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크눌프라는 책은 데미안으로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저작이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데미안 이 나오기 전 헤세의 작품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품이라고 한다.
3가지 크눌프 이야기
이야기는 크게 3가지 이다. 첫번째 이야기는 크눌프가 자신의 오랜 친구인 무두장인 로트푸스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두번째 이야기는 방황하는 크눌프와 친구가 크눌프와 동행하다 헤어지게 된 이야기이고, 세번째 이야기는 크눌프가 폐결핵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가 죽는 이야기이다.
세가지 이야기 모두 연결되어 있으나 각각 따로 봐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이룬 다는 점에서 느슨한 연결 구조를 이루고 있다. 전체를 관통하는 크눌프라는 인물은 작가 자신의 방랑자적 모습을 형상화환 자전적 인물이다. 크눌프라는 인물의 삶과 주변인의 평가, 죽음 3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는 방황과 자아에 대하여 다루고자 한 것 같다
파워 E 타입의 방랑자
크눌프는 방랑자이나, 어느 마을을 가든 하룻밤 재워줄 친구가 있고, 말을 잘하고 온갖 기예에 능숙하여 타인의 호감을 사는데 능숙한 사람으로 요즘 말하는 인싸, 파워 E타입의 사람이다. 거기다가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크눌프는 병약미를 지닌 미남으로 그려진다. 그렇다 보니 크눌프는 의도치 않게 친구 와이프를 꼬시고, 건너편 방 어린 소녀 하인을 휘파람만으로 꼬셔서 한번에 데이트에서 입맞춤까지 성공한다. 거기에다가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몇십년만에 만난 어린시절 친구의 집에 초대받고 거기서 묵게 되는 것만 아니라 돈을 받기도 한다.
그야말로 I형 타입의 내향인인 나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타입의 사람이다. 그렇다 보니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았다. 이렇게 친구도 많고 혼자있을 시간이 없는 타입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외로워할 수 있을까, 방황할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그의 친구들은 하나 같이 그를 인정하고 잘되길 바라며 뭐든 도와주려고 난리인데 그렇게 방황만 오랜 시간 살 수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방황하는 평범한 사람
그 모든 사회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첫사랑의 실패? 배신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고 방황하게 된다. 본래 라틴어 학교를 다니던 상류층 자제에 그렇게 계속 살았다면 그 특유의 사회성으로 유명한 정치인도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자이지만, 연상의 여자에게 반해 남성성을 강요당하고 잘나가던 학교를 스스로 그만두고 결국 배신을 당하게 되어 방황하는 모습은 인간적이다. 일견 혼자서도 완벽해보이는 자이나,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그로 인해 인생이 망가져 방황하게 된 크눌프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나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사람임에도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그 표현이 다를뿐이지 결국은 크눌프로 관계를 추구하는 자이고, 그 수많은 관계에서 상처받는 자로 나와 다를게 없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자신을 찾는 시간을 갖게되고 그 과정에서 타인과의 거리를 조절하는 법,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크눌프는 정말 평범하기 그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낭만의 극치
보통 사람은 어릴때는 낭만을 꿈꾸며 공상을 추구하지만 어느순간부터 현실과 타협하고 현실에 안주하기 시작한다. 크눌프에게 정착하여 안정적인 삶을 이루라는 무두장인 로트푸스가 그러하고, 같은 방황을 하고 있으나 점차 시니컬해지면 크눌프를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그러하며 크눌프를 치료하려하는 의사 마홀트가 그러하다. 그들은 모두 현실에 적응한 자이고, 그를 통해 방황하는 크눌프와 달리 안정적인 인생을 꾸리게 된 인물들이다.
그에 반해 크눌프는 낭만의 극치다. 제대로된 직업도 없이 변변찮은 재산도 없이 그저 방황만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어떤 때는 고뇌하고, 어떤 때는 자연을 보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간다. 거기에 가는 곳 마다 이성과 어울리며 적절한 텐션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까지 모두 낭만적이다.
망가진 인간
작가는 크눌프와 현실에 안주한 3사람을 이야기 하며 그 두 종류의 사람의 차이를 극대화한다. 단순히 삶의 방식이 다른 것을 넘어, 선택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생각의 차이를 보여주고,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까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두장인과는 삶의 방식이 다르지만 술에 취한 누군가와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고, 마홀트와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근본적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작가는 누군가의 삶을 일방적으로 긍정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 안주한 자들에게 다른 사람과 바람을 필 가능성을 열어둔 아내, 생각을 둔하게 하는 술, 타인의 삶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견해만 강요하려는 고집을 보여주어 이들의 문제를 드러내어 꼬집으려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역설적으로 작가는 이를 통해 크눌프의 삶을 더욱 비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크눌프는 낭만적인 삶을 살고 있으나 매일매일 방황하는 자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도 그에 대한 반응은 크지 않고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말도 없이 떠나는 선택을 하여 껄끄러운 상황을 피하고자만 하고 있다. 이는 곧 삶의 변화에 무뎌진 것을 말한다. 새로운 것이든 낡은 것이든 어짜피 변하는 것이기에 그에게는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크눌프는 희망이 없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일생을 되돌아보긴 하나,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그에게 죽음은 단지 길고긴 방황의 하나일뿐 더이상 특별한 의미가 없기에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악착같이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이다.
즉, 크눌프를 오랜 방황으로 인간으로 지녀야하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과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진 망가진 인간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삶에 대한 긍정
작가는 그렇게 방황하는 자신의 자아를 크눌프에 대입시키면서 역설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는 삶의 소중함, 멋짐을 설명한다. 크눌프는 자연과 사람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하는 자이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방황을 하면서 인간적인 면모를 잃어버린 자인 것이다. 그러한 크눌프가 결국 병으로 고향에서 쓸쓸히 죽는 것을 통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살게되는 현실에 안주하여 살아가는 인생의 가치를 새로이 일깨우는 것이다.
감상평
크눌프의 이야기는 짧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어떠한 삶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에 적응하는 삶도 분명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