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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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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했던 것은 5-6년 전이다. 당시 참여 중이던 독서모임의 발제도서였고, 항상 그래왔듯 다소 억지로 읽어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때 처음 책을 구입하면서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가끔 헷갈리는, 그 당시의 최대 궁금증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까?

말장난일지도 모르지만, 책의 내용에 비춰봤을 때 어느 하나라고 단정 짓지 않아도 무방하지 않나싶다. 만약 작가가 의도한 부분이라면 그때 이미 천재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 틀림없다. 그 당시에는 독서량도 지금처럼 안정적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책을 읽는 거 자체가 곤욕이었기 때문에 어떤 책이든 읽기 어려웠던 터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모임 날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테레자, 토마시 등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하면서 결국에는 우리의 삶과 사랑으로 대화가 흘러갔던 것 같다.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까지 읽은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나는 분명 어떠한 지적호기심이나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이번 지정도서로 결정되고, 오랜만에 낡은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서 첫 장을 넘겼을 때 스쳐 지나간 그때의 감상을 다소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스스로를 상처 많고 여린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이기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자존감 낮은 피해망상자들의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였다. 아마 5년 전의 나는 지금보다 좁은 시야와 단호한 자기주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나는 이 책이 재미있었다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1년의 1권의 책을 읽을까말까 하다가 우연을 계기로 독서를 습관화하면서 매년 꾸준하게 어느 정도의 독서량을 유지하게 된 후에는 소설, 수필, 고전문학을 잘 읽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 판단하건데, 정독보다는 속독을 추구하고, 옛날 문체가 잘 읽지 않는 나에게 이런 책들은 젬병이었고, 그것은 내공의 부족이고 내가 ‘멋’을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독서’는 즐거움이나 취미생활보다는 ‘지적호기심’을 채우는 수단이고, 공부의 일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도서의 대부분은 경제경영, 인문사회, 창업투자 혹은 재테크 카테고리에 속해 있으며, 최신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베스트셀러를 탐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잠시 머리를 쉬어가는 여정이자, 보다 흥미로운 책이기를 바랬다. 물론 두 번째 독서였지만, 그래서 더 재미없었던 것 같다. 오죽하면, 이 책을 펼쳐놓고 다른 책을 읽었을까.

인류가 사랑한 작가와 세계가 인정하는 고전문학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작가의 특유의 문체와 현대의 드라마 같은 사건구조로 우리의 삶과 ‘사랑’에 대해 담담하게 풀어낸 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은 아름답지만은 않으며, 사랑은 유치하다. 그래서 이 책의 이야기들은 불편하면서도 유치하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흠칫 놀라면서도 흥미로웠던 부분은 책에 메모들이 되어있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 나는 책에 생각을 정리하거나, 혼자만의 질문들을 적어놓곤 했는데 지금 보니 웃기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책을 읽을 당시에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토마시’를 ‘테레자’를 대입하면서 읽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주인공들의 상황과 생각을 공감하거나 이해하려고 한 노력들이 엿보이며 동시에 치를 떠는 부분들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이러쿵저러쿵해도 나의 그때의 연애와 그이후의 연애사에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

얼마 전 팟캐스트를 듣다가, 스타트업과 흥미로운 아이디어제품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자신의 운동기록을 피드할 수 있는 스마트헬스케어제품에 대해 진행자가 인간의 돈과 시간은 대부분 ‘타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쓰이는 것’같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말에 크게 공감하는 바이며, 그런 점에서 ‘나를 사랑해?’ ‘얼마나 사랑해?’와 같은 질문이나, ‘내가 하반신불구가 되어도 내 옆에서 변함없이 사랑할거야?’라거나 ‘재벌3세 미녀가 대시를 해도 흔들리지 않을거야?’와 같은 질문은 필시 질문 그자체로 의미가 있다기보다 상대방에 대한 인정욕구가 표출된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내가 그런 질문을 너무 공대생적인 마인드로 대처했기 때문에 사소한 언쟁과 다툼이 있었고, 아직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선한 거짓말’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책에서도 그런 욕구가 표출된 장면들이 여럿 있었는데, 결국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욕구들은 결국 진화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생존’을 위해 사회적인 동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가 만들어낸 집념일까?

진화심리학에는 ‘자살’을
번식과 진화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도태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의 표출로 보는 ‘견해’가 존재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인정받으려는 것이 아닐까.

테레자는 끊임없이 토마시의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면서 확인받고 싶어하고, 토마시는 그런 테레자를 부담스러워하고, 버거워하면서도 끊임없이 갈망하고 그녀에게 되돌아간다. 전반적으로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바라는 수동적인 존재이면서,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고 보살피지만 상대방에게서 모성애적인 사랑을 바라는 것처럼.. (마치 남자는배 여자는항구?와 같이) 묘사되었다고 느꼈는데 그러한 시각이 불편하면서도, 시대적 상황과 주인공의 특색을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책을 또 한 번 읽으면서 든 확인한 생각은 인연, 운명적인 사랑은 있지만 노력을 통해서도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점과 우리는 매력적인 사람이고 싶어 하고, 상대방에게서 나의 존재와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하면서 어느 정도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점 그리고,

‘결국 자존감과 자기이해도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게 된다는 점’

– 인상깊은 글귀 –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이미 추억이 된 그시점이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 없는 질문이다.’

‘대답 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다.’

<사피엔스>, 이 책은 불편하다.
불편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고 추적이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라는 어렴풋이 짐작하던 사실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있다.

이 책은 이제는 명실상부 지구상의 지배자로서 자리매김한 지극히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종’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가 외면해온 불편한 진실에 대한 자기고백이고, 자아성찰이다.
분명한 건 ‘사피엔스’는 지구 최악의 종으로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다른 종들을 억압하고 멸종시켰으며 필요이상으로 파괴해왔다는 점이고, 그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나 문제인식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제와서 환경 등에 관심을 갖는 것 또한 단순히 그것이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지, 그것은 절대로 범지구적인 사랑이나 그것을 초월하는 가치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다.

결국 모든 것은 생존과 정복을 위한 도구고 수단일 뿐일지도 모른다.
사상, 종교, 국가 등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들도 태초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왜’라는 질문에 부딪치게 되는데, 지배층들이 자신의 권력과 부를 지키기위해 의도적으로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닌 듯 하다.
정치, 사회, 문화 등 여러사상들이 생겨나면서 집단은 통일된 생각과 방식을 추구하게 되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사상’이라는 미명하에 통치하기 쉬워졌고,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결국 종교라는 절대적인 가치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한 듯 착각을 하며 맹목적인 믿음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획일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는 사회적 합의로써, 국민들을 위해 국민들에 의해 존재한다고 하지만 어느새 국민은 국가를 위해 존재하고, 개별 국가들은 거대한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숨긴채 자신들의 이익만을 탐하는 등 국민과 국가의 관계가 주객전도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사상, 종교, 국가가 세상을 통치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것은 ‘돈’의 지배 하에 있다. 화폐가 등장하면서 빈부격차는 가속화되고 자본주의 등장으로 노동소득보다 자본소득의 우월함이 입증되었고, 모든 인간들을 ‘돈’이라는 세속적인 가치아래 통합하고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모든 행위와 가치에 대한 기준이 ‘돈’이라는 환산가능한 가치로 전이되면서 서열화되고 경중을 따지게 되었다. 사피엔스가 이루어온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듯 ‘돈’ 역시 사회적인 합의에 지나지 아니하며 모두의 공통된 합의, 즉 약속없이는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상의 가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꺼이 돈의 종속되기를 자처하며 모두가 제로썸 게임에 동참하고 있다. 그것은 사피엔스가 다른 종들을 파괴하며 성장해올 수 있었던 것은 ‘상상’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체계화시켜온 것인데, 이러한 상상의 비약들이 결국은 사피엔스 종족 내에서도 서로를 파괴하며 그것을 성장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피엔스가 무지하고 욕심많은 신의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그들이 누구보다 연약하고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결핍과 생존에 대한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소통하고 기록하게 하였고, 그러한 과정들이 수많은 우연과 필연들을 거쳐서 지금의 사피엔스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속에서 있었던 불편한 진실과 잔인하고 비열한 역사들은 승자들에 의해 재편집되고 왜곡되었을 것이다. 우리 개개인만 보더라도 각자의 과거와 과오에 대해 재편집하고 왜곡하지 않는가, 그렇게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 되어가고 그 기록의 저편에는 수많은 희생과 아픔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지금 현재는 그 어떠한 것도 당연하지 않고, 떳떳하지 않을 수 있다.

<지리의힘>에 느꼈듯, 우리가 노력과 성장의 결과라고 생각해온 것들은 사실은 필연에 기반하여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이 모여서 이뤄낸 산물이고,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것들을 취하고 향유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기회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좋은 결과는 오롯히 나의 노력과 능력으로부터 만들어진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자만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아쉬운 점이나 불만들은 차치하더라도 전쟁과 죽음의 공포에 떨지 않으면서 의식주와 교육의 혜택을 받으면서 성장했고, 지금 책상앞에서 졸린눈을 비비며 서평을 쓰면서 제일 먼저 드는 걱정이 ‘출근’이라는 점은 우리가 감사하게 생각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끝으로, 사피엔스의 ‘결핍’처럼 나에게도 ‘결핍’은 나의 노력의 원천이고, 성장에 대한 동력이었지만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누려왔고, 그것에 대한 감사함들을 잊고 살았는지 깨닫게 된다. 나의 ‘결핍’이 당연한 것이 아니듯,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한 약탈과 폭력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며, 우리는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공정’한 경쟁은 없으며, 현재의 사피엔스들은 서로가 평등하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면서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암울하고 냉소스러운 현실속에서도 나는 우리가 결국에는 나아갈 것이고, 조금씩 변화속에서 더 좋은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변화를 수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지금까지 ‘사피엔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당연한 것은 없다.
당연하지않은 것들을 당연하다고 했을 뿐이고,
그러한 행위들을 해온 당연하지 않은 우리가 있을 뿐이다.

이 서평은 여전히 스스로의 목표를 확신하지 못하고, 현재를 불만족스러워하며 한편으로 무책임한 나에 대한 기록이자 자기반성의 글이다.

STEW 첫번째 모임, <지리의 힘> 팀 마샬

“당신은 운명을 믿는가?” 이 말이 누군가에게는 희망과 설레임의 문장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절망과 체념의 문장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봤을 이 질문에 대한 생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한 가지 모순은 이 질문이 모두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운명같은 사랑’을 꿈꾸듯 우리는 운명을 선망하기도 하지만 모든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을 부정한다. 나의 삶의 주체는 나이며, 모든 결정과 행동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모든 결과가 운명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정해지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서평의 화두를 ‘운명’으로 던진 것은 보통 운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환경’이 자주 회자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환경과 조건 속에서 태어난다. 혹자는 이것을 ‘금수저’ 등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출발선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명백한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다름에 있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선택 또한 온전히 자기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치열한 경쟁과 노력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밀려난 사람들은 온전히 본인의 노력만이 부족했기 때문에 결과에 승복해야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논의는 사회적인 담론을 형성해가고 있지만, 아직 부족한 듯 보인다.

책 내용으로 들어가서 중남미, 아프리카, 동남아 국가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그 나라 특유의 문화와 기질이 있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는지 혹은 주어진 환경이 필연적으로 그들의 문화와 기질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을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견지할 수는 없다.

진화심리학 관련 책을 읽다가, 농업이 발달하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 인상 깊었다. 동남아나 남미처럼 기후로 인해 자원이 풍부한 나라들은 생산성 증대와 효율성 제고에 대한 니즈가 높지 않기 때문에, 혁신보다는 안정을 택하게 되고 또한 높은 인구밀도는 낮은 인건비를 야기해 산업혁명의 필연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리와 기후의 영향력은 크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4대문명의 근원지는 큰 강을 끼고 시작되었으며, 대부분의 국가들의 국경선이 산맥이나, 강을 경계로 나뉘어져있다는 점을 볼 때, 어디에서 국가가 시작되었느냐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좋은 교육환경과 교통의 편리함을 확보하기 위해 강남의 집값들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처럼, 비옥한 땅과 교통의 요충지를 차지하는 것이 한 국가에게는 사활이 달린 중대한 문제일 수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경쟁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경쟁들이 분쟁이나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그러한 예는 ‘독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리의 힘>을 통해서 좀 더 명확해진 것은 각 대륙별, 각 나라별 지나온 역사들과 현재 처한 상황들이 우리의 생각이상으로 ‘지리’라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수많은 이해관계와 인과관계요소들 속에서도 유의미하고,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시민으로 ‘한반도’라는 곳에서 살아오면서 어떤 영향들을 받았을까?

             1. 사계절의 영향, 봄여름가을겨울과 눈, 비 등

             2. 3면이 바다, 실질적으로 섬나라의 포지션

             3.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강대국들의 전략적 요충지

             4. 과거부터 이어져온 중국의 영향력

             5. 불교 그리고 유교

등.

결국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 온 것들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으로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들이고, 그로인해 형성된 문화와 기질 그리고 현재까지의 역사라고 본다면 이 또한 운명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싶다. 우리가 타고난 재능과 환경만을 믿거나 탓해서는 진취적인 삶을 살 수 없듯이, 주어진 지리적 여건 중에서도 끊임없는 선택과 변화를 거쳤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아닐까..

실시간으로 정보가 오가는 글로벌 시대에 아직도 우리는 국제적인 사건에 대해서 판단을 할 때, 단편적인 모습만 보는 경향이 있고, 간단하게 정리된 이분법적인 사고를 통해서 사건을 들여다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간편하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에는 수많은 이해관계와 인과관계가 얽히기 마련이며 이 또한 그동안의 역사와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열린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고, 그들에 대한 공부와 자유로운 논의를 통해 깊은 이해를 추구해야만 한다.

지리는 언제나 운명들을 가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