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W

[서평] 정의란 무엇인가 ★★★★☆

읽게 된 동기


분명히 책장에 있었는데, 꼭 찾으면 없더라. 2019 STEW 독서소모임 마지막 지정도서

한줄평


철학. 결국, 인간

서평


내 인생 첫 철학책 <생각의 싸움>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철학책을 만났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온라인 서점에는 ‘사회학’ 분야로 돼 있고, 워낙 유명한 책이라 딱히 책 분야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냥 ‘정의 그거’ 였다.

번역서 기준 무려 2010년에 출판된 책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명작인가보다 했다.

책 초반부는 실망이 컸다. 최근 번아웃도 겪었고, 워낙 벌인 일이 많아 현실에 충실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이런 시점에 ‘정의’ 따위를 논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었다. 커뮤니티 STEW 지정도서가 아니었다면, 그 어떤 계기였더라도 다 읽지 못했을 것이다. STEW는 내가 지켜야 하는 정의 중 하나거든.

그럼에도 명작은 명작이었다. 너무 촉박하다 싶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기 위해 휴가도 냈다. 그렇게 꽤 괜찮은 휴가를 보냈다.

극단적인 그들의 일생

철학자라곤 몇 명 알지 못했다. 철학책 <생각의 싸움> 덕분에 철학자 십 수명을 만난 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는데 유일한 기반이 됐다. 사기캐릭 밀 아저씨를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만날 줄이야…

그럼에도 밀은 여러 생활방식 중에 더 고상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상하게 사는 사람들의 만족도가 더 낮을지라도 그러했다. “고급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보다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으며, 어쩌면 더 심한 고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급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로 떨어지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왜 우리는 고급 능력을 필요한 삶을 포기하고 저급한 만족을 느끼며 살려 하지 않을까? 밀은 그 이유가 “자유와 개인의 자립에 대한 애정”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말은 존엄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존엄하다”고 결론짓는다.

절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개인의 자유를 최고로 여기는 자유주의, 이성에 호소하는 칸트와 ‘탈레스’ 그 자체인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저자 마이클 샌댈의 색깔인 공동선까지.

<생각의 싸움>에서 말하길 모든 철학자는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살았고, 그 문제의 어떤 끝을 본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민, 그들의 일생이 현재를 만들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린 여전히 물리적 힘이 센 추장을 따라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철학을, 일생을 배우는 것은 분명 의미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일생을 두 달 째 보고 있자니 무척 피곤하다. 다소, 아니 굉장히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정언명령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의 기분을 걱정해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어머니를 이성적 존재로 존중하기보다 어머니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이다.

그들에 따르면,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이니 하면 안 된다. 이성이 있다면 누구든 존엄성을 지켜줘야 하며, 자신의 노력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능력 역시 그렇다. 무언가 이뤄도 마냥 기뻐할 필요가 없고, 무언가 잃어도 마냥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아재들이지만, 친구로 지내자 하면 거절하겠다. 형들 너무 피곤해.

정의를 고민하던 그때

프리랜서 개발자 시절, 나는 다양한 사람과 일을 했다. 내가 채용을 결정하기도 했고, 해고를 권유하기도 했다. 대상은 나보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부터 20년 이상 경험이 많은 사람까지 다양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당시엔 악몽을 꾸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당시엔 그다지 주위에서 위로받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야말로 ‘정의란 무엇인가’다.

당시 나는 새로운 사람을 채용하기 위한 면접에 면접관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나와 함께 할 사람이기에 내 의사가 무척 중요한 자리였다.

몇몇 사람을 면접했지만,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40대 남성이 면접에 참여했다. 이력서를 보니 내 지인과 커리어가 겹치는 부분이 있어 지인에게 물었다. 지인이 말하길 지금 내 상황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니 채용하지 않는 것을 권했다. 나는 고민하다가 그 사람을 채용하지 않았다.

며칠 뒤 정확한 경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람의 배경에 관해 듣게 됐다. 새로운 사람을 채용한 상황에서 내가 굳이 그 사람의 뒤를 캘 이유조차 없었다는 것을 밝힌다. 몇몇 이야기 중 그 사람이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채용 중이라는 것이 내 가슴에 박혔다.

상황은 이랬다. 나는 당장 내 일을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고, 이력서와 면접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 사람과 나를 모두 아는 지인이 나와 맞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당시 프로젝트 상황에도 적절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채용할 것으로 권했다. 나는 그 말을 들었고, 새로운 사람을 뽑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당시 그 사람의 배경을 듣고서는 마치 내가 그 사람 가정에 큰 장애물을 만든 것 같아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꼭 내가 있는 프로젝트에 들어올 필요도 없었고, 이미 들어온 상태도 아니었기에 내가 해고한 것도 아니니, 사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나만 편해지고자 나만을 위한 선택을 내린 것 같아 악몽도 꿨다. 악몽은 내가 그 사람에게 해고되는 꿈이었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렸어야 했을까? 당시 마음이 아팠지만,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확고한 내 생각은 어떤 것을 뜻할까? 나는 정의롭지 못한 걸까?

철학. 결국, 인간.

철학자들의 말을 가볍게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절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고, 이성이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타고난 재능을 자신의 행복으로만 사용해선 안 되며, 인류로서 서사를 이해하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도대체 이 말에서 틀린 게 어디 있는가?

하지만, 극단적인 그들은 이 말의 오류를 찾아낸다. 절대다수를 위해 소수는 희생해도 되고, 이성이 없다면 존엄하지 않으며,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결과는 평등해야 하고, 인류는 공동체를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정말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편함을 나눠야 한다. 언젠가 찾아올 극단적 상황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소수가 될 가능성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성을 놓을 때를 생각해서이기도 하고, 불공평한 결과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내 이야기는 어디에 있겠는가?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쓴다. “나는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내가 속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로 시작이 같았지만, 끝은 다를 수 있다. 반대로 시작은 달랐지만, 끝이 같을 수 있다. 각자 철학의 시발점은 다를지 몰라도, 심지어 끝마저 다를지 몰라도 우리는 대화를 멈춰선 안 된다.

각자가 각자일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일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인간일 수 있도록.

인상 깊은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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