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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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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직장 상사인 달리오씨(저자: 레이 달리오)는 어떤 사람 같아요?

A: 음 , 좀 치밀하고 집요해서 정이 안가고 일을 같이 하다보면 좀 갑갑하지만 막상 만나 뵈면 공정하고 개방적인(여기서 ‘개방적이다’ 라는 말에는 배려가 포함) 분이셔서 퇴근 후 술자리에서 뒷담화는 못하겠어요. 양심상.

원칙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원칙주의자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당신의 상사가 원칙주의자라면 어떨 거 같은가? 주변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도 FM이라고 하지만 ‘원칙’, ‘원칙주의자’ 등의 단어에 대해 편안한 느낌을 가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원칙이 무시되면 불공정이 발생하고 정의가 무너지겠지만 원칙대로 사는 사람보단 유연한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성공의 이유가 원칙 때문이라고 한다.

고통을 경험할 때 자신을 성찰하라-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들어라(p.464)

책을 읽다보면 저자인 레이 달리오의 원칙은 ‘원칙을 세우기 -> 문제발생 -> 문제의 원인 고찰 -> 원칙을 수정하고 더 구체화시키기&원칙이 더 늘어남’의 수순을 따른다. 원칙이라는 단어와 함께 책을 읽으면서 눈에 띄었던 화두는 ‘성찰’이다. 이는 그의 원칙을 좀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는 고루한 원칙주의자라기보다 공정성에 바탕을 두고 확장·변화할 수 있는 ‘원칙’을 말한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변하면 그게 무슨 원칙인가 싶겠지만 성찰하는 자세를 바탕에 두고 있기에 생산적이면서도 다른 이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원칙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 달리오 특유의 원칙은 그가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 저자의 인생회고가 책의 전반부에 배치되어 있고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책을 읽으며 레이 달리오라는 사람을 자꾸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가 대단해보였다가 너무 갑갑하고 틈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가 능력은 인정하지만 친해지고 싶지는 않았다가 여러 방향의 생각들이 들었지만 결국 ‘달리오는 그래도 좀 괜찮은 사람’ 이라고 결론 내린 이유는 그가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였다.

‘성찰한다’는 행위는 자신의 약점을 똑바로 바라보고 이를 받아들이며 발전의 계기로 삼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성찰하기 때문에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타인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책 내용 전반에 ‘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관점을 이해하라’거나 ‘극단적으로 개방적으로 되어라.’라는 제언이 나오는 이유도 그가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책의 제2부 4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뇌는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을 이해하라’는 내용을 흥미 있게 읽었는데 신경과학 전반을 아우르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의 내용 전부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내게 크게 도움이 되는 부분이 없어 보였다. 저자는 경제·경영 분야의 사람이고 나와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기에 그랬기도 했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전달하려는 콘텐츠가 좀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개발서를 잘 읽지는 않지만 지난번 읽은 『아주 작은 습관의 힘』같은 경우는 도달코자 하는 목표를 제시하고 그에 이르는 방법까지 자세히 나열했지만 『원칙』은 그저 명제들을 나열해놓아서 다소 장황해 보였고 두루뭉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이 길게 나열만 되어있어서 그런지 2부 이후부터는 약간 잠언집(잠언: 가르쳐서 훈계하는 말)을 읽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잠언집이 나쁘다기보다는 이 같은 경제·경영 자기 계발서를 읽는 이들은 성공 혹은 경영·경제 분야와 관련한 정보를 얻고자 읽을 것 같은데 본 도서는 그런 기대에 좀 못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들었다는 의미이다. 한 줄평을 ‘3 in 1-자서전+잠언집1,2’라는 식으로 적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앞선 부분의 자서전을 읽으면서는 어린 나이부터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 열정적으로 임하며 삶의 모든 방향을 자신의 목표에 맞춘 한 인간에 대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자신의 실수나 약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서 성숙해보이기도 했고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중반부 이후부터는 목표를 향해 달리면서도 꾸준히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를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책 한 권 쓰기도 힘든데 700쪽이 넘게 쓸 수 있는 능력도 여러가지 의미로 대단했다.

책 페이지수가 700쪽에 이르고 종이책 실물을 접하면 중량도 상당하지만 생각보다 쉽게 읽은 책이고 나름대로 배울 점이 많은 책이었다.(나름대로 라는 말을 붙인 이유는 나는 지정도서가 아닌 이상 자기개발서를 잘 읽지 않아서 평 자체가 좀 박하기 때문이다.)

[ 한줄평 및 별점 ] ★★★☆☆ ( 3점 / 5점 )

3 in 1(자서전+인생 잠언집+경영 잠언집)

[ 인상 깊은 문구 ]

실패에 대해 반성하면서 파산하지 않고 성공하고 싶다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p.63

이후 수년 동안 내가 만났던 크게 성공한 사람들 대부분이 고통스러운 실패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은 큰 실패를 통해 자신들을 성공으로 이끄는 교훈들을 배웠다. 스티브 잡스는 1985년에 애플에서 해고당한 일을 되돌아보면서 “그것은 정말 먹기 싫은 약이었다. 하지만 환자에게 필요한 약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삶이 당신의 머리를 벽돌로 내리치기도 한다. 하지만 신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해준 유일한 힘은 내가 한 일을 사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p.66

책임자로서 최고의 성공은 자신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다음은 자신이 일을 잘하는 것이다. 최악은 자신이 일을 못하는 것이다. p.120

진실(보다 정확하게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p.190

당신이 약한 분야에 강점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기술을 반드시 개발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보호난간을 만드는 것이다. p.233

직접 말하지 않을 것이라면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마라. 면전에서 직접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면 사람들을 시험하지 마라. p.434

사람은 서로 다르게 창조됐고, 관점과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각자에게 적합한 일이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p.533

책을 읽던 초반과 다 읽은 이후의 평이 많이 달라졌던 책이다. 독서 초기에 자기계발서이면서 베스트셀러였다는 책의 스펙은 내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자기계발서는 결국 성공이라는 결과를 두고 역으로 성공요건을 끼워 맞추는 데 그치고 말며,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성공이란 아주 지엽적이고 특정한 가치만을 추켜세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그 책이 나에게도 베스트셀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은 결과만 두고 따지지도 않았고 특정한 모습만이 성공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좋은 습관을 익혀 저마다 자리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세심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라며 강요하지도 않았다. 저자가 말하는 습관이란 반드시 어떤 경제적인 혹은 사회적인 요건, 자신의 커리어를 최상으로 높이기 위한 데 있지 않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때로 ‘휴대폰 덜 보기’같은 사소한 것이다. 이 같은 사소한 목표이더라도 달성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었다.

책의 전체적인 논리는 단순하다. ‘사소한 습관이 모여 결국 성과를 만든다.(그러니 지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 이는 따지고 보면 너무 당연한 소리다. 하지만 이 단순한 논리를 심리학이나 과학의 이론을 토대로 타당성 있게 설명하고 있어 신뢰가 간다. 습관 형성을 위해 제시한 원리나 모델도 정확한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고 세밀하고 꼼꼼히 검토한 태가 난다. 저자는 책을 쓰기까지 열정적이고 전문성 있게 연구를 했을 것이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서평을 쓰면서 이 책에서 소개하는 습관을 형성하는 요소, 방법, 습관 형성 모델 등을 낱낱이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요약한다고 해서 될 종류의 책이 아니고 글의 전후 맥락을 따지지 않는다면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냥 좀 다른 의미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소개하면서 서평을 맺고자 한다. 다른 의미라고 조건을 붙였지만 책의 핵심주제를 담고 있기도 하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한 가지 정체성을 지나치게 붙잡고 있으면 결국은 부러진다.”는 메시를 전한다. 가령 ‘난 대단한 군인이야’라고 하기보다 ‘나는 단련되고 믿을만하고 팀에서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라는 것이다. 어떤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다른 것은 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리라는 다른 책의 메시지와 다르다. 진정성이 느껴졌고 필요한 태도라는 판단이 들었다.

열정을 다하고 끝없는 노력을 해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은 세우고 그들이 했던 뼈를 깎는 노력을 나열하는 글을 읽다보면 ‘삶’이 지워진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나는 결국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이어져야 하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저자는 어떤 목표 그 자체보다 자신을 잃지 않고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한 가지 정체성을 붙들고 있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장의 소제목은 ‘다른 삶에도 길은 있다’이다. 읽기에 따라 패배한 자의 변명 같을 수 있지만 위와 같은 자세가 오히려 더 나은 삶을 위한 지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모습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끝없이 변하는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한 가지만 물고 늘어지기보다 가능성을 열어놓고 적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연한 정체성 형성을 위해서는 끝없이 자기인식을 하는 태도가 필요한데 이는 내가 평소 중히 여기고 관심을 갖고 있는 ‘성찰적 태도’와도 연관이 있었다.

평소 책을 구입해서 읽지는 않는 편이다. 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고 학습을 위한 도서가 아닌 이상 여러 번 들춰볼 일도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만큼은 구입해서 찬찬히 읽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무언가를 빠지지 않고 하고는 있지만 방향성을 잃은 내게 필요한 책이다.

[ 한줄평 및 별점 ] ★★★★★ ( 5점 / 5점 )

SJ성향의 사람이 꼼꼼히 분석한, 활용 가능한 습관 안내서.

[ 인상 깊은 문구 ]

본질적인 동기가 최종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습관이 정체성의 일부가 될 때다. “나는 이런 것을 ‘원하는’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p.55

일상적인 습관 목록을 만들고 그 습관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그렇지 않은지 비교해보기.(인용은 아니지만 좋은 방법 같았다.) p. 95

나쁜 습관은 그 자체로 촉매가 된다. 그 과정 자체가 서로의 촉매가 된다. 이런 습관들은 무감한 상태를 조성해, 잘못하고 느끼면서 정크푸드를 먹고, 정킆드를 먹으며 잘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게을러졌다는 기분을 느끼고, 게을러졌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더 본다. 건강에 대한 염려로 불안해지고, 불안해졌기 때문에 담배를 피운다. 건강은 더욱 나빠지고, 더 불안해진다. p. 131

우리의 습관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욕망의 현대판 해결책이다. 한마디로 오랜 악덕의 새로운 형태다. 인간 행위의 기저에 딸린 동기는 여전히 똑같다. 다만, 우리가 행하는 특정한 습관들이 시대에 따라 다를 뿐이다. p. 170

인생은 반응으로 이뤄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예측으로 이뤄진다. 하루 종일 우리는 지금 막 본 것이나 과거에 잘됐던 일에 기반 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최선일지 추측한다. p.172

습관은 자동적으로 의식적인 결정들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 하나의 습관은 단 몇 초 만에 완성될 수 있지만 이후 몇 분 또는 몇 시간 동안 우리가 취할 행동을 결정한다.(…) 배가 부른데 군것질을 계속 할 수도 있다. ‘잠깐’ 휴대전화를 확인하려고 하지만 곧 휴대전화 화면에 20분 동안 달라붙어 있다. p. 208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최소의 기분과 욕구로도 행동에 나선다. 아주 조금만 배가 고파도 음식을 문 앞까지 배달시키고, 아주 조금만 지루해도 SNS의 광막한 숲속에서 길을 잃는다. p. 224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했을 때 빨리 되돌아온다. 빨리 회복한다면 습관이 무너진 것은 중요하지 않다. p. 225

한 가지 정체성을 지나치게 붙잡고 있으면 결국은 부러진다. 한 가지를 잃으면 자기 자신 전체를 잃는 것이다. p. 311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 (p.98)

사랑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위의 질문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단연코 후자이다. 그러므로 이상형이 어떠한지를 묻는 친구들의 질문 앞에서 침묵한다. 그가 베토벤 머리를 하고 왔을 때는 매력을 느꼈지만, 지하철 안 불특정 인물을 보면서는 ‘이발을 좀 하시지.’ 라고 생각했다. “공대생이 좋아.” 라고 했지만 들어맞지 않는 케이스가 많아서 자꾸 조건을 붙였다. “대학원생이어야 해, 논문에 수식(數式)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어.” 등. 외모나 신분 같은 속성이 아름다움을 낳지 않는다. 그 사람이어서 그마저도 아름다운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야기’였지만 약간 지루하게 읽었다. 어떤 부분은 과하게 현학적이라고 생각했고, 내용이 늘어지는 부분이 있었고, 문장도 매끄럽지 않았다. 책 초반부에 ‘나’가 클로이에게 빠져서 설레는 감정들을 풀어놓을 때는 ‘저렇게 해서는 사랑이 곧 끝나겠는데?’하고 추측했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렸고, 드라마를 보듯 결말을 예측했다. 그리고 이내 ‘사랑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게 읽을 수 있다는 데에 놀랐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상대에게 빠져들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

물론 사랑의 형태가 한가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커플의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무르익어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을 시작할 때는 감정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필자의 친구는 단지 음식취향이 맞아서 만남을 지속했다. 2년이 훌쩍 넘도록 연애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서로 사랑이 깊어졌나 보다. 드라마나 문학작품에서 연애나 사랑을 다룬다고 하면 약간 낮추어보는 이들도 있지만 꼭 그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드라마 주제곡에도 나왔듯이 인간사 모든 것은 사랑 때문이다.

책에서는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다루지만 내용은 상당히 철학적이고 깊이가 있다. 연애라는 소재 하나를 가지고 인간관계 전반을 고찰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챕터를 읽으면서도 사고가 확장되어서 그 생각 하나를 가지고도 에세이 한 편을 쓰고도 남겠다고 생각했다. 300페이지에 달하는,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별로 재미는 없는 책을 건너뛰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책 안에 삶을 이루는 원리가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자아를 성찰하고,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대한 통찰한다. 연애감정을 소재로 인간관계에 대해 이토록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저자가 존경스러웠다.

책을 읽고 나면 늘 느끼는 바이지만 책도 아는 만큼 읽힌다. 내용이 지나치게 현학적이라고 했지만 그 안에서 다루는 철학개념에 좀 더 조예가 깊었다면 더욱 깊이 있게 읽었을 것이다. 특히 ‘사랑의 언어’를 다루는 부분은 소논문 한 편으로도 엮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인간의 심리에 대해서도 매우 깊이 있게 다뤄서 저자가 심리학을 전공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클로이와 부모님의 관계나 클로이의 인형인 ‘구피’에 대해 풀어낼 때 특히 인상 깊었다.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을 때 읽어볼만한 책이다. 그냥 사랑이야기 그 이상이다.

[ 한줄 평 및 별점 ]

★★★☆☆ ( 3점 / 5점 )

두뇌가 명석한 사람의 연애일기 – 사랑의 철학적 고찰

[ 인상 깊은 문구 ]

  • “사람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p.19
  •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후략) P. 23-23
  • 우리는 타락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p.59
  •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는 경우에 타인의 애정을 받으면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 든다. p.63
  •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중략)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p.65-66
  • 그녀는 언어의 손에 의한 배신을 경험했다. 내밀한 말이 널리 통용되는 말로 바뀌어버리는 것을 보았다. p.107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즈음이나 읽고 난 지금이나 웬일인지 마음이 차갑다. ‘책에서 말하는 대로 살아봤자 별 거 없더라.’, ‘구구절절 다 어디서 들었던 말들이다.’, ‘나도 이런 생각쯤은 많이 하고 산다.’ 등 책의 내용마다 근원모를 불평을 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려고 하던 사람인데 내가 왜 이렇게 차가워졌을까, 나도 참 부정적인 사람이구나.’하는 반성도 했다.

책을 다 읽고 서평 준비를 하다가 책을 읽는 내내 툴툴거리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았다. 현재를 살지 못하고 과거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과거의 좋은 기억보다는 좋지 않았던 일들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책에서 주는 메시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책에서 좋은 얘기를 해줘도 아닌 경우도 있다며 부정적인 사례들을 찾아내서 들이밀었다. 소모적이었고, 책에서 말하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자세였다.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부분을 찾고 그에 따르는 생각들을 적어나가며 읽었다. 책은 여러 주제를 담고 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공감했던 부분들도 저마다 다를 거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번 서평을 작성하면서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통으로 글을 쓰기보다 깊이 공감했던 내용이나 구절을 나열하고 그에 따른 생각들을 정리해서 적어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결과에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p.31.

저자는 저 질문에 대답을 하면 자신의 삶에서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만약 물건을 훔치겠다고 대답한다면 충분히 갖지 못한 일을 원망한다고 해석해도 좋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의미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학생시절 세상이 모범적이라고 여기는 기준을 따라 살아왔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습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가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삶을 너무 촘촘하게 쪼개어 살았고 규칙을 따르며 살았다. 세상의 규범을 익히기 전의 나는 무엇을 원할까?

책을 처음 읽을 때는 화가 좀 나 있었는지 독설을 하거나 화를 표출하고 싶다고 답을 했다. 책을 다 읽기 전 질문을 다시 보면서는 아무 책임감이나 부담감 없이 무위도식을 하고 싶다고 썼다. 내일의 생활을 따지지 않고 막 살아보고 싶다는 뜻이다. 늘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과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위의 두 대답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하게만 응답할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기에 훌륭한 질문이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인 방법을 사용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어차피 판이 주어져도 하지 못할 성격이다. 이후 책에서 언급되지만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마주할 줄 알아야 한다. 부족한 부분을 찾아 건전한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보다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삶은 당신 자신 안에서 나와야만 합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발견한다고 해서 인간관계나 책임감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습니다. p.69.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털어놓긴 조금 부끄럽지만 20대 중반까지의 나는 내내 누군가 내 삶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며 살았다. 대상은 학교나 학원 선생님이 되기도 했고 친구 혹은 선배, 사랑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 조금만 잘해주고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싶으면 상대방이 나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나름대로 충분한 사랑을 주셨지만 기질 상 예민했던 나는 좀 더 민감한 케어가 필요한 어린이였다. 가정 안에서 비롯된 결핍을 느끼며 다른 누군가 온전한 사랑을 주기를, 전적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이성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줄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기대했다. 허나 서로 간에 균형이 깨진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다. 깨진 관계에서 다시 상처를 받고 내 안으로 점점 파고들었다.

백마 탄 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인관계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친구 사이든 연인 사이든 둘이 서로 온전하게 서서 걸어야 건강한 관계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기대있는 모양으로는 관계가 지속되기 힘들다. 물론 힘들 때는 기대도 좋다. 하지만 고질적이고 지속적인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바로 서지 못한다면 살아가는 동안 같은 자리에서 다시 넘어지는 일을 반복한다.

어제의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크나큰 자유가 있습니다. 그때 더 이상 과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샤워를 하며 어제의 때를 씻어 내지만, 어제 느낀 감정의 찌꺼기는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상대방과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과거의 문을 닫지 말고 가끔씩 그 문을 들여다보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p.141.

글을 시작하며 최근 기분이 다운되었다고 썼다. 현재의 기분을 좋지 않게 한 원인은 모두 과거에 있었다. 누군가가 한 행동이나 말을 곱씹으며 다시 상처받는 일을 자처했다. 내면의 공책 안에 기분이 나빴던 일들을 적어두고 틈날 때마다 들춰보며 다시 상처받았다. 얼마 전 개인 글쓰기 플랫폼에 글을 쓰면서도 깨달았다.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한 사람의 기준을 마음에 새기고 무려 5년 가까이 매여 있었다.

물론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사는 일은 쉽지 않다. 과거의 상처를 자꾸 들춰보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비롯된 아픔이 치유되지 않았고 억울함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거나 글쓰기를 하면서 묵은 감정을 해소하는 정도는 좋지만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해 현재를 갉아먹게 해서는 곤란하다. 타고난 성격 상 현재보다 과거에 머무는 나는 더욱 신경 써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평소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던 부분을 책에서 짚어주니 좀 정리가 된 기분이었다. 아침마다 샤워를 하며 묵은 때는 씻어내면서 감정의 찌꺼기는 왜 벗겨내지 않느냐는 비유가 적절했다.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기분이 나쁘다.’거나 ‘자고 일어나니까 어제 당한 일이 더 기분이 나쁘다.’ 등의 푸념들을 적절히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씨름하는 가장 큰 역설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자신의 어두운 면, 그림자가 드리운 면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리의 ‘어두운 면’을 내쫓아 버릴 수 있다는 믿음은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반대되는 힘들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p.249.

불행의 시작은 신 혹은 천사가 되고자 하는 헛된 욕망에서 온다. 인터넷에 이름을 치기만 하면 나오는 촉망받는 종교인이 있다. 그의 말을 듣거나 글을 읽는 것만으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이다. 그는 글 안에서 늘 자신을 하찮게 표현한다. 겉으로만 봐서는 완벽한 사람이지만 좀 더 깊이 알고 지내며 그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정도였다.

후배에게 막말하는 일을 밥 먹듯이 하고, 숨도 쉬지 못하게 휘어잡는다. 곁으로 와서 조언을 해도 될 것을 부러 옥상까지 올라가 후배에게 소리를 친다. 심리적으로 위압감을 주기 위한 처사이다. 함께 지내는 이들은 어지간한 정신으로 버티지 못한다. 심리적으로 쇠약해져 남모르게 치료를 받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가 하는 말을 지속적으로 들어보고 또 하는 행동을 오래 보면서 깨달았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큰 사람이었다. 늘 흠결 없이 깨끗하기를 바랐다. 세심하게 성찰을 하고 자신을 갈고 닦을 줄만 알았다. 선이라 여기는 가치와 반대되는 것들에 지나치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나머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관대하지 못했다.

흠결 없이 깨끗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다. 신 혹은 성인(聖人)이나 천사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한 결벽에 대한 집착이 건강하게 발현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자신을 갉아먹고 공동체와 이웃을 망가뜨린다. 하지만 그들이 갈망하는 무결함도 신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독교의 교리로는 그렇다.

뜬금없이 특정 종교의 교리를 가지고 왔지만 귀기울여볼 법한 내용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 만화에는 꼭 악당과 천사가 등장했다. 악당은 늘 나쁘기만 하고 천사는 착하기만 해서 선한 편이 악을 물리칠 때 환호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만화 프로그램이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는 세상에는 전적으로 선한 사람도, 전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이다. 선악이 뚜렷한 어린이용 만화영화보다는 인물의 내면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해내는 영화가 좋다. 자신의 완벽함만을 늘어놓는 이보다 부족한 점이 좀 있는 사람이 좋다. 좀 극단적이지만 술 한 잔을 마셔도 ‘죽음에 대해 한 번 쯤 생각해본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죽음’을 생각해봤다는 건 적어도 자신의 어둠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테다.

마무리

저자는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전제하고 글을 이어나간다. 우주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신일 것이고 책의 내용으로 보아 기독교의 신일 것이다. 한때 믿는 종교가 있었지만 그야말로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를 고수하는 나로서는 무조건 공감만 하며 읽을 수는 없었다. 책의 내용에서 앞뒤가 안 맞거나, 읽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엇나간 판단을 할 위험이 있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덱스가 가득 찼다. 찾아놓은 내용들을 곁에 두고 계속 보면 나의 삶이 또다시 불안과 부정으로 가득 찰 때 이전보다는 빨리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삶을 건강하게 가꾸어가는 데 필요한 책이다.

한줄 평 및 별점 ★★★★☆

‘냉소적인 인간’이 될 작정을 하고 읽다가 내용 발췌만 잔뜩 한 책

인상 깊은 구절

우리들 각자에게는 간디부터 히틀러까지 모든 인물의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모든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모습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p.26.

인위적이고 멋진 모습들로 진정한 자신을 가리고 있는 사람보다는 그 자체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 사람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p.34.

우리들 대부분은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은 대개 ‘보상’에 불과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공부를 잘하고, 할머니께 웃음을 보이고, 손을 잘 씻으면 ‘사랑받을’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이 조건적인 가짜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사랑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사랑이 그토록 많은 것들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대체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자신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p.49.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며 이미 저지른 행동을 후회하거나 자신을 학대합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실수를 했다면 당신은 “걱정 마. 누구나 다 그러는데 뭐.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냐.”하고 위로의 말을 건넬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똑같은 실수를 범하면 스스로를 쓸모없고 실패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오히려 남에게 더 관대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스스로에게도 친절하고 너그러워지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p.50.

우리가 밤하늘을 보는 것은 말 그대로 과거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경험하는 것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p.139.

당신이 하는 행동 중에서, 어떤 것이 당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어떤 것이 절망을 배달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p.250.

[ 한줄평 ]

저자가 말하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한 상태로 읽었다.

[ 서평 ]

글을 시작하면서

Q: ‘테슬라는 과연 자동차 산업계의 서브웨이(고객맞춤 샌드위치)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인가?’

A: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책을 읽기 시작한 것부터가 늦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자책을 구입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디지털 현실에 적합한 읽기 방식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모호하고 맥락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최첨단 기술과는 너무 먼 분야를 전공으로 선택하고 접하는 사람이다. 무지에서 기인한 사태라고 생각해본다.

읽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디스토피아를 상상하며 읽기도 했다. 책에 덧붙인 인덱스의 대부분이 ‘하지만-’으로 시작했고 의구심이 담겨있었다. ‘나는 진정 불안에 잠식되어 있고, 보수적이며 꽉 막힌 인간인가?(혹시 꼰댄가?_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꼰대)’라는 생각을 내내 했다. 인간. 반성. 두려움. 의구심. 약간의 낙관. 이 다섯 가지가 책을 읽고 한 생각의 집합이다.

인간_인간의 자리는 어디일까?

책을 읽으며 여러 고민들을 적었다. 서평을 위해 모아보니 그러한 고민들은 모두 ‘인간’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가장 기억에 남았던 개념은 ‘디지털 쌍둥이(Digital Twins)’였다. 이러한 기술이 사물에 쓰이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인간에게까지 도입된다고 했을 때는 우려를 했다. 좀 철학적인 생각도 했다.

디지털 쌍둥이는 공간조차 차지하지 않고 화면상에만 존재하는 대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대상을 접하게 될 인간은 이전과 똑같이 자기인식을 하게 될까? 가끔은 사진 속의 ‘나’를 보아도 낯설 때가 있는데 화면상에서 ‘수치화되고 객관화된 나’를 보는 기분은 어떨까. 태어날 때부터 그런 현실을 접한 인간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꿈에서 대상화된 나자신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서 좀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꿈에 그대로 나온다. ‘현실의 나(A)’는 ‘꿈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나(B)’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때론 ‘나B’가 평소 습관에 따라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본다. ‘나(A)’는 앞으로는 저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디지털 쌍둥이’를 갖는 것도 이런 느낌일까?

좀 더 깊이 생각해보자. 책에서 나열된 내용은 디지털 쌍둥이를 통해 몸의 이상이나 변화를 감지하는 차원이다. 그러나 기술이 더 발달하여 인간의 감정까지 수치화해서 보여줄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재의 내가 어떤 감정을 얼마만큼 느끼는지 보여준다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오히려 더 혼란스럽지는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감정을 느끼는 일을 인간 고유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술과는 동떨어져 살고 있는 나는, 기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내가 느끼는 대로 살고 싶었다.

저자는 계속해서 초연결 사회가 되면 효율성이 크게 증가할 것이라는 진단을 한다. 책의 서두에 소개된 쓰레기통은 통이 다 차면 알아서 알려준다. 노동자가 아직 비울 필요가 없는 쓰레기통까지 가는 수고를 줄인다. ‘세넷’에서는 남은 기름의 양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기름 운송에 효율성을 더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공장에서는 각 공정에서 문제 상황이 발생하기 이전에 장치에 부착된 센서가 이상을 감지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일까? 당장 펜실베니아 공장 노동자의 수는 2000명에서 800명으로 줄었다. 숙련공에게 기계의 이상을 감지하게 하는 위험을 떠안느니 IoT를 어서 도입하라고 한다. 저자는 한참 기술 이야기를 하다가 끝에 가서 ‘그래도 인간은 필요해.’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소외될 인간과 해고된 노동자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

기업가 입장에서 노동자의 사정까지 고려할 의무가 없다는 반박이 나올 수도 있다. 해고된 1600명의 노동자는 불성실했던 것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같은 노동자들도 일은 성실히 하지 않고 월급만 챙기던 동료들을 달가워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물러서서 생각해도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

물론 사용자의 운전습관을 분석해 보험료를 책정하는 시스템이나 심전도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카리마’의 도입은 환영할만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여전히 의구심이 든다.

의구심_과연 낙관적이기만 할까?

저자는 계속해서 낙관적으로 미래를 전망한다. 하지만 정말 낙관적이기만 할까? 기술의 발달을 이야기할 때 늘 등장하는 문제는 비용과 빈부격차 문제이다. 늘 나오는 이야기이므로 불필요하다는 반응은 곤란하다. 기술이 아무리 상용화되어 단가가 낮아진다고 해도 소외되는 이들은 발생한다.

‘버터플라이 IQ’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논의를 하면서 ‘누구나 갖고 있는 영상장치가 있는데 그건 바로 스마트폰이다.’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따졌을 때 ‘누구나’에 속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 스마트폰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가진 자만을 위한 기술’인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과연 저자의 말대로 포도농장과 굴 양식장에까지 속속들이 IoT기술이 들어올 수 있을까? 그것도 10년 안에? 방향이 좀 다르지만 최근 도입된 키오스크 사례를 들어보겠다. 키오스크 도입은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는데 그에 따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게 나타난다. 노인들은 이미 주문에서 소외되고 있으며 비교적 적응력이 빠른 젊은이들도 종종 어려움을 느낀다. IoT기술을 따라잡는 소수와 그렇지 않는 이들 사이의 간극은 무엇으로 좁힐 수 있을까?

초연결 사회가 되면 기업들이 정보공유를 활발히 하여 누구나 필요한 정보 안에 접근할 수 있다는 내용도 지나친 낙관론처럼 보인다. 과연 기업 경영자들은 정보공유를 하려들까? 그들이 전 직원에게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이유는 기술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에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결국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늘 합리적인 선택만하는 존재가 아니다.

기술에 대한 두려움_안전한 건가요?

한편으로 드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이는 앞서 밝힌 의구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내내 낙관적인 전망을 하지만 개인정보 유출에 있어서만큼은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기업이 고객의 개인정보유출문제를 소홀히 다룬다면 기업은 더 이상 고객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고객은 개인정보 유출에 공포까지 느낀다고 했는데 저자에게 처음으로 공감했다.

개인정보 유출은 내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너무 꽉 닫힌 사람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정보가 새어나갈 가능성이 0.0001%라도 있다면 차라리 불편을 감수하는 편을 택하겠다. 특별히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다. 그저 ‘나’라는 인간이 원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도 유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초연결로 모든 정보가 연결된 이후라면 정보유출피해는 더 심각해진다.

무지에 대한 반성

앞선 논의들을 부정적으로 이어왔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저자를 비판만 하면서 읽은 것은 아니다. 다른 장르의 책을 읽을 때보다 더 자아성찰을 하면서 읽었다. 착한 독자가 되어, 저자가 ‘디지털 트윈스의 영상을 보고 책을 읽으라.’고 하면 그대로 따랐다.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동안 ‘기술이 저렇게 발전하는 동안 나는 뭐하고 살았지?’라는 생각을 했다. 디지털 트윈스까지 갈 것도 없이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주 한참 전이다. 내내 타고 다니면서도 내가 탄 버스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앞에서 세 장에 걸쳐 우려의 말만 써놓고 디스토피아를 상상한 책임은 기술에 무관심했던 나에게 있는 것 같다.

글을 마치면서

저자는 내내 채근한다. “세상이 바뀌고 있어. 너 그렇게 계속 앉아만 있을 거야? 그랬다간 도태되고 말걸? 세상의 바뀌는 시류를 따라가야지.” 솔직히 말하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너무 개인적인 불편함인가? 물론 필자는 ‘초-’로 시작하는 여타단어와 혁신, 파격, 속도 등의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치판단이 아닌 그저 취향의 문제다.

너무 개인적이므로 논리적인 이유를 덧붙여 반박을 해보겠다. 글을 쓸 때 기본원칙은 주제, 대상(독자), 목적을 고려하고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저자가 대상으로 삼은 독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글의 목적은 무엇인가? 대상이 ‘기술변화 시대를 살아갈 대중’이 되었다가 ‘기업가’가 되었다가 다시 ‘대중’으로 옮겨간다.

글의 초반부(저자가 Digital Twins얘기를 하며 ‘여기까지 알아들었는가?’라고 하던 부분)까지 대상은 기술이 발달하고 있는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범인(凡人)들이다. 그런데 이후 대부분의 내용에서는 기업가가 대상이다. 수많은 기업의 사례를 열거하고 ‘너의 기업체가 도태되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한다. 재밌는 점은 책의 마지막 <후기>에 와서는 다시 기술변화의 기본흐름도 모르면서 아이폰의 다음 세대나 찾는 범인(凡人)들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저자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정보전달을 하는 책이니 그 안의 정보는 양질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므로 무지로 인해 깊은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술에 얻어맞던 인문학도가 객기를 부려봤다.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던 기술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맞서려는 꿈틀거림이다.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책을 덮는다.

[ 인상 깊은 문구 ]

  • 주말에는 집에서 편안한 자세로 아이패드를 들여다보며 공장에 이상은 없는지, 혹시라도 심각한 폭풍이 공장을 덮치지는 않을지 수시로 확인한다.
  • 그 시대의 데이터란 땀내 나는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너덜너덜한 장부에 빼꼼히 적힌 숫자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밤이 되면 금고에 처박혔다. 하지만 블록체인에서는 복잡한 거래내역, 즉 데이터를 32바이트짜리 블록으로 나누어 각 블록을 세계 곳곳의 PC에 분산 저장한다.
  • 초연결시대에는 오로지 ‘개방’만이 가장 큰 이익을 낸다. 즉, 모든 것이 더 연결되면 연결될수록 유리하다.
  • -정보보안에 구멍이 뚫려 대중의 믿음을 잃은 뒤에는 신뢰와 호감을 되찾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읽게 된 동기

‘ STEW독서소모임’ 지정 도서

한줄평

‘당연’을 ‘당연’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 읽어야 할 책

서평

우선 이 책은 나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가방이 텅텅 비었는데도 굳이 책을 손에 들고 다니고 싶게 한다. 물론 제목이 잘 보이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책장 한 가운데에 꽂아놓으면 묘한 만족감을 준다. 한편으론 책이 출판되어 선풍적 인기를 끈 지 오래되었는데도 정작 읽을 생각을 하지 않은 책이기도 했다. 맛있는 반찬은 마지막까지 남겨뒀다 먹는 일과 같은 이치라고 핑계를 대본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맞이했을 때 순간적인 판단을 한다. 언젠가 어느 회사 대표의 인터뷰를 보았다.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불쾌감이 좀 들었다. 논리를 자세히 따지기 전에 쾌・불쾌라는 감정이 먼저 왔다. 그 대표의 언어 안에는 어떤 가치가 담겨 있었고 그 가치는 나의 신념과 배치되는 축에 있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문제들 앞에서 드는 감정과 생각을 종합해보면 내가 평소에 어떤 가치를 중히 여기는지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뇌를 신뢰한다. 이성이 작동하기 전에 직관적으로 판단을 하였더라도 그 판단과 선택은 내가 평소 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뇌 속에서 서로 충돌하며 내린 최선의 결론일 것이다. 결정을 내리고서도 의구심이 들어 종이를 펴고 각 선택의 장단점이나 이유를 나열하고 나면 첫 판단이 얼추 맞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자동적 판단에 전적으로 맡기고만 있으면 ‘당연’의 탈을 쓴 논리에 의문이 제기 되었을 때 말의 빈곤을 겪게 된다. 논리는 언어화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문제들에 대해 무수히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네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봐.”혹은 “반대 입장인 나를 설득시켜 봐.”라고 나오면 뭐라고 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의 빈곤이다. 이러한 말의 빈곤 상황을 불편해하지 않고 그냥 넘기면 나중에는 꼰대가 되고 만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꼰대보다 더 무서운 신념만 고수하는 완고한 사람이 된다. 인류에 심각한 해를 입힌 독재자들은 자신의 신념만을 고수한 인물인 경우가 많다.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을 때 아래의 인용구를 보며 섬뜩했다.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가장 열광적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된다. 성자와 같은 일편단심의 이상주의자와 미치광이 광신자의 거리는 단지 한 발짝에 불과할 때가 많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예의 길』(『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인용)

책은 명제 하나를 던지고 그것을 철학자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그 철학의 맹점을 들고 다시 재반박하는 구성이다. 각 챕터 별로 대략 한 명의 철학자가 나온다. 처음에는 마치 심리테스트를 하듯이 “나와 맞는 철학자는 어떤 사람일까?”궁금해 하며 인덱스로 표시를 해가며 읽었다. 칸트와 롤스의 논리가 나온 부분을 읽을 때 인덱스와 메모가 가장 많이 늘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챕터의 후반부에서 그에 대한 반박을 읽을 때는 전적으로 싸고 돌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떤 철학자는 겉보기에 훌륭한 명제를 세웠지만 현재 관점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하기도 했다.

결국 책을 다 읽고 나서 내린 결론은 ‘어느 한 철학자의 말만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각 철학자들의 말을 들어가며 학술적으로 보이는 서평을 쓰려다가 읽고 난 전반적인 생각을 중심으로 쓰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어떤 철학자의 맹점을 알게되면서 실망했다고도 했지만 그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내가 사는 현실 안에서 이치를 따져 무엇이 옳은 일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라는 개인 한 명이 아닌 보다 많은 이의 행복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까지 나의 철학이다.

철학책을 찾아 읽을 만큼 지적인 사람은 아니어서 철학자를 단독으로 만날 일은 잘 없다. 대부분 다른 인문서적을 읽다가 책의 저자에 의해 선택적으로 소개된 철학자의 이론을 접하는 경우가 많다. 드문드문 파편화된 철학자들의 이론들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정리해 둔 좋은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단번에 토론을 잘하게 되고 명석한 사람이 되지는 않겠지만 두고두고 곁에 놓고 읽으면서 나만의 철학 논리를 세우고 싶다. 관심이 가는 철학자의 책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엄청난(?) 다짐도 한다.

인상 깊은 구절

  •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명예와 포상을 누릴 미덕이 무엇이며 좋은 사회가 장려해야 할 생활 방식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고자 하는 일련의 또 다른 신념들이 자리 잡고 있다.
  • 안타깝게도 우리 군대가 전쟁에서 입은 정신적 손상을 은연중에 경멸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참전 용사들은 상이군인 훈장을 결코 받지 못할 것이다.(…) 논쟁의 핵심에는 도덕과 군인의 용맹이라는 서로 다른 생각이 다투고 있다.
  • 앞선 논쟁들 속에서 복지의 극대화, 자유의 존중, 미덕의 배양이라는 가치는 서로 불일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 우리는 때로 도덕적 추론을 타인을 설득하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도덕적 추론은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분별하는 수단이자, 우리가 어떤 신념을 왜 믿는지 이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 이 반박은, 도덕이란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것이라는 공리주의자들의 사고를 받아들여, 단순히 사회적 결과를 더 많이 계산하고자 했다.(병에 걸린 소년을 죽여 셋을 살림)
  • 우리가 배심원을 고용하지 않고 징발하는 이유는 법정에서 정의를 집행하는 행위를 모든 시인이 함께 나눠야 할 책임으로 보기 때문이다.
  • 칸트는 공리주의를 거부했다. 공리주의는 권리 역시 무엇이 최대 행복을 만들어내는가를 따져보는 계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듦으로써 권리를 취약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생겨나는 욕구들로부터 도덕 원칙을 끌어내려 함으로써 도덕을 생각하는 방식부터 그르친다.
  • 칸트는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자신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자율적 존재로써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도 말한다.
  • 칸트에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자율적으로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 칸트가 타율적 결정이라고 부를 만한 사례다. 뭔가를 위해 이런 행동을 하고 또 다른 뭔가를 위해 저런 행동을 한다.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에 반응해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다.
  • 그(칸트)의 주장의 핵심은 의무동기(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가 유용하다거나 편리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만이 행동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다만 쾌락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옳은 행동이라는 이유로 선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칸트는 말한다.
  • 우리 사회가 그런 것들에 가치를 두는 현상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그런 재능을 지닌 사람이 지금처럼 기술이 발달했거나 소송을 무척 좋아하는 사회가 아니라 수렵사회나 무사가 우대받는 사회. 아니면 육체의 힘이나 종교적 경건함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가장 큰 포상을 안겨주는 사회에 산다고 생각해보라.(…)그렇다면 그 사람의 가치나 미덕은 지금보다 적은 것일까?
  • 롤스는 우리가 그러한 요소를 다룰 때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사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자고 제안한다.
  • 롤스가 일깨워준 대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날 자격이 있다거나 애초부터 사회에서 우리한 출발선에 설 자격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장점을 높게 쳐주는 사회에 살게 된 것도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행운일 따름이다.
  • 도덕적 미덕이 행동으로 배우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올바른 습관을 가져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는 이것이 법의 일차목표다. 즉, 좋은 인격 형성을 습관화하는 것이다.

[ 읽게 된 동기 ]

강의시간에 교수님이 언급하신 책. 담고 있는 문제의식에 나 또한 관심이 있어 읽음.(10월 지정도서 서평 때 언급을 했지만 머리말까지 읽고 포기. 결국 다시 읽음.)

[ 한줄평 ]

철학자의 세상 읽기 ‘디지털 시대,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서평]

인터넷에 접속하면 맞춤형 팝업 광고가 뜬다. 내가 영어학원을 다녔던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학원광고가 계속 뜨기도 하고, 커피원두 혹은 핸드로션 같이 내가 구매했거나 구매할까 망설였던 물건들이 뜨기도 한다. 어쩌다 인터넷 접속기록을 보면 포털 사이트가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놀랄 일이 있었는데 휴대폰 안에는 ‘저장된 와이파이 목록’이 남아있어서 내가 그동안 어디를 돌아다녔는지를 숨김없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편리하기도 하고 무서운 세상이다. 예전에는 이런 점들이 불편해서 인터넷 공간 안에서 꼬리를 잘 자르고 다녔는데 요즘은 (다른 의미에서)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어 빅데이터의 추천을 받아들이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린치는 인터넷의 출현을 문자의 발명에 버금가는 혁명으로 보고 인터넷이 우리 생활은 물론 지식체계와 의식세계도 바꾸어놓을 것이라고 한다. 인터넷의 출현은 혁명에 버금가는 큰 변화이고 여기서 비롯된 생활의 편리함이 존재하지만, 그 외 인터넷의 여타 속성들이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가령 인터넷 환경은 수용적인 태도를 갖기 쉽게 하여 합리적 판단을 등한시하는 개인이 되도록 하거나, 다양한 사고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자신에게 편안한 주장만을 고수하는 꼰대가 되게 할 수도 있다. 사회 안에서는 정보의 불평등으로 인해 차별이 심화되도록 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인터넷 환경의 가장 큰 특징은 지식과 정보가 무한히 생성되며 그에 대한 접근성 또한 낮다는 점이다.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지구반대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OO동 맛집’이라고 검색만 해도 무수히 뜨는 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고 식당 메뉴판에서보다 고화질의 음식 사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이클 린치는 이러한 환경이 보르헤스의 바벨도서관과 같다며 우려를 표한다. 바벨 도서관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있지만 그 정보들이 옳은지 알 수 없으며 그 도서관에서 벗어날 수도 없기에 정확한 근거에 기반을 둔 합리적 판단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도서관 안에서 지식인들은 저마다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고 개인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주장에만 귀를 기울여 집단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도서관 안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책을 불살라버리는 파괴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성숙한 인간과는 거리가 먼 해결방식이다.

저자는 사물 인터넷을 넘어 뉴로 미디어(초소형 스마트폰이 사람의 뇌와 직접 연결된 기술)가 등장하여 현실과 가상현실 간의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며 인간도 네트워크의 일부가 된 탓에 지식을 타인에게(혹은 공유 드라이브)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가령 예전에는 친구의 전화번호 몇 개쯤은 쉽게 외웠지만 요즘은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다거나 USB자료가 날아갔다는 지인의 말에 함께 기함하게 되는 일 등이다. 저자는 지식의 형태도 바뀌었다고 하는데 고전적 지식이 기존의 변하지 않은 토대에 지식을 쌓아올리는 형태였다면 오늘날의 지식은 평면 위에서 누구나 접근 및 편집이 가능한 형태를 띤다. 위키백과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워진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간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는다. 오늘날의 사회를 철학자의 입장에서 분석하고 문제의식을 던지면서도 말미에는 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이라는 첨언을 하며 낙관적 전망을 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인간은 인터넷 환경 안에서 수용적이 되기 쉬워 합리적 사고를 적게 하게 될 위험성이 있지만 그만큼 ‘진실’에 대한 욕구가 강하기에 ‘진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본문에서 SIM실험 참조) 인간의 창조성이나 순간적인 통찰력만큼은 그 어떤 기술로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영역이라고도 한다. 인간은 때로 너무 쉽게 성찰 없는 직관적 판단을 하지만 직관적 판단이 꼭 그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시간을 주고 생각하게 하면 그릇된 판단을 하다가도 다시 돌아와 옳은 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직관을 ‘촉’이라는 요즘말로 바꾸어 말하면 ‘촉은 내가 그동안 경험한 무수한 빅데이터의 결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언젠가 교내 뇌공학과 실험에 피험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신선한 경험이었는데 연구실을 나오면서 ‘만약 계속 뇌 과학이 발달하면 인간 머릿속의 생각들을 펼쳐놓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게 된대도 불구하고 인간의 뇌 속의 무수한 지식이나 경험들을 어떠한 기준으로 어떻게 분류할지는 여전한 의문이다. 기준을 잡기에 따라 무수한 경우의 수가 나올 수 있으니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이 기술에 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마이클 린치는 이후 책의 후반부에서 인터넷이 민주주의, 지식의 접근성문제, 교육, 노동 문제 등 사회의 여러 측면에 미칠 영향을 제시하고 우려 섞인 당부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이라는 희망도 놓지 않는다.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에 필자 또한 예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고 많은 부분 동의하기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읽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해?’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바벨 도서관에서 벗어나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 사람들과의 면대면 교류를 늘려야 한다거나, ‘이 문제를 해결할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마이클 린치는 철학자이고 인문학자 이므로 통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의미 있는 문제의식을 던지면 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쉬운 느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기의 유명한 학자가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고 단정 지어 주니 마음은 편안해졌다. 여러 가지 툴에 약한 사람인데 오늘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기술로부터 내 정보를 어떻게 지킬지 어디까지 보여줄지를 내가 결정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저장된 와이파이 목록 처음 보는 건 저 뿐인가요?ㅎㄷㄷ)

[ 인상 깊은 문구 ]

p.27 얼마 전에 우리는 ‘정보 과잉’시대에 살고 있으며. 정보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정보 ‘과부하’상태에 빠졌다고 흔히 이야기했다. 여전히 그렇게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보에 압도당한다는 것을 점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p.28 윌리엄 제임스는 일단 이러한 사조가 용솟음치기 시작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을 멈추려고 시도하는 것은 강에 막대를 꽂는 것과 같다. ‘강물은 장애물을 돌아서 흘러가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한다. ‘제임스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강에 막대를 또 하나 꽂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내가 내 아이폰에 불만이 있거나 지식의 성장에 반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성찰 없는 수용은 위험하다.

p.49 구글은 정보를 창조하지 않으며, 다만 전달만 할 뿐이다.

p.76 인터넷이 극화를 조장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암시를 받으면서 극단적인 입장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비슷한 성향이면서 거기에 노출되는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믿는 쪽으로 이동할 것”(캐스 선스타인) 이기 때문이다.

p.92.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 정말로 정의를 위한 욕구가 동기가 되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신의 견해를 합리적 근거로 옹호하는 사람은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p. 132하지만 개인은 합리적 근거에 민감한 정도에 따라 객관적이거나 객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p.156-7 완전히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이와 반대로 그런 결정에 명확한 태도가 반영되며, 그 결정은 완전한 자신의 것이다. 나중에 이 문제를 다시 곰곰이 생각하더라도, 그는 그 결정이 자신의 깊은 가치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p.167지식은 투명할 수 있지만 권력은 투명한 경우가 드물다

p.238 우리의 디지털 삶의 형식은 우리의 이해능력을 경시할 때가 많은데 이해는 단지 더 많은 데이터만으로는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p.254 데카르트는 늦잠꾸러기였다. 가능하면 정오 무렵까지 침대에 누워 (사색을 하면서) 빈둥거리는 버릇이 있었다.(장래희망!!)

p.265이해의 창조성은 이해가 단지 우리를 어디로 안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가치와 중요성을 가진 인지행위라는 우리의 직관적 느낌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p.270우리는 기술이 항상 우리의 관점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안으로 이동할수록 관점을 바꾸는 이 효과는 증가하기만 할 뿐이다.

[ 읽게 된 동기 ]

독서모임 10월 지정도서

[ 한줄평]

질문은 멈추어 서서 통찰하고 방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것이다.

[ 서평 ]

이 책을 읽기 전 마이클 린치의 「인간인터넷」’(마이클 린치 저, 이충호 옮김·최훈 감수/사회평론)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내용이야 다르겠지만 저자가 현재를 진단하는 초점이 같았다. 두 저자 모두 인터넷 검색엔진이 발달하면서 정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환경을 문제 삼고 있었다. 프랭크 세스노는 속도를 중시하는 검색엔진 문화 탓에 진지하고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질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술의 발달로 우리 앞에는 끝없는 지평이 펼쳐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속한 답변을 중시하는 ‘빨리빨리’ 검색엔진 문화 때문에 한층 깊은 탐구를 등한시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소셜 미디어로 정치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면서 시민들의 진지한 토론에 균열이 생기고 대화가 아닌 독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뉴스 매체는 이런 세대에 물들어 점점 더 짧아지고 신랄해지면서 이를 더욱 심화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중략…) 진정성 있는 질문은 확실성, 이념, 분노에 밀려서 뒷전이 되기 일쑤다.” – 「판을 바꾸는 질문들」 ‘프롤로그’에서 p.18. –

프랭크 세스노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질문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개인적 차원에서 생각하거나 관점을 달리하면 여러 대답이 나오겠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진실을 만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회적 문제로 시선을 돌려보자. 인터넷상의 가짜뉴스가 문제가 된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재밌는 점은 한쪽의 정치 성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가짜뉴스를 보고 믿는 이들은 대부분 그러한 뉴스 편집진들과 동일한 정치성향을 지닌 이들이라는 점이다. N사의 뉴스 댓글을 보는 사람은 N사의 댓글만 보고, D사의 뉴스 댓글을 읽는 사람은 D사의 댓글만을 읽는 현상도 본질은 같다. 넘쳐나는 정보 홍수 속에서 자신에게 편안한 정보만을 가려서 읽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 같은 경우만 해도 뉴스를 볼 때는 N사나 D사 둘 중 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는 편이다. 뉴스를 읽으면 댓글도 같이 보기 마련인데 날이 선 상대편의 논의가 나를 피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배운 대로 살자면 하나의 이슈에 대하여 명확한 정보를 찾고 그에 대해 주체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다른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깨지게 되는 것이 두렵다.

프랭크 세스노는 「판을 바꾸는 질문들」 전반에 걸쳐 다양한 질문의 유형을 분류하고 그러한 질문의 달인을 찾아서 인터뷰를 하며 적확하게 질문을 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상황에 따른 11가지 질문유형이 제시되어 있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러한 여러 질문법의 본질은 결국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멈추어 서서 통찰하기’이것이 책을 읽고 난 이후에 내가 이끌어낸 질문의 본질이다.

책 내용 중 어떠한 결정을 내리기가 버거우면 답을 내려고 하기보다 그 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해보라는 노하우를 인상 깊게 읽었는데 그 또한 통찰이라는 측면에서 ‘멈추어 서서 통찰하기’라는 질문의 본질과 같다. 어떤 고민거리에 대한 답을 내려하다가 그에 대해 질문을 만들어보는 것은 단순히 방향을 바꾸는 일이지만 그러한 작업을 통해 문제가 되는 상황 전체를 바라보게 된다.

프랭크 세스노는 8장의 ‘과학적 질문법’에서 속단을 피하고 멈추어 서서 올바르게 질문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방법이야말로 ‘멈추어 서서 통찰’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8장의 내용 중 나의 주의를 끌었던 부분이다.(처음 마음에 드는 부분을 적어둘 땐 몰랐는데 글을 쓰며 보니 내가 책을 허투루 읽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작가도 여러 질문법의 본질이 ‘멈추어 서서 통찰하기’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내 반향실(反響室)이 되어 내 아이디어에 동조하고 내 논리를 인정해줄 가상과 현실의 친구와 동료로 똘똘 에워쌀 수 있다. 나는 모든 구성원이 내게 동의하는 미디어 세상에 살 수 있고. 내가 속한 소셜 미디어의 부족(附族)이 내 확신을 더욱 공고하게 뒷받침해 준다. -우리는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속단을 피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틀리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다른 식으로 질문할 수 있는가? 이 책에서 지금까지는 자신과 타인에서 더 많은 것을 묻고 요구하는 여러 가지 질문법을 살펴봤는데, 그 질문법들은 저마다 특유한 결과로 이어지고 고유한 방법론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질문법이든 간에 추론한 질문은 정보, 인식, 이해, 답변으로 이어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판을 바꾸는 질문들」 8장 -‘어떻게 미지의 세계를 파헤칠 수 있을까’ p. 228.)

처음 책 제목을 접했을 땐 ‘이 책을 읽으면 수업 중 ‘더 질문이 없느냐’는 발표자의 질문 뒤에 이어지는 긴 침묵을 내가 깰 수 있겠구나.’하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약간의 회의가 들었다. 이러한 질문법 책을 읽는다고 과연 질문을 잘 하게 될까 싶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므로 내 지식과 능력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여러 질문의 사례들을 모아놓은 뒤 귀납적으로 결론을 내린 책을 읽는다고 ‘질문의 달인’이 될 수 있을까. 어떤 문제에 대해 무리 없이 질문을 하게 되려면 그와 관련하여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엔 올바르게 질문하려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속단을 하기 전에 상황을 따져보고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제에 대해 그렇게 접근하다보면 언젠가는 의미 있는 질문을 하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학부 교양시간에 스치듯 배운 것이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심리상담 유형 중 자신의 사고과정을 파악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자동적 사고의 패턴을 차근차근 분석하면 자신이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논리적 오류를 찾을 수 있고, 그 오류를 바로잡으면 문제의 해결점이 도출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본질을 알았으니 이제 시작이다. 책을 읽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면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그런 날이 빨리 오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인상깊은 문구]

  • 우리가 만나는 전문가는 의사나 지붕기술자, 몸값 비싼 컨설턴트는 물론이고 동네 친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 가도 못 따라갈 정도로, 그들이 아무리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진단에 질문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p.48.
  • 대화를 해보니 그들의 삶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상상하지도 못하는 것들 투성이였다. 그들은 균열되고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었고, 그 속에서 번민과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때로는 고통을 자초하기도 했다. 나는 그 대화 내용을 보도에 최대한 반영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대중이 그들의 말을 직접 들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왜냐하면 세간의 통념, 고정관념과 다리 이들은 정말 가슴 뭉클한 의지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p.87.
  •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주인공 맥스는 모험심이 넘치는 소년으로 늑대 옷을 입고 장난을 치다가 배를 타고 괴물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러 떠난다. 그리고 다시 귀갓길에 오른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맥스는 일 년을 거슬러 오르고 석 달, 두 달, 한 달을 거슬러 오르고 하루를 거슬러 오르면서 항해를 했어. 그날 밤에 맥스는 제 방으로 돌아왔어. 저녁밥이 맥스를 기다리고 있었지. 저녁밥은 아직도 따뜻했어.” p.104.
  • 대의를 생각하면 투지가 생긴다. 정보와 지식을 확보하면 권위가 생긴다. 주의 깊게 들으면 기회가 생긴다. 맞서 싸울 상대가 시장이든 동네 망나니든 간에 우리에게는 신념에서 나오는 용기와 사실에서 나오는 근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간을 유리하게 이용해야 한다. p.142.
  • 대립형 질문은 둔기와 같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규칙을 존중하고 준수하며 행동에 책임을 지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p.167.
  • 이 연설에서 젊은 대통령은 도전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p.176.
  • 자신과 타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어마나 많은 사람이 ‘나증후군’의 함정에 빠지는지 그런 증상이 얼마나 자주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 (…) ’경청‘과 ’질문‘에 계속 집중하자. 질문도 시선과 마찬가지로 계속 상대방에게, 현재 논의 중인 프로젝트에, ’공동‘의 목표에 맞추자. (…) 내가 아닌 우리 이야기를 하자. p.221.
  • 하지만 질문법 중에는 느림을 특징으로 하는 질문법, 즉 즉답을 도출하긴커녕 불확실성을 수용할 것을 종용하는 질문법도 있다. 나는 느린 질문법, 다시 말해 노고와 인내를 요구하는 질문법, 내가 과연 옳은지 확인하기 위해 억지로 내가 틀렸음을 입증하려고 해야 하는 질문법, 그런 질문법이 지금 같은 즉답의 시대에 과연 대안으로 설 자리가 있을까 궁금했다. 그것이 진실에 이르는 믿을 만한 경로로 입증될 수 있을까? 그 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p.228.
  • 워싱턴 정계에서는 다들 질문만 하면 즉시 확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와 달리 과학계에서 사실이란 알아내야 할 것이지, 내게 유리하게 써먹어야 할 것이 아니다. p.231.
  • 이 문답을 들어보면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우려스러울 만큼 빈번하게 일어난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해버리기 일쑤다. 반면에 과학은 우리에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속도를 늦추고 꾸밈없이, 공평무사하게 질문하라고 가르친다. p.238-9.
  • 유능한 진행자는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항상 경청하고, 항상 손님들과 그들의 대화에 관심을 기울인다. p.296.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는데 따로 사진을 찍어두지 않아 출판사(문학동네) 에서 제공하는 이미지 를  첨부함.

[ 읽게 된 동기 ]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이 좋아하신다는 작가의 책. 책 내용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작가를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나온 책을 대출해서 읽었지만 생각 이상의 경험을 하게 한 책.

[ 한줄평 및 별점 ] ★★★★★ ( 5점 / 5점 ) 나는 이 소설을 거대한 시류 안에서 삶을 지키려는 이들의 이야기로 읽고싶다.

  [ 서평 ] 사전모임 이후 몇 권의 책을 더 읽었다. 그러나 독서모임 지원서에 써냈던 책으로 첫 서평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아직까지는 이 작품이 가장 인상 깊으며 책을 읽을 당시 기록해둔 구절들도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요인물은 사회주의 사상에 몸담았다가 탈당 후 양극단의 길을 걷고 있는 버나드와 준이다. 소설은 그들의 삶을 회고하는 사위 제러미의 회상으로 전개된다.

작품을 읽으며 인상 깊은 구절에 표시를 해두었는데 마치 논문을 읽었을 때처럼 인덱스가 가득 찼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소설 문장 안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탁월한 묘사능력이 놀라웠다. 소설은 194,50년대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당대의 역사를 공부하며 읽어도 좋을 정도로 역사성이 짙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좌우 양파간의 대립이 있던 정치, 역사적 상황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기에 역사를 고려한 책읽기를 해보는 것도 좋은 읽기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그저 ‘삶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의 이야기’로 읽었다.

앞서 밝혔다시피 버나드와 준은 열렬한 사회주의 당원이었다. 사회주의는 그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기에 사상에 대한 신념과 그들 두 부부의 사랑, 젊음, 열정 등은 사상과 함께 서로 뒤얽혀 있었다. 그러나 정당에서 탈당하고 열정이 빠져나간 이후 두 사람의 빈 공간을 채운 사상은 각각 너무도 다른 특성을 띤 것들이었다. 합리주의자와 신비주의자 과학자와 직관론자, 활동가와 기권자가 버나드와 준이 새로이 심취한 삶의 형태였다. 그 둘은 탈당 이후 내내 자신의 신념 극단에 서 있는 상대방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명목상 부부의 모습만을 유지하였다.

준이 이상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세계를 영접하고 마침내 자신의 전 생애를 전환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검은 개와 조우한 이후였다. 검은 개는 소설 안에서 거대한 악의 화신인 것처럼 묘사된다. 인간의 힘으로 감당이 안될 만큼 거대한 개들과의 만남, 그 엄청난 공포심 앞에서 준은 신의 존재를 느낀다. 준이 온 몸으로 버나드를 부르던 그 순간 버나드는 땅을 기어가는 벌레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야기 전개상 벌레가 소설 안에서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는 듯 보이나 검은 개와 함께 거대한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상학적이고 영적인 것과 지극히 물질적인 벌레, 심지어 하늘과 반대에 있는 땅 위를 기어 다니고 있는 벌레. 둘은 양 극단에 있다. 그러나 필자는 양극단으로 물러서 있는 그들의 삶이 사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양극단은 통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양극단에 선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결국 같은 노력을 해왔고 같은 것을 추구하며 살았던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형태는 달랐지만 그들은 각각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였다. 버나드와 준을 보며 한국문학사가 떠올랐다. 혹자는 90년대 한국작가들을 ‘잃어버린 세대’라고 일컫는다. 한국 근대사가 시작된 이후 끊임없이 독재에 저항하는 글을 써 온 작가들이 90년대에 들어 민주화를 맞이한 이후 도리어 가치갈등상황에 직면했다는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독재를 향한 투쟁의 열정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사상은 없었다. 민주화를 위해 싸웠지만, 민주화가 도래함으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준과 버나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사상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워줄 일종의 삶의 에너지가 필요했다. 형태가 달랐을 뿐 이는 결국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필자 또한 옳다고 여기는 정의를 위해서는 현실을 희생할 줄도 알아야한다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을 돌이킬 때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핑계였다는 점을 고백한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말의 동의어는 ‘삶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갈망이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삶보다 신념이 우선시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평범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와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 탈당 이후 양극단의 삶을 추구하였던 준과 버나드도 결국 인간으로 살기 위한 분투를 하였던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논리일까. 소설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다음 세대인물인 제러미와 제니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면 어떨까.

작품을 읽다보면 수용소를 묘사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거의 세 페이지에 걸쳐 수용소의 참상이 드러난다. 글로 읽지만 너무도 참혹해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작품의 중심이 되며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수용소 바로 다음 장면이었다. 제러미는 수용소를 나와 제니에게 키스한다. 생명이 무자비하게 몰살된 참상 앞에서 연인에 대한, 연인의 육신에 대한 사랑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제러미의 행동이 몰염치해 보이지 않았다. 죽은 자 앞에서 살아있음을 자랑하는 파렴치한으로 보이기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분투하면서도 삶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여 애잔한 마음마저 들었다. 준이 종교에 귀의함으로써, 버나드가 과학에 심취함으로써 삶을 이어가려 했던 것처럼 제러미와 제니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함으로 인간의 삶을 살려 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분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사회주의, 이상주의, 종교, 과학, 합리주의, 사랑 등 여러 가치들이 등장했지만 삶을 위해 분투하는 인간의 모습만이 보였다. 소설에는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 치밀하게 담겨있어야 하며 그런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인간을 깊이 있게, 그리고 치열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좋은 작품을 알게 되어 뿌듯하다.

[ 인상 깊은 문구 ]                                                                            

※서평이라고 하기엔 인상 깊은 문구가 지나치게 많지만 소설에서 던지는 메시지와 별개로 표현 자체가 탁월한 부분이 많았기에 개인적으로 기록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그룹원분들이 좋은 부분들을 함께 읽어보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추리지 않고 기록하였습니다. 

준과 버나드는 바로 이때 입당을 감행했다. 전쟁과 계급 억압이 없는 건전하고 정의로운 세상에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당에 소속되는 것으로 젊고 활기차고 지적이고 과감한 모든 것과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P.36 –

준은 완벽하게 세상에서 자신을 단절시켰고, 내가 알아챌 수 있는 한 후회는 없었다. 그녀에게 바깥세상은 영원히 떠난 나라, 아직은 기꺼이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나라에 불과했다. 나는 준이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어떻게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고 지루한 이곳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무자비하게 삶은 야채며, 불평 많고 구시렁대는 노인들, 멍하게 종일 텔레비전만 보는 그들을. 자족적인 인생 후에 이런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면 나라면 크게 당황하거나 끊임없이 탈출을 계획할 것이다. 하지만 고요에 가까운 준의 묵종은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편하게 해주었다. – p.47 –

순수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진이다. 동결된 내러티브라는 아이러니 탓에 사진 속 주체들은 모두 앞으로 변하거나 죽으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순진무구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미래다. 오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신이 모든 것을 알듯이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될지-누구와 결혼할지, 언제 죽을지-알고서, 언젠가는 누군가 우리 사진을 들고 있으리란 생각은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본다. – p.51 –

우리는 자신을 지금 현재로 해방시키지 못했지. 대신 남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했어. 그들의 불행으로 우리 자신의 불행을 덮어버렸어. 인생이 선사하는 소박하지만 좋은 일을 받아들이고 그걸 가진 데 기뻐할 줄 몰랐던 게 우리의 불행이었지. 정치란, 이상주의적인 정치란 언제나 미래에 대한 거잖아. 지금껏 살면서 내가 배운 건 이거야. 사람은 현재에 충실히 임하는 순간, 무한한 우주, 무한한 시간, 어떻게 보면 신이라 할 만한 모든 것을 발견한다는 것. – p.59 –

나는 장모님이 싫어졌거나 당혹스러운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줄 만한 말을 하고 싶었다. 반대로, 나는 그녀가 좋아졌다. 준이 흥분한다는 게 위로가 되었다. 인간관계의 갈등과 마음이 아직 중요하다는 게, 지난날의 인생과 문제가 아직 지속된다는 게, 황혼기에도 아직 모든 것을 정리하지 않았다는 게, 무덤처럼 차가운 초연함이 없다는 게 위로가 되었다. – p.61 –

영혼, 사후세계, 의미로 가득한 우주. 기꺼운 그 믿음이 주는 바로 그 편안함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신념과 이기심은 서로 너무도 긴밀하게 얽혀있다. – p.87 –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대사처럼, 임관설교에서 파편처럼 점점이 기억에 남은 것은 몇몇 뛰어난 문장, 책 제목들, 한때 살아 숨 쉬었으나 죽어가는 반복적인 운율. 그리고 척추를 따라 저릿하게 흐르던 긴장감이었다. 나는 버나드를 지켜보았다. 그는 손을 늘어뜨리고 신부 오른 쪽에 서서 차 안에서 그랬듯이 앞만 바라보며 자신을 잘 추스르고 있었다. – p.90

대략 준비해둔 어색한 몇 마디를 건네려고 다가갈 때 그가 벽 너머로 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더 가까이 가보니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기다란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폈다. 그는 그늘 속에서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하며 울었다. 나는 사생활을 침범한 듯한 죄책감을 느끼며 서둘러 방향을 돌려 무덤을 덮고 있는 두 남자를 지나 한담 중인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 – p.91 –

흔히들, 특히 요즘 많이 인용하는 이사야 벌린의 말이 있지. 유토피아의 치명적인 성격에 대한, 인류를 평화와 정의, 행복과 무한한 창의성으로 인도할 방법을 분명히 알고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른들 아깝겠는가? 이상적인 오믈렛을 만들 수 있다면 달걀을 무제한 깨뜨려도 좋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수백만이 영원히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금 수천 명이 죽어야 할 수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 결국 모순은 너무 커지고, 신념은 깨지지. 하지만 그런 일은 언제나 뒤늦게 찾아와. 나는 56년에야 탈당했지. 53년에도 그럴 뻔했지만 48년에 진작 그만둬야 했어. 하지만 그냥 남아있는 거지. 사상은 올바른데 잘못된 사람들이 책임을 맡은 거다. 변할 거다, 하면서. 그리고 이 훌륭한 과업을 어찌 다 쓰레기로 만들겠나. 이런 일은 언제나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아직 실천이 이론만큼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면서. 들려오는 소식은 다 냉전 하의 증상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러. 게다가 내가 어떻게 그렇게 틀릴 수 있는가. 그토록 많은 똑똑하고 용감한, 선의를 품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 틀릴 수 있는가 하면서. -p.126-128-

그는 말을 멈추었다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게 준과 나의 차이야. 준은 나보다 수십 년 전에 당을 떠났지만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어. 환상과 현실을 구분한 적이 없지. 한 유토피아를 다른 유토피아로 바꾼 거야. 직업 정치인이든, 목사든 중요치 않아. 뭐가 됐든 그 여자는 본질적으로 강경파였어…….” – p.128 –

나는 마을 인구 4분의 3을 차지하던 유대인을 모조리 삼켜버린 수용소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부를린과 마이다네크는 물질과 반물질처럼 나라니 붙어 있었다. 우리는 정문의 안내문을 읽으려고 멈춰 섰다. 수십만 명의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영국인, 그리고 미국인이 여기서 죽었다고 쓰여 있었다. 수용소는 매우 조용했다.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순간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제니의 속삭임이 나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없어요. 그렇죠? 아직도 진행형인 거예요. 그게 정부의 입장이고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검은 개인 거네.” 나는 마지막 한마디는 그냥 지나쳤다. 나머지 말에서 과장을 빼고 남은 진실만으로도 마이다네크는 망각을 경계하자는 고결한 시민정신을 담은 기념물에서 상상의 질병이자 살아있는 위험으로, 악에 대한 무의식적인 묵인으로 한순간에 돌변했다. 나는 제니와 팔짱을 끼고 아직 사용 중인 초소를 지나 바깥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초소 문간에는 꽉 찬 우유 두 병이 놓여 있었다. 강박적으로 정돈된 수용소에서 가장 최근 더해진 것은 몇 센티미터 쌓인 눈이었다. 이 무인지대를 가로지르면서 우리는 슬며시 팔짱을 풀었다. 앞쪽으로는 감시탑이 있었는데 버팀기둥 위 낮은 막사에 뾰족한 지붕을 얹고 나무사다리를 가져다놓은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이중으로 된 안쪽 담장 사이를 볼 수 있었다. 안쪽 담장 안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길쭉하고 낮은 막사가 많이 있었다. 그것들이 우리의 시야를 채웠다. 그 너머로는 주황색과 흰색 하늘을 배경으로 굴뚝 하나짜리 더러운 부정기 화물선처럼 소각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말이 없었다. 제니는 지시사항이 적힌 메모를 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견학 온 학생들 무리를 따라 막사 한곳에 들어갔다, 안에는 몇 개의 철조망 우리에 말린 과일처럼 납작하고 쭈그러든 신발이 가득 차 있었다. 수천수만 개의신발이었다. 다른 막사에는 신발이 더 많았고, 세 번째 막사에는 믿기 어렵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신발이 우리 안도 아니고 바닥에 수천씩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먼지 틈으로 어린양 장식이 아직 남아 있는 아기 신발과 그 곁에 놓인 징 박힌 부츠 한 짝을 보았다. 넝마로 변한 생명이었다. 엄청난 규모에, 말로는 너무 쉬운 숫자-수만, 수십만, 수백만-에 상상력은 올바른 연민을 저지당했고, 고통의 참상은 제대로 알 길이 없었으며, 방문객은 박해자의 전제에 저도 모르게 말려들었다. 생명은 값싼 것이며 무더기로 쌓아놓고 검사해야 할 쓰레기였다. 더 걸어 들어가면서 내 감정도 죽어버렸다. 우리가 도울 길은 없었다. 먹이거나 풀어주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관광객처럼 거닐고 있었다. 방문객은 이곳에 와서 절망하거나 아니면 손을 주머니에 더 깊숙이 찔러 넣고 따뜻해진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악몽을 꾸는 이들에게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수치이며 우리 몫의 참담함이었다. 우리는 다른 쪽에 있었고, 과거 수용소장이나 그의 정치적 우두머리가 그랬듯 이곳을 자유로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런저런 것을 구경하면서, 출구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 우리가 멀쩡히 다음 번 식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얼마 후 나는 더는 희생자들을 생각할 수가 없어 그들의 박해자들만을 생각했다. 우리는 막사사이로 걸었다. 얼마나 잘 지어졌던가, 얼마나 오랫동안 건재했던가, 우리가 걷는 길에서 가지런히 샛길이 뻗어나가 각 막사의 앞문으로 이어졌다. 막사는 우리 앞으로 아주 멀리까지 펼쳐져 그 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수용소 일부의 한 줄에 불과했고, 이곳은 규모가 비교적 작은 수용소였다. 나는 외려 감탄하게 되었고 음울한 경이에 잠겼다. 이런 과업을 꿈꾼다는 것이, 이런 수용소를 기획하고 짓고 그토록 공들여 집기를 들이고 운영하고 유지하고 마을과 촌락에서 인간 연료를 거둬온다는 것이. 그 정력이라니, 헌신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을 시루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 p.156-159 –

우리는 수용소를 나와 부를린을 다시 걸어갔다. 나는 그곳이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바르샤바를 망가뜨린 파괴와 전후 재건도 그곳은 비껴갔다. 우리는 가파른 길에 있었고, 젖은 길의 포석이 밝은 주황빛 겨울 석양을 받아 황금빛 둥근 손잡이처럼 보였다. 오랜 감금 끝에 풀려난 듯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루블린의 특별할 것 없는 러시아워의 평범함 속으로 돌아온 것이 흥분되었다. 제니는 자연스럽게 내 팔을 잡고는 카메라 끈을 느슨하게 풀어 메고 파리에 요리를 배우러 온 폴란드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앞서 섹스와 사랑에 관해 말을 아끼는 편이며 유혹에 약한 것은 누나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은 평소 억제하던 자아에서 해방되어 나답지 않게 훌륭한 일을 했다. 나는 말하고 있는 제니를 멈춰 세워 입을 맞추고 그녀가 내가 만나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며, 그녀와 사랑을 나누면서 남은 하루를 보내기를 그 무엇보다 더 간절히 원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초록색 눈으로 내 눈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팔을 들었다, 나는 잠시 따귀를 맞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길 건너 좁은 문 위로 빛바랜 간판이 걸린 곳을 가리켰다. 우리는 황금빛 둥근 조약돌을 밟으며 비스와 호텔로 갔다. 택시 기사는 보내고 그곳에서 사흘을 지냈다. 열 달 후, 우리는 결혼했다. -p.160으로 추정-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버나드를 용서하실……” “고맙지만 우린 신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어. 기독교인들이 사랑이란 말을 독점해버리다니, 어찌나 혐오스러운지.” – p.170 –

단단한 졸참나무 잡목이 여기저기 갈라진 돌 틈과 산턱에서 약간의 흙과 뿌리내릴 공간을 찾아 자라나 있었다. 가장 혹독한 곳에서 생명유지에 집착하게 만든 그 광기어린 힘을 목도하고 준을 질려버렸다. 심한 욕지기가 치밀었다. (…) 산봉우리는 무시무시했고,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협곡은 끔찍했고,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은 혼돈이자 타락 후 낙원을 잃은 인류에 대한 징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 p.200-201 –

개들은 불온한 전진을 계속했다. 준은 뒷걸음질 쳤다. 감히 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버나드를 한 번, 두 번, 세 번 불렀다. 햇살 머금은 공기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힘없이 들렸다. 그 소리 때문에 개들은 더 빠른 속도로, 거의 총총 걸음으로 다가왔다. 두려움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개들은 준에게서 공포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공포를 느껴서는 안 되었다. – p.208 –

뺨이 땅바닥에 닿도록 무릎을 꿇고 대장 애벌레의 머리를, 불가해한 요소들을 경첩으로 이어놓은 듯한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외계에서 왔다고 상상해도 무리 없을 만큼 희한하고 진기한 동물들과 이 행성을 공유하고 있구나. 하지만 이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더는 돌아보지 않지. 아니면 하도 작아서 유심히 보지 않거나. – p.211 –

꼬냑이 그녀의 뱃속을 덮히고 있었다. 그녀는 그 경험이 끝났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아무리 나빠봐야 생생한 기억이었다. 그녀가 잘 해쳐나온 이야기였다. 그녀는 안도감에 사랑스러운 버나드에 대한 애정을 기억해냈고, – p.219 –

덥고 점심까지 먹어서 베르주리테드나를 향해 힘겹게 산길을 올라가는 내내 이 음울한 일이 두 사람의 마음에 남았다. 두 사람은 산중턱에서 길게 뻗은 공처 앞 작은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오래 멈추었다. 버나드는 이 순간을 평생 기억하게 된다. 두 사람이 물병의 물을 마시는 동안 버나드에게는 최근 끝난 전쟁이 역사적, 지정학적 사실이 아니라 다수의 문제로, 무한에 가까운 개인들의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먼지처럼, 홀씨처럼 온 대륙을 뒤덮은 사람들 사이에 미세하게 나눠지는, 그러나 작아지지 않는 가벼운 비통이었다. 개체로 그들은 영영 무명의 존재로 남을 것이며, 전체로서 그들이 상징하는 슬픔은 누구 하나 이해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남편과 형제 둘을 잃고 검은 옷을 입은 여인처럼 수십만, 수백만 명이 침묵 속에 무게를 지탱하고 있었다. 저마다 특별하고 미묘하고 애절한, 달라질 수도 있는 사랑이야기들이, 마치 전에는 전쟁에 대해, 전쟁의 대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기 일의 세부사항 때문에, 일을 잘해내느라 너무 바빴고 그의 넓은 시야는 전쟁의 목적과 승리, 통계 수치상의 죽음, 통계 수치상의 파괴와 전후 재건을 향해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면에서 재앙의 규모를 감지했다. 이 모든 고유하고 외로운 슬픔, 그것은 국제회의나 헤드라인, 역사에서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각자의 집으로, 부엌으로,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침대로, 고통스러운 추억으로 조용히 물러나야 했다. 이런 깨달음이 1946년 랑그도크의 소나무 한 그루 옆에서 버나드에게 다가왔다. 준과 나눌 수 있는 단상이 아니라 깊은 우려로, 진실에 대한 인지로 나타났다. 그는 낙담한 나머지 침묵했고 뒤이어 의문을 품었다. 망각은 비인간적이고 위험하며 기억은 끝없는 고문이 될 터인데, 이런 먼지와 홀씨로 뒤덮인 유럽에서 어떤 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 p.234-235 –

고원의 높은 절벽 아래 웅크린 이 작은 땅뙈기에서 그녀는 안전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 변화했다. 이것, 지금, 이곳. 분명 이것이 존재가 원하는 것이었고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맛볼 기회는 흔치 않았다. 어두워져가는 부드러운 여름 공기, 발에 밟히는 타임의 향기, 배고픔, 해소된 갈증, 셔츠를 통해 느껴지는 따스한 돌벽, 입안에 남은 복숭아의 맛, 손의 끈적거림, 피로한 다리, 땀에 젖고 햇볕에 그을리고 먼지를 들쓴 피로, 이 어둑하고 사랑스러운 장소,(…) – 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