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자리 서평

참고

(la place)인데 ‘아버지의 자리’ 였다가, 지금은 남자의 자리로 번역이 바뀜.

작가:Annie Ernaux(아니 에르노)

별점:★★★★★

읽게 된 동기

우리 집에는 모든 벽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방이 있다. 한 책장이 모두 1980~1990년대에 구매된 아빠의 책들로 채워져 있는데, ‘아버지의 자리’도 그곳에 있던 책이었다. 아빠는 어떤 생각으로 그 책을 산 걸까? 하는 궁금증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내가 아는 것 외의 다른 유형의 ‘아버지의 예시’를 알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한 줄 평: 타인의 삶을 관조하는 것을 통한 사색시간.

서평

“소설화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안 것은 얼마 안 된다. 가난에 굴복한 인생을 설명하는데 있어, 우선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또 뭔가 열정적인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만들려고 애쓸 권리도 내게는 없다. 아버지가 한 말들, 몸짓들 그의 취향들, 그의 일생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들, 나 또한 함께 나눴던 한 존재의 모든 객관적인 표적들을 한 데 모을 것이다.”

내가 책을 통해 알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과, 그런 노력으로 인한 아버지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였다. 다시 말해서, 작가가 책에서 한 방식을 고수하여 나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는데, 작가의 아버지 사례를 내 아버지에게 대입시키기에는, 다른 점들(성장 과정, 교육 수준, 사회의 수준 등)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본 목적은 이루지 못하겠단 생각으로 책을 읽었지만, 아버지의 딸로서가 아닌, 제3 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의 성장배경, 거쳐 온 직업, 생활습관, 사고방식 등 여러 객관적 지표들을 모아 아버지를 한 남자 그 자체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한 작가의 시도는 내게 유익한 경험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의문은,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그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해가 아버지에 대한 궁극적인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였다.

작가는 아버지와 자신의 사이에는 계층의 차이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루에 딱 3마디만 나눌 정도로 대화가 단절된 부녀였다. 시골 부농의 짐수레꾼의 아들로 태어나 짐수레꾼-공장 직공-식료품점 주인으로 신분 상승을 마친 그의 아버지는 그의 딸이 자신이 속하고 싶었던 사회(브루주아 사회)의 일원이 되었단 자부심에 세상을 살았지만, 이미 자신을 무시한 그 사회의 일원이 된 딸과는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전혀 없었다. 청소년기, 그 당시 부르주아 계층으로 진입할 유일한 수단이었던 공부를 시작한 이후로 작가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는 말할 수 없는 먼 거리감이 생겨났고, 그것은 작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됐다.


작가는 책 후반 부에 이런 말을 했다.

“ 아버지는 나를 당신의 자전거에 태워 집에서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었다. 비가 오나 해가 짱짱하나 아버지는 이 기슭에서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나는 이 말을 통해서 나의 첫 번째 의문 “작가는 이 작업(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객관적인 지표를 한 데 모으는 것)을 통해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에 “예스”라고 답할 수 있었다.

작가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13살이나 돼서 스스로 밥값을 벌지 못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상으로 너무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으로 작가의 가족은 생계가 위협받을 정도의 가난은 벗어날 수 있었고, 작가에게 최소한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은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브루주아 친구들과 학교생활을 했던 작가로서는 의식주가 갖추어진 환경이 너무 당연했을 것이다. 게다가 공부를 시작함으로써 생긴 아버지와의 정신적인 대화의 단절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는 의문을 더 강화시켰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모든 기억들을 되짚어 보면서 작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뱃사공’으로 정의를 내렸다. ‘아버지는 내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라는 생각에서 ‘아버지는 내게 뱃사공 같은 존재였다’ 라는 생각의 전환은 아버지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 조합을 통한 이해가 없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전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버지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다시 작가는 아버지를 사랑했을까? 라는 추가 질문을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한 노력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전제되었다면 ‘작가는 아버지를 사랑했다’라고 볼 수 있지만, 책 마지막 옮긴 이의 서평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의 자리’는 자기가 태어난 세계를 버리고 다른 세계로 이주한 자, 비록 그것이 자기 부모들의 바라는 바였기는 하지만 자기 태생을 배반하고 그 세계의 이방인이 된 자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다시 찾아 인정하는 작업이다. 또한 이것은 작가가 지배계급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 그 문밖에서 버려야 했던 소외계층의 세계 유산을 낱낱이 밝히고자 하는 작업이며, 그것은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의 궤적을 통하여 자신의 뿌리를 찾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이해했고, 그 일환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의 아버지의 존재를 정의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났던 두 가지의 의문에 나름의 답을 내렸음에도, 계속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에 대한 이해가 그 사람에 대한 궁극적인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일단 이해를 못하면 사랑할 수 없다는 말에는 동의한다.(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위해선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해를 못하는 상황이 오면 대게 찾아오는 감정은 분노다. 애정은 있지만, 상대방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분노만 쌓였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애증이 된다.

나는 칭찬 10마디보다 부정적인 말 한마디에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감정적인 사람이다. 나의 부모님은 말을 세게 하시는 편이라, 갈등 상황이 있을 때마다 많은 상처를 받았고, 그 점에 대해 말해봤자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에 서운한 점들에 대해서, 제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서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행동하셨는지 이해되는 부분들도 생겼다.

만약 내가 부모님의 상황이나, 사고방식, 성장배경 등을 고려해 이해하려 시도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화난 부분들에 대해서만 계속 생각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부모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애증하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객관적인 이해는 사랑을 이어갈 수는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정리하기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책을 읽으면서 본 내용은 그의 아버지의 삶에 대한 내용 뿐 이었다. 하지만, 작가가 책 속에서 어떠한 자신의 주관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더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고, 작가 아버지의 삶을 관조하면서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의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점.

책 뒤에 실린 서평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전기도 아니며 소설도 아니다. 아마 문학,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의 그 무엇일 것이다.” 문학이라 함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의 삶에 대한 진실의 추구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며 언어가 아닌 그 다른 무엇으로도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라 함은 이 두 작품이 사르트르나 시몬느 드 보브와르가 살았던 바로 그 시대에, 소외된 계층은 아직도 ‘중세’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산 증언이며 또한 자기 부모와 자기 사이에 이루어진, 무산계급에서 중산계급으로의 사회적 상승의 산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부모님의 신분은 가난한 농부-공장직공-식료품점 주인으로 상승하며, 노년에는 사회보장제도의 보급으로 편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신분 상승을 단지 그들만의 노력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프랑스가 그 시기에 산업화가 되지 않았다면, 이브토라는 시골까지 공장이 보급될 리가 없었을 것이고,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어주었던 군복- 즉 아버지가 군대에 징집되지 않았다면, 그는 세상에 눈을 뜨지 못한 채 짐수레꾼에 머물렀을 수도 있다. 즉 국가의 발전에 따라 변해가는 한 가족의 생활상을 지켜보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옮긴 이는 서평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양(프랑스)와 동양(한국)을 구별하는 경계를 찾을 수 없을 만치 우리와 친근한 우리 주변에서 항상 듣고 볼 수 있는 이 이야기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애잔한 감동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 말에 공감할 수 없었는데, 책의 출판 시기가 1980년대인 것을 고려하면, 나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부모님 세대의 생활상이 작가와 작가의 부모세대의 생활상과 비슷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렇기에, 아빠의 책장에 이 책이 꽂혀있던 것은 아마 옮긴 이와 같은 이유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빵 위에다 십자가 표시를 하는 것 미사, 부활절, 청결이 그러하듯이 종교도 품위를 주었다. 일요일엔 그들은 나들이옷을 입고 부농들과 같이 크레도를 불렀으며 헌금 접시에다 동전을 놓았다. 아버지는 성가대원이었는데 성체를 들고 신부를 따라가는 일을 좋아하셨다. 그들이 지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모자를 벗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솔직하고 담담한 문체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이 문체는 책 읽는 내내 너무 매력적이었다. 아니 에르노의 다른 작품들도 다 읽어보고 싶은 덕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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