책을 읽는 거 자체가 곤욕이었기 때문에 어떤 책이든 읽기 어려웠던 터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모임 날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테레자, 토마시 등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하면서 결국에는 우리의 삶과 사랑으로 대화가 흘러갔던 것 같다.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까지 읽은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나는 분명 어떠한 지적호기심이나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번 지정도서로 결정되고, 오랜만에 낡은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서 첫 장을 넘겼을 때 스쳐 지나간 그때의 감상을 다소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스스로를 상처 많고 여린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이기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자존감 낮은 피해망상자들의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였다. 아마 5년 전의 나는 지금보다 좁은 시야와 단호한 자기주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나는 이 책이 재미있었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1년의 1권의 책을 읽을까말까 하다가 우연을 계기로 독서를 습관화하면서 매년 꾸준하게 어느 정도의 독서량을 유지하게 된 후에는 소설, 수필, 고전문학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 판단하건데, 정독보다는 속독을 추구하고, 옛날 문체가 잘 읽지 않는 나에게 이런 책들은 젬병이었고, 그것은 내공의 부족이고 내가 ‘멋’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독서’는 즐거움이나 취미생활보다는 ‘지적호기심’을 채우는 수단이고, 공부의 일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도서의 대부분은 경제경영, 인문사회, 창업투자 혹은 재테크 카테고리에 속해 있으며, 최신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베스트셀러를 탐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잠시 머리를 쉬어가는 여정이자, 보다 흥미로운 책이기를 바랬다. 물론 두 번째 독서였지만, 그래서 더 재미없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이 책을 펼쳐놓고 다른 책을 읽었을까.

인류가 사랑한 작가와 세계가 인정하는 고전문학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작가의 특유의 문체와 현대의 드라마 같은 사건구조로 우리의 삶과 ‘사랑’에 대해 담담하게 풀어낸 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으며, 사랑은 유치하다. 그래서 이 책의 이야기들은 불편하면서도 유치하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흠칫 놀라면서도 흥미로웠던 부분은 책에 메모들이 되어있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 나는 책에 생각을 정리하거나, 혼자만의 질문들을 적어놓곤 했는데 지금 보니 웃기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책을 읽을 당시에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토마시’를 ‘테레자’를 대입하면서 읽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주인공들의 상황과 생각을 공감하거나 이해하려고 한 노력들이 엿보이며 동시에 치를 떠는 부분들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러쿵저러쿵해도 나의 그때의 연애와 그이후의 연애사에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

얼마 전 팟캐스트를 듣다가, 스타트업과 흥미로운 아이디어제품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자신의 운동기록을 피드할 수 있는 스마트헬스케어제품에 대해 진행자가 인간의 돈과 시간은 대부분 ‘타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쓰이는 것’같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에 크게 공감하는 바이며, 그런 점에서 ‘나를 사랑해?’ ‘얼마나 사랑해?’와 같은 질문이나, ‘내가 하반신불구가 되어도 내 옆에서 변함없이 사랑할거야?’라거나 ‘재벌3세 미녀가 대시를 해도 흔들리지 않을거야?’와 같은 질문은 필시 질문 그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 상대방에 대한 인정욕구가 표출된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내가 그런 질문을 너무 공대생적인 마인드로 대처했기 때문에 사소한 언쟁과 다툼이 있었고, 아직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선한 거짓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욕구가 표출된 장면들이 여럿 있었는데, 결국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욕구들은 결국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생존’을 위해 사회적인 동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가 만들어낸 집념일까?

진화심리학에는 ‘자살’을
번식과 진화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도태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의 표출로 보는 ‘견해’가 존재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인정받으려는 것이 아닐까.

테레자는 끊임없이 토마시의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면서 확인받고 싶어하고, 토마시는 그런 테레자를 부담스러워하고, 버거워하면서도 끊임없이 갈망하고 그녀에게 되돌아간다. 전반적으로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바라는 수동적인 존재이면서,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고 보살피지만 상대방에게서 모성애적인 사랑을 바라는 것처럼.. (마치 남자는배 여자는항구?와 같이) 묘사되었다고 느꼈는데 그러한 시각이 불편하면서도, 시대적 상황과 주인공의 특색을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책을 또 한 번 읽으면서 든 확인한 생각은 인연, 운명적인 사랑은 있지만 노력을 통해서도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점과 우리는 매력적인 사람이고 싶어 하고, 상대방에게서 나의 존재와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하면서 어느 정도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점 그리고,

‘결국 자존감과 자기이해도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게 된다는 점’

– 인상깊은 글귀 –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이미 추억이 된 그시점이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 없는 질문이다.’

‘대답 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