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벌써 두 번째 소설을 읽었다. 국내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 개인적으로는 한강 작가님이 작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 훨씬 이전에 이 소설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서 익히 들어봤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평소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지라, 유명한 소설임에도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었고, 막상 책을 읽기 전에도 단순히 채식에 관련된 내용인가라는 정도로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의 초반 몰입감은 엄청났다. 정체불명의 오싹한 꿈을 꾼 후 갑자기 채식을 시작한 아내, ‘영혜’의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이 꿈의 의미는 무엇인지, 왜 영혜는 갑자기 채식하게 되었는지 등이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2, 3부에서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 없이, 각기 다른 인물들의 시점에서 영혜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이 서술된다. 그리고 끝내 내가 가졌던 궁금증은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명확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영혜의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채식하게 되었는지, 영혜의 형부는 왜 그런 작품을 찍었는지, 그리고 영혜가 마지막에는 왜 채식을 넘어 ‘먹는, 또는 그것과 비슷한 행위 자체’를 거부했는지 잘 모르겠다. 이 작품이 2016년 국내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고 하지만, 나 같은 둔재로서는 그 깊은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기엔 버거운 난해한 소설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내 나름의 해답을 찾아보자면, 소설 끝에 저자가 해당 작품의 집필을 마치고 부제로 붙였다는 ‘고통 3부작’에서 찾을 수 있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고통 3부작’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의 남편 시점에서, 2부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 시점에서, 그리고 마지막 3부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 시점에서 서술된다. 각기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이야기의 시간 순서는 일관되기 때문에 읽기에는 수월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 3부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고통”이다.
1부에서는 영혜가 채식을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폭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남편의 시선을 통해 묘사되는 영혜는 특별한 매력도, 뚜렷한 단점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다. 결혼 후에도 여느 부인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기이한 꿈을 꾸기 시작하고, 갑자기 채식을 선언한다. 가족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 채 채식을 이어가던 영혜는,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로부터 뺨을 맞고, 급기야 강제로 입에 고기가 밀어 넣어지는 상황까지 겪는다. 결국, 참을 수 없었던 영혜는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으며 1부가 끝난다.
2부는 이 사건 이후 남편과 이혼하게 된 영혜와 그녀의 형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상 예술가인 형부는 어느 날 아내로부터 영혜의 몽고반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에 강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이를 예술적 소재로 삼아 영상 작품을 구상하며, 영혜의 나체에 꽃과 나뭇가지 문양을 그려 넣고 촬영을 진행한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남성과 함께 이를 촬영하면서 점점 더 강렬한 예술적 충동에 사로잡힌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에도 같은 문양을 그려 넣고 직접 작품 속으로 뛰어들며, 결국 영혜와 몸을 섞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결국 아내에게 들통나버리고, 영혜와 형부는 아내의 신고로 정신병원에 갇히며 2부가 마무리된다.
3부는 정신병원에 갇힌 영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번에는 그녀의 언니 시점에서 서술된다. 정신병원에 갇힌 영혜는 이제 단순한 채식을 넘어, 아예 먹는 행위 자체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 이전부터 영혜는 몇 차례 기이한 행동을 보이는데, 예를 들어 30분 이상 물구나무를 서 있거나,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숲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점차 현실과 멀어져 가는 듯한 그녀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며 극도의 쇠약 상태에 빠진다. 영혜의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병원 의사들은 강제로 그녀에게 미음을 흘려보내려 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결국, 더 이상 병원에 남아 있다간 생명이 위험해질 것으로 판단한 의사는 대형 병원으로의 이송을 결정하고, 영혜와 언니는 구급차를 타고 대형 병원으로 향하며 3부가 마무리된다.
영혜가 겪는 ‘폭력’과 ‘고통’
이처럼 1~3부를 거치며 주인공 영혜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겪는다. 그녀가 바꾼 것은 단 하나, ‘채식’이었을 뿐이지만, 결국 소설 끝에서는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러 급기야 구급차를 타고 대형 병원으로 이송되는 신세가 된다.
만약 1부에서 아버지의 폭력이 없었다면, 2부에서 형부의 폭력이 없었다면, 3부에서 정신병원 관계자들의 폭력이 없었다면 영혜의 삶은 어땠을까? 그녀는 과연 이런 극단적인 결말에 다다랐을까? 이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다만 여기서 ‘폭력’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부에서 아버지의 폭력은 딸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 즉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2부에서 형부의 폭력은 (독자에 따라 다를 순 있겠지만) 영혜 자체가 아니라 몽고반점에 대한 예술적 집착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3부에서 정신병원 관계자들의 조치 역시, 영혜를 살리기 위한 의료적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단순히 폭력의 가해자로만 볼 수 있을까? 영혜에게 가해진 이 모든 행위는 각기 다른 이유에서 비롯되었지만,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라는 명목 아래 행해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영혜를 점점 더 극단적인 상태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이 소설은 타인의 선의조차도 한 개인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묻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사랑으로, 누군가는 예술적 집착으로, 또 누군가는 치료의 명목으로 그녀를 통제하고자 했지만, 정작 영혜에게 그것은 모두 폭력이었다.
작가가 집필 후 마친 후 붙였다는 ‘고통 3부작’이라는 부제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이 다루는 고통이란, 단순한 신체적 학대나 정신적 억압이 아니라, ‘타인이 강요하는 정상성’ 속에서 한 개인이 겪는 고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은 지금도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품인 만큼,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더 깊고 고고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직 그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보자면, 이 소설은 타인이 정한 ‘정상성’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개인의 고통을 다룬 작품이었던 것 같다(서평을 쓰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 소설의 해석에 대한 유튜브나, 기타 검색은 일체 배제한 채 서평을 썼다).
남편은 그녀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며, 가족들은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 형부는 예술적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하고, 정신병원에서는 치료라는 명목 아래 그녀를 억압한다. 그 결과 영혜는 결국 모든 것을 거부한 채 생존조차 포기한다.
끝까지 자유를 원했던 영혜는 결국 점점 소멸해 갔고, 책을 다 읽은 나 역시 이 소설을 완전히 해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책이 던지는 불편함이 쉽게 잊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