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게 된 동기
분명히 책장에 있었는데, 꼭 찾으면 없더라. 2019 STEW 독서소모임 마지막 지정도서
한줄평
철학. 결국, 인간
서평
내 인생 첫 철학책 <생각의 싸움>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철학책을 만났다. 사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온라인 서점에는 ‘사회학’ 분야로 돼 있고, 워낙 유명한 책이라 딱히 책 분야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냥 ‘정의 그거’ 였다.
번역서 기준 무려 2010년에 출판된 책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명작인가보다 했다.
책 초반부는 실망이 컸다. 최근 번아웃도 겪었고, 워낙 벌인 일이 많아 현실에 충실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이런 시점에 ‘정의’ 따위를 논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었다. 커뮤니티 STEW 지정도서가 아니었다면, 그 어떤 계기였더라도 다 읽지 못했을 것이다. STEW는 내가 지켜야 하는 정의 중 하나거든.
그럼에도 명작은 명작이었다. 너무 촉박하다 싶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기 위해 휴가도 냈다. 그렇게 꽤 괜찮은 휴가를 보냈다.
극단적인 그들의 일생
철학자라곤 몇 명 알지 못했다. 철학책 <생각의 싸움> 덕분에 철학자 십 수명을 만난 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는데 유일한 기반이 됐다. 사기캐릭 밀 아저씨를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만날 줄이야…
그럼에도 밀은 여러 생활방식 중에 더 고상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상하게 사는 사람들의 만족도가 더 낮을지라도 그러했다. “고급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보다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으며, 어쩌면 더 심한 고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급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로 떨어지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왜 우리는 고급 능력을 필요한 삶을 포기하고 저급한 만족을 느끼며 살려 하지 않을까? 밀은 그 이유가 “자유와 개인의 자립에 대한 애정”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말은 존엄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존엄하다”고 결론짓는다.
절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개인의 자유를 최고로 여기는 자유주의, 이성에 호소하는 칸트와 ‘탈레스’ 그 자체인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저자 마이클 샌댈의 색깔인 공동선까지.
<생각의 싸움>에서 말하길 모든 철학자는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살았고, 그 문제의 어떤 끝을 본 사람들이다. 그들의 고민, 그들의 일생이 현재를 만들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린 여전히 물리적 힘이 센 추장을 따라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철학을, 일생을 배우는 것은 분명 의미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일생을 두 달 째 보고 있자니 무척 피곤하다. 다소, 아니 굉장히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정언명령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의 기분을 걱정해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어머니를 이성적 존재로 존중하기보다 어머니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이다.
그들에 따르면, 선의의 거짓말도 거짓말이니 하면 안 된다. 이성이 있다면 누구든 존엄성을 지켜줘야 하며, 자신의 노력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고, 능력 역시 그렇다. 무언가 이뤄도 마냥 기뻐할 필요가 없고, 무언가 잃어도 마냥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아재들이지만, 친구로 지내자 하면 거절하겠다. 형들 너무 피곤해.
정의를 고민하던 그때
프리랜서 개발자 시절, 나는 다양한 사람과 일을 했다. 내가 채용을 결정하기도 했고, 해고를 권유하기도 했다. 대상은 나보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부터 20년 이상 경험이 많은 사람까지 다양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당시엔 악몽을 꾸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당시엔 그다지 주위에서 위로받지 못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야말로 ‘정의란 무엇인가’다.
당시 나는 새로운 사람을 채용하기 위한 면접에 면접관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나와 함께 할 사람이기에 내 의사가 무척 중요한 자리였다.
몇몇 사람을 면접했지만,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40대 남성이 면접에 참여했다. 이력서를 보니 내 지인과 커리어가 겹치는 부분이 있어 지인에게 물었다. 지인이 말하길 지금 내 상황에 적절한 사람이 아니니 채용하지 않는 것을 권했다. 나는 고민하다가 그 사람을 채용하지 않았다.
며칠 뒤 정확한 경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람의 배경에 관해 듣게 됐다. 새로운 사람을 채용한 상황에서 내가 굳이 그 사람의 뒤를 캘 이유조차 없었다는 것을 밝힌다. 몇몇 이야기 중 그 사람이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채용 중이라는 것이 내 가슴에 박혔다.
상황은 이랬다. 나는 당장 내 일을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고, 이력서와 면접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 사람과 나를 모두 아는 지인이 나와 맞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당시 프로젝트 상황에도 적절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채용할 것으로 권했다. 나는 그 말을 들었고, 새로운 사람을 뽑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당시 그 사람의 배경을 듣고서는 마치 내가 그 사람 가정에 큰 장애물을 만든 것 같아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꼭 내가 있는 프로젝트에 들어올 필요도 없었고, 이미 들어온 상태도 아니었기에 내가 해고한 것도 아니니, 사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나만 편해지고자 나만을 위한 선택을 내린 것 같아 악몽도 꿨다. 악몽은 내가 그 사람에게 해고되는 꿈이었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렸어야 했을까? 당시 마음이 아팠지만,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확고한 내 생각은 어떤 것을 뜻할까? 나는 정의롭지 못한 걸까?
철학. 결국, 인간.
철학자들의 말을 가볍게 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절대다수의 행복을 추구하고, 이성이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고, 타고난 재능을 자신의 행복으로만 사용해선 안 되며, 인류로서 서사를 이해하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도대체 이 말에서 틀린 게 어디 있는가?
하지만, 극단적인 그들은 이 말의 오류를 찾아낸다. 절대다수를 위해 소수는 희생해도 되고, 이성이 없다면 존엄하지 않으며,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결과는 평등해야 하고, 인류는 공동체를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정말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편함을 나눠야 한다. 언젠가 찾아올 극단적 상황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소수가 될 가능성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성을 놓을 때를 생각해서이기도 하고, 불공평한 결과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내 이야기는 어디에 있겠는가?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쓴다. “나는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내가 속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서로 시작이 같았지만, 끝은 다를 수 있다. 반대로 시작은 달랐지만, 끝이 같을 수 있다. 각자 철학의 시발점은 다를지 몰라도, 심지어 끝마저 다를지 몰라도 우리는 대화를 멈춰선 안 된다.
각자가 각자일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일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인간일 수 있도록.
인상 깊은 문구
- 한마디로 정의를 묻는 질문이다. 여기에 답하려면 정의의 의미부터 따져봐야 한다.
- 분노는 자격 없는 사람이 무언가를 얻는다고 생각될 때 느끼는 특별한 종류의 화다. 다시 말해, 부당함에 대한 화다.
- 경우에 따라,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곳에서는 ‘악마의 거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가격폭리를 허용하면 도덕을 희생하고 탐욕을 인정하는 대신, 멀리 있는 지붕 수리업자들과 건축업자들을 다수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근현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도 있다.
- 미국인은 탐욕보다 실패에 더 엄격하다. 시장 중심 사회에서는 야심 찬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고, 이익 추구와 탐욕의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의 경계는 분명하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누구나 포상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아메리칸드림의 핵심이다.
- 미국인의 정의감을 가장 심하게 건드린 것은 내 세금이 실패를 포상하는 데 쓰인다는 점이었다.
- 사실 우리 시대에 가장 치열한 정치 논쟁은 자유방임주의와 공평주의 진영 사이에서 일어난다.
- 그때를 회상하던 루트렐은 염소치기를 죽이지 않는 쪽에 표를 던진 행동을 후회했다. “내 평생 가장 어리석고, 가장 나부인스러운 덜 떨어진 결정이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책으로 썼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틀림없다. 사형집행을 승인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쪽에 표를 던졌다.
- 이러한 혼란의 힘과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의 출발점이다.
- 하나는 어떤 행위의 도덕성은 전적으로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에 달렸다는 시각이다. 모든 것을 고려해 최선의 상황을 도출하는 행위가 옳다. 또 하나는 도덕적으로 볼 때, 결과가 전부는 아니라는 시각이다. 의무와 권리에는 사회적 결과를 떠나 존중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 벤담에 따르면, 옳은 행위느느 ‘공리(유용성)’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다. 그가 말하는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것 일체를 가리킨다.
- 벤담은 우선, 거지와 마주치면 두 가지 측면에서 행복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이 많은 사람이라면 동정심이라는 고통이, 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혐오감이라는 고통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거지와 마주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공리가 줄어든다. 따라서 벤담은 거지를 구빈원으로 몰아넣자고 제안했다.
- 담배 회사인 필립 모리스는 체코에서 사업이 한창이다. 필립 모리스는 세금 인상을 막기 위해, 흡연이 체코의 국가 예산에 미치는 화과에 대한 비용, 편익 분석 작업에 매달렸다. 그 결과, 정부는 흡연으로 손해가 아닌 이익을 본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유인즉, 흡연자들이 생존중에는 정부의 의료 에산을 높이지만, 결국에는 일찍 죽기 때문에 노년층을 위한 의료, 연금, 주거 부문에서 상당한 예산 절감 효과를 낳는다는 이야기다.
- 비용, 편익 분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시속 55마일에서 65마일로 운전 속도를 높임으로써 암묵적으로 사람 목숨을 154만 달러로 계산하는 셈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정부가 환경오염이나 건강과 안전에 관한 기준을 정할 때 적용하는 한 사람당 600만 달러보다 훨씬 적은 액수다.
- 정신과 도덕도 근력과 마찬가지로 사용해야 좋아진다. 세상이, 또는 내 몫에 해당하는 세상이, 내 인생 계획을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유인원처럼 흉내 내는 능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자기 계획을 자기가 선택하는 사람만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 밀에게 개성이 중요한 이유는 쾌락을 주기 때문이라기보다 인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욕구와 충동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 아닌 사람은 인격이 없는 사람이며, 그것은 증기기관차에 인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그럼에도 밀은 여러 생활방식 중에 더 고상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상하게 사는 사람들의 만족도가 더 낮을지라도 그러했다. “고급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보다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으며, 어쩌면 더 심한 고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급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로 떨어지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왜 우리는 고급 능력을 필요한 삶을 포기하고 저급한 만족을 느끼며 살려 하지 않을까? 밀은 그 이유가 “자유와 개인의 자립에 대한 애정”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말은 존엄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존엄하다”고 결론짓는다.
-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 만약 바보가, 아니면 돼지가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면, 문제를 자기 쪽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 자유지상주의자들에 따르면, 재분배를 위한 과세는 강압 행위이며, 심지어 절도로도 볼 수 있다.
- “징병은 두말할 것 없이 노예제다. 그리고 비자발적 노예 상태를 금지하는 헌법 수정조항 제13조에도 위반된다. 징집되어 전사할 수도 있으니, 징병은 대단히 위험한 노예제다.”
-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원군은 세 가지 중에 최고의 선택이다.
- 케네디의 연구에 따르면, “인구 비율로 볼 때, 오늘날의 현역군인 수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4퍼센트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정책 입안자들이 광범위하고 진지한 사회적 동의를 구하지 않고도 비교적 쉽사리 국가를 전쟁으로 내몬다.”
- 루소가 호소한 시민의 이상은 미국 같은 시장 중심 사회에서도 여전히 반향을 일으킨다. 자원군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들이 용병과 다름없다는 말을 강력히 부인한다. 이들은 자원군의 상당수가 단지 보수와 복리후생 때문만이 아니라 애국심에서 복무한다고 지적하는데, 옳은 이야기다.
- 프랑스 외인부대는 외국인을 모집해 프랑스를 위해 싸우게 하는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는 이 부대가 프랑스 밖에서 적극적으로 군인을 모집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이러한 제한이 의미가 없어졌다. 이 외인부대 홈페이지는 13개 언어를 지원하며 전 세계에서 군인을 모집한다. 현재 부대 병력의 약 4분의 1이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며, 중꾹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 출신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미국인은 외인부대를 창설하지는 않았지만, 그 방향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현재 미군에는 외국인이 약 3만 명 복무중이다.
- 페더럴 익스프레스에 돈을 지불하고 우편물을 배달하게 하는 일과 블랙워터와 계약해 전투지에 무장 병력을 파견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차이가 있는 걸까?
-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며, 그 의무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 자유지상주의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그 선택을 존중해야 정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의를 자유 존중으로 보는 다른 이론들은 선택의 조건에 약간의 제한을 둔다. 이들은 윌렌츠 판사가 아이 M 사건에서 그랬듯이,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의 선택이나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의 합의는 진정한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고 말한다.
- 정의가 단지 쾌락을 극대화하여 고통의 양을 넘어서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재화를, 그로 인한 쾌락이나 고통을, 단 하나의 통일된 방법으로 무게를 달아 가치를 평가하면 그만이다. 벤담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공리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앤더슨은 모든 것을 공리로(또는 돈으로) 평가한다면 아이, 임신, 부모 노릇처럼 더 높은 기준으로 평가해야 마땅한 사회적 행위와 재화를 비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이제까지 대리 출산 계약을 맺는 사람은 대개 “난자와 자궁을 한 묶음으로 구매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 곳에서(대개는 친어머니가 될 사람) 난자를, 한 곳에서 자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스파는 이런 식의 ‘개별’ 공급이 대리 출산 시장을 키웠다고 설명한다.
- 영국 부부를 위해 자궁 대리모가 된 스물여섯 살의 인도 여성 수만 도디아는 예전에 가정부로 일할 때는 한 달에 25달러를 벌었다. 그런 그에게 아홉 달의 노동으로 4500달러를 벌 수 있다는 사실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 자유시장에서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세상에는 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과연 존재할까?
- 제러미 벤담의 <도덕과 입법의 원리>가 출간된 지 5년 뒤에 나온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에서 칸트는 공리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도덕이란 행복 극대화를 비롯한 어떤 목적과도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다.
-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는 중대한 질문을 다룬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또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자유란 무엇인가?
-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 원칙은 “도덕성 확립에 어떤 식으로든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그를 선하게 만드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일이며, 이익 추구에 신중하거나 약삭빠르게 만드는 것은 덕이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과는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도덕을 사람들의 흥미와 기호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도덕의 위엄이 땅에 떨어진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고, “계산에만 밝은 사람이 되게 할 뿐”이다.
- 칸트의 논리는 이렇다. 다른 동물처럼 쾌락이나 고통 회피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식욕과 욕구의 노예로 행동하는 것이다.
- 칸트에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 옳은 이유로 옳은 행동을 했다면, 그때 기분이 좋았다고 해서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진 않는다.
- 칸트의 답은 이성이다. 우리는 감각이 전달하는 쾌락과 고통에 지배되는 감각적 존재일 뿐 아니라, 이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다. 만약 이성이 우리 의지를 결정한다면, 그 의지는 자연이나 끌림의 명령에 구애받지 않는 선택의 힘이 될 수 있다.
- 무엇이 그 자체가 목적이면서 존재만으로도 절대적 가치를 지닐까? 칸트의 답은 인간이다. “인간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이런저런 의지에 따라 임의로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 칸트가 생각하는 정의에 따르면, 우리는 상대가 어디에 살든, 우리가 상대를 얼마나 잘 알든, 모든 사람의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
- 정언명령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의 기분을 걱정해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어머니를 이성적 존재로 존중하기보다 어머니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이다.
- 칸트에게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을 존중하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몸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다.
- 우리가 집단의 삶을 지배할 원칙을 정하기 위해, 그러니까 사회계약을 작성하기 위해, 현재 모습 그대로 한 자리에 모였다고 가정하자. 어떤 원칙을 고를까? 이 작업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야말로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선택하게 된다. 이처럼 협상에서 어느 누구도 우월한 위치에 놓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합의한 원칙은 공정하다.
- 이 사건은 계약의 도덕적 한계 두가지를 잘 보여준다. 첫째, 동의했다고 해서 그 합의가 공정하다는 보장은 없다. 둘째, 합의만으로는 도덕적 의무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 능력 위주라는 개념에 걸맞게 자유시장에서 소득과 부가 공정하게 분배되려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재능을 개발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모두 똑같은 출발선에 서서 경기를 할 때라야 승자도 포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 롤스가 내놓은 대안은 차등 원칙이라 부르는 것으로,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 재능과 소질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잡는다. 어떻게? 재능 있는 사람을 격려해 그 재능을 개발하고 이용하게 하되, 그 재능으로 시장에서 거둬들인 대가는 공동체 전체에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 롤스는 노력도 헤택받은 가정환경의 산물일 수 있다고 대답한다. “노력하고 도전해서 소위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되려는 의지조차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의 영향이다.”
- 노력에 관한 롤스의 주장을 다함께 토의한 뒤에 나는 비과학적인 설문조사를 실시한다. 우선, 형제의 출생 순서가 노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심리학자들의 견해를 지적한다. 학생들이 하버드에 들어오려는 노력도 마찬가지다. 대개는 첫째가 동생보다 노동윤리가 더 강하고, 돈도 더 많이 벌고, 전통적 의미의 성공도 더 많이 거둔다고 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연구이며, 연구 결과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재미삼아 학생들에게 형제 중에 첫째인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한다. 약 75~80퍼센트가 손을 든다. 내가 이 조사를 할 때마다 그 비율은 거의 똑같았다.
- 노동윤리를 갖는 게 노력의 결과든 아니든, 우리가 기여한 것들은 어느 정도는 공을 내세울 수 없는 타고난 재능에서 나온다.
- 롤스가 도덕적 자격을 분배 정의의 기초로 인정하지 않는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내가 경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은 재능을 가졌다 해도, 그 재능이 전적으로 노력의 결과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둘째, 역시 중요한 우연적 요소인데, 특정한 시기에 사회가 가치를 두는 자질 역시 도덕적으로 임의성을 띤다는 점이다. 나는 의문의 여지 없이 나만의 재능을 가졌다고 외친들, 내 재능으로 얻는 포상 역시 수요와 공급이라는 우연에 좌우될 것이다.
- 프리드먼은 평등주의자들의 반박에 맞서 자유방임 원칙을 옹호하면서 놀라운 결론을 내린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우수 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그보다 못한 환경에서 자란 학생보다 불공평한 혜택을 누린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아무런 노력도 없이 재능과 소질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불공평한 헤택을 누린다는 점도 시인했다. 그러나 롤스와 달리 프리드먼은 우리가 그런 불공평을 수정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며, 그보다는 그 불공평과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하고, 그 결과 생겨나는 이익을 즐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 다양성이란 공동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논리다. 이때의 공동선은 학교의 공동선이자 사회의 공동선이다.
- 아이다호에서 온 시골 소년은 보스턴 사람이 내놓을 수 없는 것을 하버드 대학에서 제공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흑인 학생은 백인 학생이 내놓을 수 없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 하버드 학생이 경험하는 교육의 질은 학생들의 성장 배경의 차이와 거기서 오는 시각 차이에 영향을 받는다.
- 입학 허가는 뛰어난 능력이나 미덕을 포상하는 영광스러운 절차가 아니라는 것이다. 시험 점수가 높은 학생도, 불리한 처지에 놓인 소수집단 학생도 입학을 허가받을 도덕적 자격은 없다. 입학 허가가 정당한 경우는 학생의 능력이나 미덕을 포상할 때가 아니라 대학이 정한 사회적 목적에 부합할 때뿐이다. 드워킨의 요지는 입학 허가에서 정의는 능력이나 미덕을 포상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학교의 사명이 관련 능력을 정하지, 학생의 능력이 학교의 사명을 정하지 않는다.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다.
- 누가 최고의 플루트를 가져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답한다. 최고의 플루트 연주자가 가져야 한다고. 정의는 능력에 따라, 우수성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된다. 플루트 연주의 경우 능력이란 플루트 연주 실력이다. 만약 정부가 부, 타고난 신분, 외적 아름다움, 우연(제비뽑기) 같은 기준에 따라 차별 적용된다면 부당한 일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게 정치의 목적은 어느 목적에도 치우치지 않는 권리의 틀을 정하는 게 아니라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
- 정치의 목적은, 사람들이 고유의 능력과 미덕을 개발하게 만드는 것, 즉 공동선을 고민하고, 판단력을 기르며. 시민 자치에 참여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하는 것이다.
- 정치의 목적은 좋은 삶의 구현이기 때문에, 최고 공직과 영광은 페리클레스처럼 시민의 미덕이 가장 뛰어나고 무엇이 공동선인지를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오직 정치 연합에서만 우리는 언어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발휘하는데, 그 까닭은 폴리스에 있을 때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의와 부정을 고민하고 좋은 삶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노예제가 정당하려면 천성적으로 그 역할에 적합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묻는다. “노예 노릇이 적합해 그것이 공정한 조건인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반대로 노예는 누구의 본성에도 안 맞는지.” 노예가 본성에 걸맞은 사람이 없다면, 정치적, 경제적으로 아무리 노예가 필요하다 해도 노예제를 정당화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결론 내린다. 어떤 사람은 노예로 타고난다. 이들은 육체가 영혼과 다르듯이, 일반인과 다르다. 이런 사람은 “노예로 타고났으며, 이들은 주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 “만약 다른 사람의 재산이 될 능력이 있다면, 그리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이성에 참여해 그것을 이해할 정도는 된다면, 그 사람은 타고난 노예다.”
- 일본은 전쟁에서 저지른 만행을 사죄하는 데 인생했다. 1930~40년대에 일본군은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의 여성과 여자아이들을 강제로 끌어가 성 노예로 이용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은 소위 ‘위안부 여성’에게 공식 사죄와 배상을 하라는 사계 각국의 압력에 직면해왔다. 1990년대에 희생자들에게 민간 기금이 전달되었고, 일본 지도자들은 일부 행위에 사죄를 표했다. 그러나 2007년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일본군은 여성을 성노예로 동원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 의회는 일본 정부에 위안부 여성을 노예로 삼은 일본군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사죄하라고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 배상에 반대하는 흑인 경제학자 월터 윌리엄스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정부가 요정이나 산타클로스에게서 돈을 가져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정부는 시민에게서 돈을 가져와야 하고, 오늘날 살아 있는 시민 가운데 노예제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없다.”
- 그러나 이는 문제를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다. 공식 사죄에 대한 원칙적 반박은 강력하고 솔깃한 도덕적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우리는 그것을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에게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초래한 의무만을 떠맡는 것이다.
- 칸트와 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하는 이유는 우리가 선을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우리는 서사적 탐색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쓴다. “나는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내가 속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볼 것인가, 서사적 존재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계약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 번째 범주의 의무를 인정하는 가를 묻는 것이다. 그 의무를 연대 의무 또는 소속 의무라고 말해두자.
- 자부심과 수치심은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도덕 감정이다.
- 현대 민주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도덕적, 종교적 물음에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그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성적 사고력이 뒤어난 양심적인 사람이 자유로운 토론 뒤에도 똑같은 결론에 이르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 동성혼 논쟁의 진짜 쟁점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동성 결합이 공동체에게 어떤 영광과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즉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도의 목적을 이행하는가 하는 점이다.
- 어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탐색했다. 어떤 이는 정의란 공리나 행복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끼어든다.
- “물질적 빈곤을 없애려고 아무리 노력한들, 더 어려운 일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만족의 결핍에 맞서는 일입니다.”
- 국민총생산은 우리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 미국인의 삶에서 불평등 심화를 걱정하는 더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불평등이 깊어질수록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삶은 점점 더 괴리된다.
- 부유층이 공공장소나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그것들은 달리 대신할 수단이 없는 서민들만의 몫이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