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금을 울리는

심금을 울리는 책이다

사회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자기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손을 든다. 그리고 돈이 판치는 현 세상에서 소외된 문제 중 하나는 ‘가족’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감정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편이라 이렇게 눈물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억지 눈물도 좋아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보려고 하지 않는 사회의 어두운 내면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현재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뜻깊다.

저자가 제기한 문제는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내용이라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한 존재 가족. 가장 개방적이면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존재. 같은 행동도 타인이라면 엄청난 문제가 됐을 상황도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는 면죄부가 주어진다.

그렇기에 저자가 던진 가족에 대한 문제는 독자로 하여금 평생 가렵지만,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살짝 긁어준 꼴이다.

아동 : 출생에서 사춘기 사이의 시기에 있는 사람. 주로 성인과 대비되는 개념

책의 주된 내용은 아동 폭력이다. 폭력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하는 단어다. 폭력 없이는 인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가장 빈번하면서도 소외된 폭력이 바로 아동 폭력이다. 저자는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용서(?)된 가족에 의한 아동 폭력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한다.

다양한 사례는 이미 뉴스를 통해서 봐왔지만, 다시 봐도 충격적인 내용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폭력을 극혐하는 비폭력주의자이다)

사전에서도 나오지만, 아동은 성인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많이 알고 있다. 성인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는 약자인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개념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언어가 중요하다

아동을 성인과 대비되는 존재, 약자인 존재, 가르쳐야 하는 존재, 덜 진화한 존재로 배우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무지한 행동은 끊이지 않는다.

저자는 아동을 성인과 동등한 인권을 가진 존재로 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스웨덴과 같이 법으로 아동체벌 금지 등의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춘기를 보낸 대부분의 성인은 그 당시에 아이 취급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나 또한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부모가 아니라 모르지만, 부모에게 자식은 늙어도 자기한테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사춘기를 지냈던 성인이 부모가 되어서 자기 자식을 자기가 받았던 것과 똑같이 취급한다. 현실에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가 현실을 몰랐다는 생각과 함께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살아본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그렇게 아이들은 학업이라는 억압된 환경 속에서 자아를 상실한 기계가 되고, 그 과정에서 폭력과 마주친다.

나도 억압적인 학업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자유에 대한 강한 의지, 강한 사춘기 반항으로 인해 스스로 만든 자유 속에서 살았다. 지금도 부모님은 그때 부모님 말씀을 들었으면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조건 속에 살고 있을 거라고 종종 말씀하시지만 아직은 후회해본 적이 없다.

저자는 아이들의 오락 장소가 없어지고 있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한다. 저자의 말처럼 나는 초등학교 때까지는 놀았던 기억밖에 없다. 총 싸움, 팽이, 자전거, 오락실, 레고 등등 모르는 아이들과도 친한 친구처럼 놀면서 사회를 배웠다. 학원을 운영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온종일 학원에 다니고 집에서는 숙제를 한다고 한다. 학원을 안 가면 놀 친구도 없다고 한다. 모두가 학원에 다니기 때문이다. 나도 자식이 생기면 달라질 거라 하지만 정말 그렇게 키우기는 싫다. 자기가 어떤 자아를 가졌는지조차 모른 채 부모가, 아니 양육강식이라는 문화를 주입하는 사회가 하라는 대로 움직이게 두고 싶지 않다.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뛰어놀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게 하는 대안 마을들이 있다고 한다.

국가는 어디까지

저자는 기자 출신이자, 공직에 있어서인지 현실적인 해법에 대해 지속해서 독자를 설득한다. 이미 갈 때까지 간 대한민국의 문화로서는 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나 또한 결혼과 육아라는 험난한 벽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저자의 말에 많은 동의가 갔다. 우리나라는 저출산이라는 국가 존망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회사에서도 많은 분이 육아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본다. 과거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육아로 인해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도 결혼할 때 전제 조건으로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부부들이 종종 있다.

국가적인 육아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저출산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

국가는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직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나 또한 양육강식의 문화에서 자라서 그런지, 개인의 삶은 개인이 주도적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저자의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에 동의하면서도,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일변도식의 흐름에 조금은 거부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체벌 금지법 등 인간으로서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기본법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한다.

이것 저것

내 글을 돌아보니 참 정리가 안 된 것 같다. 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이 하나씩만 두고 볼 수 없고 너무 많은 것들과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려고 한다. 가족의 문제는 모든 사회적 문제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모든 문제는 사람으로 인해 나오고, 그 사람의 기본 구성이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도외시했던 가족이라는 문제에 대해 되돌아보아야 한다. 저자의 마지막 말처럼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다음 세대인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다시 봐야 할 책이며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할 책이다.

다시 봐야 할 책이며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할 책이다.

인상 깊은 문구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 – p5

가족 해체보다 여전히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 p9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을 말한다. 바깥으로는 이를 벗어난 가족 형태를 비정상이라 간주하며 차별하고, 안으로는 가부장적 위계가 가족을 지배한다. 정상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가족이 억압과 차별의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 p10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 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 p29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p30

자녀가 직계존속, 즉 부모를 폭행할 경우에는 타인이 같은 대상을 폭행했을 때보다 가중처벌을 받는다. 반면 부모가 직계비속, 즉 자녀를 폭행했을 때에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 p32

기도를 할 때에도 남편과 자식들 말고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빌지 않는 엄마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갈아 넣어 운영하는 가족의 성공을 꿈꾸는 야심가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엄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엄마 꿈의 대리 실현자가 된 아이는 희망의 포로다 – p66

그래서 제일 덜 급하고 점수화되지 않을 일들이 가장 먼저 저희들의 인생에서 지워집니다. 어쩌면 행복은 지워진 일들 속에 있었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 p68

경쟁과 수익 창출이 지상과제일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장소는 공적인 삶이 이뤄지는 곳이기 십상인데 그 대가는 크다. 동네의 놀이터와 골목길은 아이들이 공적인 삶을 배우는 공간이다.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 없이 놀면서 아이들은 낯섦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차이를 협상하고 갈등의 타협점을 모색한다. 그렇게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키운다. 그런 물리적 공간이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 p75

사회가 함께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 없이, 남을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불안으로 모두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놀지도 못한 채 일찌감치 떨려나거나 부모의 소망은 충족시켰을지언정 자기 인생을 위해서는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아이들에게 맘껏 놀며 자기 속도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힘껏 가보라고 격려해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가 그토록 어려운 걸까 – p76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동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p78

아이를 직접 키우는 미혼모보다 아이를 버렸을 때 그 아이를 대신 키우는 사람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는 한국 사회는 어떤가. 시설에 대한 지원의 일부라도 직접 아이를 키우는 미혼모 지원으로 돌린다면 양육을 포기하는 미혼모가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 p123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아이를 해외로 입양 보내는 유일한 나라다 – p133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 p157

위기의 나락으로 둘러 떨어지는 개인을 밪쳐줄 사회적 보호제도가 전무한 상황에서 개인이 부여잡을 지푸라기는 뭐였을까.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었다. 가족은 부계혈연 중심의 유교적 가족규범이 지배적이었던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며 줄곧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개인을 지켜주는 거의 유일한 울타리였다. – p166

사회정책이 가족 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서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 p175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은 억울하면 출세하라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 p179

세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부모의 헌신과 자식의 보답 구조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부채의식을 갖도록 만든다. 헌신과 보답의 도덕적 의무로 서로에게 지우는 이 가족주의의 구조 안에서 행복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 p184

자신안에 내면화한 부모의 모습과 싸우고, 달래고, 도망치고, 협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곧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성장의 과정이다. 나는 그 과정을 어떻게 치러내는가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 p190

한국 가족주의에 대해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

첫째.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 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 안전망인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겼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리는 만무하다.

둘째.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 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개별성과 다양성의 설 자리는 없다

셋째. 자기 집단만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러졌다 – p 203

부모의 체벌금지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의 목적은 단순하다. 명백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매우 선명한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 폭력과 비폭력 사이에 아주 단순하고 선명한 줄을 긋는 것이다. 어른의 책무는 아이들에게 폭력이나 협박, 위협에 기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며, 정부의 책무는 비폭력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체벌을 금지하는 법과 함께 부모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정부가 제공하고, 정부와 사회가 합심하여 부모가 아이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될 만한 시간과 에너지를 갖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체계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 p217

스웨덴의 아빠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하루 평균 300분이고, OECD 국가 평균은 47분이다. 한국은? 6분이다 – p231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잉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한국은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 p232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 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 p255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의 선을 정하는게 먼저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는 공감의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물론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의 도덕적 과제, 감성의 영역으로만 남겨두어선 안 된다. 우리의 폭을 넓히려는 교육이 공교육에 제도적으로 포함되어야 하고, 차별금지법,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게 우리를 같이 살아가게 해주는 공감의 제도화다.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계에선 예의, 공적 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다 – p256

내 혈연이 아니더라도 세대를 이어 인류가 계속 존재하리라는 기대가 사라진다면, 개인의 삶은 유한해도 나보다 더 크고 지속되는 전체에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다면, 그 모든 추구와 삶의 의미도 빛을 잃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미래의 낯선 이들에게 의존하고 있다. 존재의 의미를 다음 세대에, 아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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