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갔던 부분은 극히 적다. 내가 채집한 데이터도 아니고 데이터를 학자가 해석해둔 수치를 나열하여 설명하다 보니 와닿지 않았다고 말하는게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작가의 문제의식은 이해가지만 근본적으로 인류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작가의 솔루션에는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농업은 효율성을 따질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농업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상태이다.
이 책의 초반부는 농업의 비효율성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태양에서 오는 빛이 인간이 섭취 가능한 형태인 음식으로 바뀌기까지의 경로를 따라 그 비효율성이 대단하다는 것을 수치를 가지고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이 인간은 매우 비효율적인 농업을 오랜 시간 실험을 통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현재 영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크게 동의하지는 않는 부분이다. 농업이 진짜 비효율적인가? 태양의 에너지에서 계산을 시작한다면 분명 맞는 말이다. 그러나 행정학을 전공한 자로서 하고 싶은 말은 농업의 가장 큰 부분은 작물 자체의 특성보다 사람의 노동이고, 사람의 노동은 과거에 비해 훨씬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 효율성이 현재 농업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농촌, 어촌, 산촌 어디든 한국인이 아닌 이주노동자가 주가 되어 일을 하고 있다. 그런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과거 60년대 70년대의 노동집약적 농업보다 훨씬 좋은 농기구와 기계들이 도입되었고 심지어 농업기술 자체도 크게 발달하면서 인간의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을 줄어들어 옛날보다는 훨씬 더 적은 인원의 이주노동자가 대가족 전체가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테면 쌀 한 포대를 생산하는데 10명이 필요했다고 하면 현재는 5명이 필요하다는 식의 효율성의 증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한국의 농업은 사람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고 동시에 진화화여 왔다. 물론 농업 자체의 효율이 낮을 수는 있으나 그에 상응하여 발생하는 노동을 무시한 채 단순히 수확량을 비교하는 것만으로 식량위기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결론은 동의한다. 현재의 농업은 지금 현재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상태이고 앞으로는 아마 그 효율적인 상태가 기술의 반전에 따라 더 증대될 것이다. 거기에 한국의 경우 노령인구가 담당하고 있는 농업의 생산을 차차 대기업 중심의 대형 농업 전략으로 바꾸어 운영하게 된다면 더욱 커다란 효율성의 증대가 예상된다.
이 책은 수치에 매몰되어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결국 문제의식은 책의 제목과 같이 식량은 넘치는데 왜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가로 돌아가는데, 작가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음식물을 줄이고, 적색육 소비를 줄이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수치에 근거하여 농업생산물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활용한 방안으로 일견 타당하고 작가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실현가능한 대안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근본적으로 식량이 과다한대도 굶주림이 발생하는 원인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해야 하고 그 부분에 대한 선행하는 이해가 없이 수치만으로 변화가 가능하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농업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농업에 노동을 투입하고 노동에 관계된 산업이 발전했으며 그러한 산업은 현재에도 상품을 바꾸어가면 존재하고 있다. 국가 단위로 볼 때 많은 선진국은 이미 생산량이 소비량을 넘어섰고 미국과 같은 주요 곡물 수출국들은 소비를 위한 생산이 아닌 수출을 위한 생산을 하는 상황에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농업 생산자들은 더더욱 많은 생산을 하고 싶어 하고 이를 곡물이나 식량과 달리 영원히 훼손되지 않는 금전, 특히 달러 등 안전자산으로 바꾸기 위해 생산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즉 현재의 선진국에서의 농업생산은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득으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고 그를 위해 기술이 발전하고 농업에 관한 산업은 지속적으로 발전 중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술발전은 작가가 언급하는 사하라 이남으로는 보급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결국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의 한계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사하라 이남에 해당 기술을 투입하는데 발생하는 비용이나 리스크보다 그로 인해 얻는 이득이 적은 것이다. 즉. 위험은 내전이다 뭐다 해서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그로인해 얻는 경제적 이익은 거의 없는 수준이기에 사하라 이남에 그와 같은 선진 기술이 도입되지 않는 것이다.
최근 미국과의 관세협상에서 쌀,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이 중점적인 문제로 다루어졌다. 미국이 과연 시장 개방을 통해 원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남는 농축산물을 한국에 풀어 식량이 부족하여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결국 식량을 사람의 목숨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자원이지만 식량을 생산하는 자들에게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의 원천일 뿐 자신의 손을 떠난 농축산물이 누군가에게 분배되는 가는 전혀 관삼사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 때문에 식량은 넘치지만 그 남은 식량이 사라하 이남과 같은 굶주리는 지역에 돌아가지 않는 것인데 작가는 수많은 데이터에 매몰되어 그 한 가운데서 그나마의 효율성마저 삭제하고 있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작가는 사람의 취향이 변하길 바라면서 모호한 대안들만 제시하고 있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했다.
핵심은 누가 누군가에게 식량을 왜 전달하여야 하는가이다.
결국 식량의 생산량은 가능하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상승하여야 하는 것이고 이를 어떻게 분배하는 것인가가 식량문제의 해결책이다.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이상기후로 인한 식량 생산의 어려움 증대는 결국 어떤 식으로는 농부들의 끈질긴 시도와 생물학의 발전으로 해결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향후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인류가 해야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식량이 식량 부족한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유인을 만드는 것이다.
앞서서 사하라 이남은 리스크는 무한대에 가까운데 반해 얻는 이득은 거의 없는 수준이기에 사하라 이남에 대한 농업에 관한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하라 이남에 농업을 투자할 이유를 만들어 줘야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는 당장의 현금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나 진실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하라 이남의 정치적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지속적인 농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리스크를 낮추는 것이 필요하고, 리스크가 낮아짐에 따라 이루어지는 투자에 대하여 확실한 이익이 보장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인류는 식량이 부족하던 고대에서부터 현재까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다 왜 내가 남은 식량을 나와 관계 없는 타인에게 전달하여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