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의 영혼의 전기, 『데미안』. ‘나에게 이르는 길’, ‘개성화 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고유의 ‘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성장 과정이다. 그것에 더불어 『데미안』에서는 진정한 나만의 길에 이르는 방법 또한 제시하고 있다. 아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자, 작품의 메시지를 가장 잘 알려주는 문장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식스다.”
이러한 투쟁의 과정은 버트런드 러셀의 ‘내 인생의 세 가지 열정’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네 살 때 자살을 생각했으며, 그 어린 나이에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했다. 그가 쓴 자서전에는 다섯 문단의 짧지만 강렬한 프롤로그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세 가지 열정이 지배했다 말하며,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 추구, 인간의 고통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연민이 그것들이라 제시했다.
그가 이 세 가지 열정들로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는데 까지는 엄청난 고난의 길과 홀로 견뎌 내야하는 고통이 컸을 것이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의 삶이 얼마나 열정적이었으며, 자신의 대한 탐구가 어느 정도까지 깊은지를 알 수 있다. 그가 말한 세 가지 열정은 주체적인 내면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만의 고유성을 견고하게 한다. 이처럼 나만의 개성과 고유성이 드러나는것, 그것이 ‘너 자신만의 길을 가라’ 라는 메시지가 제시하는 방향과 가장 상응한다고 본다.
데미안의 서술자인 싱클레어는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아들이다. 하지만 열 살 무렵 그는 이 세계가 허용된 밝은 세계와 금지된 어두운 세계로 나뉘어 있음을 느낀다. 그는 ‘크로머’에 의해 그 어둠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순수했던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세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내면의 갈등으로 고통받던 그를 ‘데미안’이 해결해주게 된다. 카인에 대해 다른 해석을 들여놓고, 그가 안주하던 세계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해석을 데미안으로부터 듣게 된 싱클레어는 엄청난 가치의 혼란을 겪게 된다.
나는 악마인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나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의 능력으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세상의 좁은 오솔길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 길은 내게는 너무 미끄러웠다. 이제 친절한 손길이 나를 붙잡아 구원해놓으니, 나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어머니의 품으로, 잘 보존된 경건한 어린 시절의 안전함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나는 실제보다 더 어리고 의존적이고 어린아이같이 굴었다. 크로머에의 종속을 새로운 종속으로 바꾸어야 했다. 혼자서는 갈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눈먼 가슴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옛날의 사랑스러운 ‘밝은 세계’에 종속되는 것을 선택했다. ……. 아, 지금은 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사람이 더 싫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그는 데미안을 외면하고 원래의 편안한 삶에 안주하려고 했으나, 이미 편하게 감싸고 있던 알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이후로는 그 알을 깨기 위한 여정이 계속 되었다. 데미안이 말한 카인에 대한 이야기가 그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한 데에 대한 핵심이다. 데미안은 기독교 교리 상 ‘악’이라 칭하는 ‘카인’을 새롭게 해석한다.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것들은 분명 참되고도 올바르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선생님이 설명하는 것과는 다르게도 볼 수 있거든. 그럼 이야기들이 대개 훨씬 더 나은 의미를 갖게 되지. 예를 들어 카인과 그의 이마에 찍힌 표만 해도 말이야. ……. 누군가 싸우다가 동생을 때려죽였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어. 그리고 그가 나중에 두려움을 품고 물러났다. 그것도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그가 겁쟁이라서 그 덕에 특별히 상을 받았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그를 보호해주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상을 말이야.
데미안은 카인의 표를 두고 사람들은 이런 표를 지닌 사람들이 섬뜩해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섬뜩한 사람들은 용기와 자기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매우 두려운 존재라 말한다. 그와 동시에 카인은 멋진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은 카인이 두려워서 그에게 복수로 그런 이야기를 붙인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 이후로 싱클레어는 자신이 카인이 됨을 느낄 때마다 그 표는 수치가 아니라 ‘뛰어남’의 표지라 여기게 된다. 그가 알을 깰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인 것이다. 그에게 카인의 표란 아래와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내 어린 영혼이라는 샘에 떨어진 돌멩이였다. 한동안, 아니 아주 오랫동안 카인, 때려죽임, 표 따위가 내 생각의 중심점이 되었다. 깨달음, 의심, 비판은 시도할 때마다 나는 이 중심점에서 출발하곤 하였다.”
이러한 그의 가치관은 성적인 문제의 고민으로 더 커지게 되었다. 세상을 인위적으로 반으로 나눈 다음 상식적으로 인정한 절반만을 존중할게 아니라, 나머지 악마의 세계도 존중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 데미안의 말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신의 영역과 악마의 영역 둘 다 포함된 ‘세계 전체’를 존중하는 것은 그가 안주하고 있던 세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혼란은 그를 낯선 도시에서 술에 빠져 사는 방탕한 삶을 살다, ‘베아트리아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를 만나 다시 정결한 삶을 살게 된다. 그 이후 그는 데미안을 내적으로 다시 마주하게 되고, 그에게 새의 그림을 보내, ‘아프락사스’라는 답장을 받게 된다.
그 이후 싱클레어는 아프락시스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보게 되고, 꿈에서 어머니이며 남자이며 여자인, 데미안과도 닮았고 싱클레어 자신과도 닮은 한 여인에 대해 찾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그는 ‘피스토리우스’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 ‘아프락사스’는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의 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데미안은 선과 악에 대해 이분적으로 나누지 않았으며 그 모두를 포용한 상태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주목 깊게 봤던 것은 자신의 마음 속 ‘이상화’였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비롯한 에바 부인을 자신의 관념 속에 이상화시켜 그들이 실제로 없을지라도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교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조차 이상화시켜 그 이상화된 모습을 실제의 모습과도 일치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현실적인 요소들보다는 오롯이 우리 안에서 우러나와 비롯된 것들, 내면화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것들은 불변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진정한 길을 제시할 수 있고, 진정한 삶의 행복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타의에 의하지 않은, 외부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은 오로지 자신에 의해 내가 결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렵고, 그럴 수 있다면 그 인생은 ‘그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싱클레어가 누군가에 의해 ‘프란츠 크로머를 아직 기억하니?’라고 질문을 받은 것은 아마 그가 스스로에게 한 질문일 것이다. 외면하고 싶었던 그의 어둠의 세계의 시발점이자 가장 큰 아픔 앞에 맞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비로소 외부의 것, 그를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 자신’만이 될 수 있는 진정한 성장을 이루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